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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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두품(六頭品)은 신라 골품제 상의 2위 계급을 가리킨다. 득난(得難)이라고도 불렸으며, 엄연히 귀족이다. 기원은 진한의 소국이었던 시절 사로국 6촌 촌장들의 후예로 추정되며, 이후 신라가 세력을 확대하면서 정복된 주변 소국의 지배계층 상당수가 육두품으로 편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또한 엄연히 귀족이므로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지만, 최고위 관직에 진출할 수 없어 자신들의 역량을 정치적으로 발휘하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관심은 주로 학문적인 쪽으로 흐르게 되었다. 삼국통일기 고승 원효와 그의 아들 설총, 신라 말기 유학자 최치원이 육두품이었으며, 통일신라기 중국에 유학하여 중국 쪽 관직에 오른 신라인 다수가 육두품 출신이다.

골품제의 모순[편집 | 원본 편집]

통일신라 초기에는 진골 귀족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육두품을 적극적으로 등용하기도 하였으나, 통일신라 후기에는 진골의 권력 독점이 심화되었고 육두품 지식인 계층을 중심으로 체제에 대한 반감이 점차 커지게 되었다. 이들 상당수는 신라의 통제력이 붕괴되고 각지에 군벌이 등장했을 때 이들을 도와 신라를 무너뜨리는 데 앞장서게 되었다. 당장 신라 말기의 '3최'로 불리는 최치원, 최승우, 최언위 중 최승우는 견훤을, 최언위는 왕건을 돕게 된다.

또한 신라 내에서 출세의 기회가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능력 있는 육두품들은 중국으로 유학하여 당나라의 현량과에 응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최치원이 대표적인 사례.

아이러니하게도 진골 귀족에 대하여 강한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육두품이 오두품 이하의 하층계급에 대하여는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경직된 신분제도의 어쩔 수 없는 특성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중 일부는 고려의 성립 이후 문벌귀족으로 연결되어 고려사회의 주류 지배계층이 된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