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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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瑋鍾. 러시아식 이름은 블라디미르 세르게예비치 리(Владимир Сергеевич Ли).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86년 1월 9일 한성부에서 이범진과 풍양 조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세종대왕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의 후손으로, 그의 가문은 무과를 통해 입신을 도모한 무인 집안이었다. 조부 이경하는 철종부터 고종 대까지 수십년간 핵심 요직을 두루 거쳤고, 이경하의 서얼이었던 부친 이범진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친러파의 거두로 활동했다. 그는 일본에 심한 반감을 품었으며, 을미사변 직후 궁궐에 감금되어 있떤 고종이 아관파천을 단행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후 법부대신 겸 경무사를 맡아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관한 수사와 재판을 이끌었다. 이에 일본 정부가 강한 압력을 행사하고, 일본 낭인들이 이범진을 암살하려는 기미를 보이자, 고종은 이범진의 안전을 위해 미국 공사로 보내기로 했다.

이위종은 11살 때인 1896년 7월 16일 미국 공사로 임명된 부친을 따라 한성부를 떠났다. 이범진은 소실 박씨, 둘째 아들 이위종, 참서관 박역규, 서기생 이풍의를 데리고 마포에서 도보로 인천까지 이동하였고, 7월 17일에 인천에서 미국 군함을 이용하여 청국 지푸를 거쳐 상하이를 경유하여 미국 군선으로 갈아타고 9월 9일 미국 워싱턴 D.C에 도착했다. 그는 부친의 임지인 미국에서 근대교육을 경험했다. 미국 워싱턴에서 1896년 가을부터 1900년 봄까지 약 4년간 College Janson de Lailly를 다녓다. 그는 이 학교에서 근대학문의 기초를 습득하고, 영어와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15살 때인 1900년 5월 4일 주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3국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된 부친을 따라 파리에 도착했다. 1901년 3월 26일 대한제국 외부대신 박제순이 파리유학생 이위종의 프랑스 육군사관학교 입교주선을 요청했다. 이로 볼때 이위종은 파리에서 1년 정도 프랑스어를 배운 후 군사학교 입학을 모색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01년 봄 내지 여름부터 2년간 군사분야의 전문가들을 양성하기 위한 3년 과정의 특수 전문학교인 Ecole Speciale Militaire de Saint-Cyr를 다녔다. 17살 때인 1902년 7월 18일 주프랑스공사관 서기생에 임명되었다. 당시 대한제국의 재정이 매우 좋지 않아서, 그는 1년 남짓 기간동안 급여도 받지 못했다. 이어 1903년 9월 1일 주러시아공사관 3등 참서관에 임명되어, 1년 정도 남은 군사학교 학과과정을 중단하고 파리를 떠나 8월 30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 이후 1904년 2월 7일 주독일공사관 3등 참서관에 임명되었다가, 3월 18일 주러시아공사관 참서관으로 복귀했다. 그는 한국공사관에서 서기생과 참서관으로 근무하는 동안 부친의 외교 활동을 적극 보좌했다. 서기생으로서 문서와 전보의 수발과 정리, 중요 문서의 번역과 베껴쓰기, 공사관 잡무 보조 등을 수행했고, 그리고 참서관으로서 공사관 운영의 실질적인 임무를 담당 내지 보좌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범진은 대한제국의 국외중립화선언 문제와 관련하여 한국과 러시아 사이의 가교 역할을 맡았는데, 이위종은 부친을 도와 긴급한 외교업무를 담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1904년 2월 한일의정서 체결 후, 일제는 러시아에서 고종의 비밀 지령에 따라 항일외교를 펼치는 이범진의 소환을 집요하게 요구했다. 결국 고종은 1904년 5월 18일 주러공사관을 철폐하고 이범진에게 소환령을 내렸다. 이범진이 따르지 않자, 조정은 9월 1일 이범진을 면직했다. 하지만 이범진 부자는 러시아 정부의 보호하에 계속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며 공사관 업무를 담당했다. 이위종은 고종의 청원 밀서나 전보를 프랑스어로 번역했고, 이범진은 이것을 러시아 정부와 니콜라이 2세에게 전달하고 한국의 구원을 요청했다. 이범진은 고종이 헤이그 특사 파견에 즈음하여 니콜라이 2세에게 도움을 요청한 5통의 친서를 올리기도 했다. 그중 대표적인 밀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짐은 더욱 곤경에 빠져가고 있으나 호소하려 해도 할 곳이 없다. 다행히 국제평화회의가 개최되어 이 회의에서 짐은 억울한 우리나라 사정을 밝히고자 한다. 대한제국은 러일전쟁 직전에 전세계에 중립을 선포하였다. 그런데 현재 상황은 매우 분통스러운 처지에 놓여 있다. 짐의 불행한 처지를 폐하가 잘 알고 있으니 이 회의에 짐의 사절이 참가할 수 있도록 협조하여 짐의 나라 사정을 밝히게 해주기 바란다. 만일 성공한다면 짐은 나라의 주권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범진은 러일전쟁 기간 동안 극동의 러시아 사령관들과 연대하여 일본군을 몰아내려 했다. 그는 만주군사령관 쿠로파트킨에게 서한을 보내 한국의 친러파가 함경도 지방에서 세력을 확대하고 있으며, 그곳 백성들이 언제든지 러시아군에 참여할 준비가 되어있으므로, 러시아군이 한반도 북부를 기습공격하면 일본군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또한 자신이 러시아에 대한 일제의 비방과 중상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사전조치를 취해놓았다고 확언하며, 러시아가 불가리아나 세르비아를 해방시켰던 것처럼 한국을 해방시켜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고종과 한국정부는 러시아군이 하루속히 출동하여 도와주기만을 고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범진은 러일전쟁 이전부터 대한제국에 우호적인 러시아 정부에 재정지원을 요청했다. 특히 공사관 운영비를 위해 7,325루블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하여 1904년 10월 19일 러시아 외부서 경리국으로부터 승인통지서를 받았다. 또 1905년 11월 을사조약 체결 직후에 다시 공사관 이전비로 5,016루블을 내줄 것을 요청했다. 이러한 자금은 차관의 형태로 러시아정부로부터 이범진에게 하달되었는데, 여기에는 이범진 부자의 외교활동비와 생활비가 포함되었다.

