진골

진골신라 골품제의 사실상 최고 계급이다.

골품제 성립 초기에는 왕족으로 구성된 성골이 진골 위에 있었으나 성골 남성의 대가 끊어져(...) 신분 자체가 사라지고, 이후로는 진골에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성골과 진골의 구분에 대하여는 여러 학설이 있지만 분명치는 않다. 일반적으로 성골은 법흥왕 시기쯤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왕위의 차지[편집 | 원본 편집]

진평왕 사후 성골 남성이 아무도 없게 되어, 선덕여왕진덕여왕이 차례로 왕위에 올랐지만 이들의 사후에는 사실상 성골의 대가 아예 끊어지게 되었다(...). 진덕여왕 사후 신라의 왕위는 진지왕진평왕의 후손은 김춘추에게로 넘어갔고, 이후 신라 왕위는 진골 출신이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정복한 국가의 왕족들 또한 진골 귀족으로 편입하는 경우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금관가야의 왕족이나[1] 고구려 왕족 출신인 안승 등이 있다.

제도의 한계점[편집 | 원본 편집]

진골 귀족은 통일신라의 중심지인 경주 일대에 대부분 모여 살았다. 통일신라 자체가 경주 왕국 경주에 모든 권력이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권력을 지향하는 진골 귀족들이 경주를 떠나지 않았던 것. 통일신라시대 경주가 세계 굴지의 대도시가 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실제로 권력에서 밀려나 지방으로 좌천된 진골 귀족이 불만을 품고 그 지방을 기반으로 반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통일신라 전성기에도 종종 있었다.

그런데 왕족과 여타 귀족간에 신분적 격차가 없다는 것은 권력 질서 유지에 분명한 불안요소였다. 이 불안요소는 암군이었던 혜공왕이 상대등 김양상에게 살해당하면서 폭발하기 시작하여, 이후 신라의 중앙정치는 내물왕계와 무열왕계를 중심으로 한 왕위 쟁탈전의 양상으로 흘러가고, 당연히 국가는 막장화의 길을 걷게 된다.

더구나 권력을 틀어쥔 진골 귀족들은 바로 아래 6두품을 비롯한 하위 계급의 불만을 제대로 해소할 수 없었고, 이들이 신라 중앙에 등을 돌리면서 후삼국시대의 성립과 신라의 멸망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게 된다.

각주

  1. 이 쪽 출신의 대표자가 바로 김유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