을사조약 이후 주러공사관이 기능을 상실하자, 러시아 정부는 이범진 공사에게 상훈국 최고훈장인 스타니슬라프 1급 훈장을, 이위종 서기관에게 스타니슬라프 3급 훈장을 수여했다. 이러한 수훈은 이위종이 부친 자결 후 러시아 정부에 재정지원을 요청할 때 중요한 전례 근거가 되었다. 이위종은 20살 때인 1905년 11월 스웨덴 외교관의 후손이자 토볼주 주지사를 지낸 발레리안 놀켄 남작의 딸 엘리자베타 발레리야노브나 놀켄(당시 17세)과 결혼했다. 이범진은 이보다 앞서 러시아정교회 종무원장에게 엘리자베타와 이위종을 결혼시킬 의사를 밝히면서, 아들이 유교를 믿는 것 때문에 결혼에 어려움이 없기를 바란다는 특별 부탁을 했다. 그러나 러시아법은 정교회 신자와 유교 신자의 결혼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위종이 결혼하려면 러시아정교회로 개종해야 했다. 이에 이위종은 러시아정교로 개종한 뒤 블라디미르 세르게예비치 리(Владимир Сергеевич Ли)라는 러시아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위종 부부는 세 딸을 낳았다. 첫째 딸 베라는 1906년에 태어났으나 16살 때 디프테리아로 사망했고, 1909년 둘째딸 니나가 태어났으며, 1912년 셋째 딸 에브게니야가 태어났다.

1907년 5월 21일, 헤이그 특사 이상설이준이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출발하여 6월 4일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 그들은 이범진 부자를 찾아가 고종이 자신들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라고 보냈으며, 이위종이 1907년 4월 20일자 고종의 전권 위임장에 따라 특사에 임명되었다고 알렸다. 특사들은 이범진을 통해 러시아 외무상 파블로프를 만나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내는 고종의 친서를 전달했다. 또한 평화회의 의장과 각국 대표들에게 제출할 장서를 프랑스어로 번역했는데, 그 내용은 일제의 한국 침략과 을사조약의 불법성을 규탄하고, 한국의 국권회복에 대한 세계 각국의 협조를 구한 것이었다. 장서 번역에는 유창한 프랑스어 실력을 지닌 이위종이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이위종은 이상설, 이준과 함께 헤이그로 떠나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하여, 융호텔에 자리를 잡은 즉시 태극기를 계양하고 외교 활동에 돌입했다. 6월 28일 일본을 제외한 각국 대표들에게 프랑스본 장서를 배포하였고, 29일 평화회의 의장인 러시아 수석대표 넬리도프를 만나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알리고 한국대표를 평화회의에 참석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넬리도프는 회의참가 결정권은 네덜란드 정부에 있다며 책임을 회피했다. 이에 특사들은 후온데스 네덜란드 외상을 방문하여 한국의 입장을 호소하고 회의 참석권을 요구했지만, 후온데스는 한국이 외교권을 상실했다는 이유를 들어 특사들의 요구를 묵살했다. 특사들은 중재재판을 다루는 제1분과위원회에 출석하여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는 고종의 친서를 제출하려 했지만 거부당했다. 이어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대표들을 개별 방문하여 을사조약의 불법성과 일제의 만국공법 위반사항을 지적하며 지지를 호소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각국 대표들이 협해주지 않자, 특사들은 장외 언론 활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6월 30일, 그들은 영국 신문기자였던 윌리엄 T. 스테드와 인터뷰하고 <평화회의보>에 성명서를 게재했다. 스테드는 이와 별도로 "무슨 이유로 한국을 제외했는가"라는 제목의 논설을 기고하여 한국 대표들을 회의에 참석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1] 스테드의 글은 런던 타임스, 뉴욜 헤럴드에 실려 한국문제에 대한 여론을 환기하는데 기여했다.

이위종은 이 시기에 프랑스어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유럽의 생활 방식에 익숙한 점을 살려 특사 대표 역할을 자처했고, 언론으로부터 'Prince Li'로 불렸다. 7월 5일 평화회의 회의장 앞에서 스테드와 회견을 가졌을 때, "법과 정의와 평화의 신을 찾아 헤이그에 왔으나 평화회의 대표들은 정의와 조약을 실천하려는 의자가 전혀 없다"고 조소했다. 이어 1905년 11월 조약에 따라 한국대표들의 대표권이 사라지지 않았느냐는 스테드의 지적에 대해, "을사조약은 황제의 승인없이 강압에 의해 체결된 것이므로 불법적인 무효조약에 지나지 않으며, 이러한 조약 때문에 대한제국이 평화회의에 참석치 못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대한제국이 실제로 일본의 수중에 떨어지지 않았느냐는 스테드의 질문에 대해, 대한제국의 독립과 고종황제의 신변안전을 보장했던 1904년 2월 한일의정서의 허구성을 논하며 강대국의 침략논리를 강하게 질타했다.

1907년 7월 9일 밤, 이위종은 세계 각국의 기자들이 가득 모인 국제협회에서 <한국을 위해 호소함(A Plea for Korea)>이란 주제로 장시간 유창한 프랑스어로 연설했다. 이 연설은 국제협회를 주관하던 스테드의 협력을 얻어 이상설과 이위종이 귀빈으로 초청되어 이뤄졌다. 스테드가 한국역사를 간략히 소개한 후에 등단한 이위종은 러일전쟁 이후부터 을사조약 이후까지 일제의 대한침략정책의 제반 실상을 명쾌하고 상세하게 설명했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은 두 가지의 전쟁목적이 있다고 공언하였다. 첫째는 한국의 독립유지와 영토보전이요, 둘째는 극동의 교역을 위하여 지속적인 문호개방의 유지였다. 일본의 정치가들은 되풀이하여 이번 전쟁이 일본 자신만이 아닌 모든 민족의 문명을 위한 싸움이라고 선전하였다. 그래서 동양에 파견된 영미인, 상인, 선교사들 및 기타인들이 모두 일본이 언명한 것을 이해하리라고 믿었다. 한국 국민과 정부는 한국의 독립유지와 영토보존을 위해서라는 일본의 정중한 약속을 믿고 일본과 동맹관계를 맺었다. 이 조약의 결과로서 한국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일본의 전쟁 수행을 지원하였다. 또 장기집권으로 인한 부패, 과도한 세금징수와 가혹한 행정에 허덕여왔던 한국 국민과 정부는 애원과 희망으로 일본인들을 환영하였다. 그 당시 한국인들은 일본이 부패한 정부 관리들을 엄격히 처벌해주고, 일반 백성에게는 정의감을 북돋워주고, 정부 당국의 정치, 행정에 대해 진실한 조언자가 되고, 한국민들의 개혁운동을 잘 인도해 줄 것으로 확신하였다. 일본인들은 거듭하여 그들의 한국 진술은 그들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문명국의 행위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문호개방과 모든 백성을 위한 기회 균등의 보존을 공고히 하기 위함이라고 극구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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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태도를 돌변하여 만사에 있어 공평과 기회 균등을 택하는 대신, 추잡하고 불공평하고 비인간적이고 이기적인 동시에 가혹한 처사를 감행해 왔다. 일본이 한국에 들어온 후에 첫번째 요구는 한국 영토의 대부분을 점하고 있는 미개간지를 하등의 보상도 없이 50년간 그들에게 양도하라는 것이었다. 두번째 요구는 일본황제 특사인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군을 동원하여 궁궐을 에워싼 가운데 황제에게 동의하라고 강요한 것이었다. 이 조약의 초안은 첫째 한국의 대외적 문제의 관할 및 지휘는 일본에게 위임할 것, 둘째 한국 정부는 국제적 성격의 어떠한 회합이나 약정일지라도 일본의 중개 없이는 결정짓지 않는다는 것을 서약할 것, 셋째 서울에 일본통감을 배치할 것, 넷째 한국 내에 일본 주재관을 임명할 것 등 네 가지로 되어 있다. 한국 황제와 대신들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결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토가 이를 고집했기 때문에, 황제는 이에 동의하느니 오히려 죽음을 택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11월 17일 저녁깢기도 결론을 보지 못하자, 일본인들은 "이를 수락하지 않으면 만사에 있어서 즉각적인 파괴를 의미할 뿐이다"며 위협을 가하였다. 공포에 질린 대신들은 주변에서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듣더라도 일본군들이 살그머니 옆에 접근해 오는 것으로 상상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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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은 가장 강력한 태도로 조약ㄷ 체결을 거부하는 참정대신 한규설을 체포하여 가두고, 한국정부의 반대를 무력으로 누르고 조약 체결을 감행하였다. 그럼에도 일본의 정치평론가나 선전가들은 세계만방에 대하여 이 조약이 마치 한국측의 선의적이며 자진적인 양보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가장 우의적이며 형제적인 우호관계를 가진 체하면서 슬쩍 상대방의 호주머니를 터는 위선가는 공개적인 강도 행위보다도 더욱 경멸해야 할 일이며 잔인한 일일 것이다. 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한국민들은 궐기하였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총칼에 의해 진압되었다. 1905년 11월 17일 이후 일본은 무력과 총기로서 한국인들을 진압하고 한국인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그들은 한국의 정부 각 기관을 점령하고 그것을 일본인들의 재정적 권익만을 위해 사용하였다. 그들은 강탈, 강도, 잔인한 흉계 등을 감행하였으며, 이로 인한 3년간의 실질적인 손해는 구체제하 정부의 가장 잔혹한 정치가 50년간 저지른 해독보다 더욱 심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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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가 일본에서 1억원(500만불)을 차관해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돈은 일본의 특수 이익을 위해 사용되었다. 재한 일본인 관리들은 본토 봉급의 3~4배를 받았고, 수도공사는 일인들의 거주지인 제물포와 서울의 일본인 거주지에만 설치되었다. 교육기관의 설치는 한국어를 근절시키고 일본어를 대신 가르치려는 것이며, 한국인의 해외유학은 반일주의를 호소, 선전할 우려가 있다고 불허하였다. 행정개혁을 했다고 하나 유능하고 신망있는 한국인 정치가를 축출하고 일본화한 사람들로 대치한 것에 불과하다. 뿐만 아니라 일본 정권은 개인 소유지를 군사상의 필요에서 아무런 보상 없이 박탈하였으며, 화폐제도를 개혁하여 한국 상인들을 파산상태로 몰아넣었다. 실정이 이와 같은데도 일본인 정치가들은 그들의 모든 일이 한국 국민들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인들은 항상 '평화', '평화'하지만은 어찌 사람이 기관총구 앞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겠는가. 한국민이 모두 죽어 없어지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는 한국의 독립과 한국민의 자유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한 극동의 평화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한국 국민들은 조직은 되어 있지 않으나 독립과 자유라는 공동 목표에 대하여 정신적으로 결합되어 있으며, 이 목적을 위하여 한국 국민은 죽음을 무릅쓰고 일본인의 잔인하고 비인도적이며 이기적인 침략에 대항하고 있다. 어떠한 일을 해서라도 일본인과 싸우려고 결심한 2천만의 한국 국민을 대량 학살한다는 것은 일본인에게 있어서 그다지 흥미있거나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사실이다. 사실상 일본은 한국의 독립과 문호개방에 대한 엄숙한 공약을 배반하였다.

이위종의 연설흔 회견장에 모인 세계 각국 기자들을 감동시켰다. 폴란드 기자의 제안에 따라 함국의 입장을 동정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으며, 헤이그에서 발행되던 Haggscbe Courant의 7월 10일자에 그러한 사실이 자세히 보도되었다. 그러나 결의안의 내용은 "한국은 동정하지만 일본을 비난하지는 않는다. 조속한 시일 내에 국제재판소가 헤이그에 설립되어 이러한 문제들을 공정하게 다루고 진리와 정의가 회복되기 바란다"는 어쩡쩡한 것이었다. 그후 부인 엘리자베타의 병환이 위중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위종은 며칠 내로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갔다. 그 사이 이준이 7월 14일 사망하였고, 이위종은 다시 헤이그로 돌아와 이준의 장례를 치렀다. 7월 19일 이상설을 모시고 윤병구, 송헌주 등과 함께 7월 19일 헤이그를 출발하여 영국에서 3일간 머문 뒤 8월 1일에 2주간 체류 예정으로 미국 뉴욕에 도착했다. 이들이 미국으로 간 것은 미국 정부에 한국이 일제로부터 탄압을 받은 사실, 고종이 을사조약에 동의한 적이 없다는 사실, 한국이 일본의 보호를 받으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 한국민이 독립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등을 설명하고 도움을 구하라는 고종의 밀명에 따른 것이었다.

이상설과 이위종은 미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에게 면회를 신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위종은 8월 2일 뉴욕 타임지 기자와 가진 인터뷰에서 일ㅇ본이 한국과 강제로 체결한 을사조약의 불법성을 규탄하고, 헤이그특사 활동 이후 일제가 한국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킨 사건 등을 지적하며 미국의 지원을 요청했다. 아울로 이상설과 함께 공립협회가 주최한 환영식장에 참석해 일본의 만행과 동양의 대세와 구미인의 상업상 이익을 연설하고, 다시 헤이그로 돌아가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평화회의에 끝까지 주선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두 사람은 9월 1일 다시 헤이그로 가서 임시로 매장했던 이준의 유해를 현지 청년기독교협회의 도움을 받아 Niewe Eykenduynen 공동묘지에 안장헀다. 그후 9월 5일 헤이그를 출발하여 파리, 베를린, 런던, 상트페테르부르크 등지를 연이어 방문하여 구국연설회를 개최했다. 한편 일본은 헤이그 특사를 한국 침략을 촉진하는 구실로 삼고, 1907년 7월 18일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다. 이후 1907년 8월 8일 궐석재판을 열어 '밀사를 참칭하여 나라의 외교를 망친' 혐의로 이상셜을 교수형, 이위종과 이준을 종신징역에 처했다.[1] 이리하여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이상설은 미국으로 떠났고 이위종은 러시아로 향했다.

한편,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던 이범진은 1907년 봄부터 겨울까지 연해주의 이범윤, 엄인섭과 자주 서한을 주고받으며 국사를 개탄하고 국권회복의 방안을 강구했다.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 소장의 <불령단관계잡건>에 일본어로 번역 수록된 서한들에 따르면, 이범진은 1907년 4월 28일 조창호에게, 6월 10일 엄인섭에게 각각 편지를 보냇다. 이범진은 두 사람의 활약상을 잘 알고 있다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고, 계속 힘을 다하여 국가의 원수를 갚고 국권을 회복하자고 역설했다. 또한 이범윤이 막하의 안중근, 엄인섭에게 보여준 이범진의 친필 편지에는 "연해주 방면에서 동지들을 연락하여 두만강을 넘어 일거에 함경도를 점령하고 길게 내달려 서울로 들어가 개선가를 부르자. 러시아 관헌들은 항상 우리를 후원하겠다는 뜻을 보였다"고 하였다. 또한 그 자신이 총사령관이 되고 이범윤이 부사령관이 되어 국내로 진공할 것을 천명했다. 이렇듯 의병 활동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그는 1908년 2월 아들 이위종과 사돈 놀켄 남작에게 1만 루블을 가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이범윤을 지원하도록 했다. 이 1만 루블은 고종의 내탕금에서 나왔을 것으로 추정된다.[2]

1908년 3월 어느 시점에 연해주에 도착한 이위종은 한국군 통솔 교관들과 40명의 의병을 구성하였다. 이후 3월 말에 이범윤이 전 서울 황실 친위대 대위 김인수와 함께 연해주 지방정부 행정관 스미르노프를 찾아가 "일본의 압제에 적극적으로 대항하고자 하니 압수된 무기를 돌려달라"고 요청했다. 이위종은 1908년 봄 크라스키노에서 동포들의 단결과 보호를 위해 조직의 결성을 촉구했다. 안중근이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뒤 일본 형사에게 진술한 바에 따르면, 이위종은 동지들에게 다음과 같이 밝혔다고 한다.

동포가 도처에서 생활하나 공사나 영사를 두어 보호를 받는 일이 없다. 러시아에 입적한 자는 러시아에 의뢰하여 보호를 받을 것이나, 그렇지 않은 우리는 하등 의뢰할 기관이 없다. 그러므로 동포가 일치단결하고 러시아인의 압제에 대항하려면 단독 자립해도 불가능하다. 해외 동포는 어느 나라 사람이라도 또한 일개 단체가 되어 외부에 대항하는 것이 상례이다.

1908년 4월 크라스키노의 최재형 집에서 연해주 일대 의병운동자들의 회합이 열렸다. 이때 의병단체 동의회 조직이 논의되었다. 동의회 발기인들은 지운경, 장봉한, 전재익, 전제악, 이범윤, 이승호, 이군보, 최재형, 엄인섭, 안중근, 백규삼, 강의관, 김길룡, 이위종, 조순서, 장봉김, 백준성, 김치여 등 18인이었다. 이들은 뜻을 같이 하는 수백명과 함께 총회를 개최하여 총장, 부총장, 회장, 부회장 및 기타의 임원선거를 실시했다. 그 결과 총장에 최재형, 부총장에 이위종이 선출되었다.

<불령단관계잡건>에 따르면, 이범윤은 한 표 차이로 이위종에게 밀리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수년간 국사를 위해 진력했는데도 명성도 없고 나이도 어린 조카보다 뒤졌다"며 분노를 나타냈다고 한다. 그러자 이위종이 급히 단상에서 내려와 이범윤에게 부총재를 사양해서 사태가 진정되었다고 한다. 이후 실시된 회장 이하의 선거에서 회장에 이위종, 부회장에 엄인섭, 서기에 백규삼, 평의원에 발기인 전부가 선출되었다. 그러나 이범윤파는 선거 후에 고종의 밀지를 가지고 있는 이범윤에게 반대한 9인(지운경, 장봉한, 전제익, 전제악, 안중근, 백규삼, 강의관, 김길룡, 엄인섭)을 "어명을 어긴 모반인"이라고 몰아붙이는 첩지를 각 곳에 붙였다고 한다.

1908년 5월 크라스키노의 최재형 집에서 동의회가 출범했다. 동의회는 이주한인들의 조국정신 배양, 결속 도모, 환난 구제를 표방했지만, 항일의병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결사의 성격도 갖췄다. 동의회는 이범진, 이범윤, 이위종, 안중근 등 서울에서 온 세력과 최재형, 엄인섭 등 연해주의 한인들이 합세하여 조직한 연합체였다. 그러나 연해주 한인 세력이 최재형의 일족으로 구성되어 결속력이 강했던 반면, 서울에서 온 이들은 이범진계와 이범윤계로 나뉘어 의병대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갈등을 빛었다. 이범진계는 최재형 세력을 지지하였고, 이범윤 세력은 동의회 결성 직후 동의회를 거진반 이탈했다.

한편 이위종은 러시아 정부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안중근의 진술에 따르면, 이위종은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할 때마다 러시아인 여관에 숙박했으며, 그때마다 각지에 산재한 동포의 상황을 시찰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이위종은 이범윤, 김인수 등과 함께 때때로 직업을 가진 연해주 한인들에게 군자금 지출을 요구했다. 러시아 내무장관은 이위종의 이같은 활동을 주목하고, 블라디보스토크 경시총감에게 그를 감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연해주 국경수비대의 첩보에 따르면, 1908년 4월 하순 크라스키노에 있던 이범윤과 이위종은 만주로 활동지를 옮기라는 국경수비대원의 제안에 대해 2달 정도 머물겠다고 응답했다고 한다. 이위종은 6월 중순 크라스키노의 최재형 집을 방문했는데, 이때 러시아 국경수비대원이 추방 위협을 가하며 즉각 떠날 것을 지시해 어쩔 수 없이 크라스키노를 떠나야 했다.

1908년 7월부터 최재형계의 도영장 전제익, 좌영장 엄인섭, 우영장 안중근을 충심으로 서울진공작전이 전개되었다. 이들은 경흥으로 진출하여 홍의동 전투와 신아산 전투에서 국경수비대를 격파했다. 그러나 갑산을 거쳐 7월 하순경 외혈의 양산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패배했다. 이렇듯 의병 활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있던 7월 말, 이위종은 부친의 전보를 받고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갔다. 놀켄 남작은 그보다 앞서 6월 중순에 귀향했다. 이로써 이범진이 기획을 총괄하고 최재형, 이범윤이 현지 활동을 담당한 연해주 지역의 초기 의병운동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일제는 이범진이 러시아에 있는 한국의 마지막 대리인이며, 끊임없이 항일책을 강구하는 '배일분자'라고 여겼다. 그들은 이범진을 러시아에서 축출하고자 갖은 계략을 꾸몄다. 1909년 10월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 역에서 암살하자, 일본 형사들은 이범진의 큰아들 이기종을 체포하여 혹독한 심문을 가했으며, 이후에도 이범진 가족에 대한 감시망을 강화했다. 이위종은 이에 대해 러시아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아버지는 어떤 유산도 남기지 않았고 경성에 있는 집은 몰수당했다. 경성에는 어머니와 형제, 자매가 살고 있으나 2년 반 정도 그들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이것은 일본인이 편지를 모두 몰수해 버리기 때문이다. 일본인이 우리 친족에 대하는 대우는 매우 가혹하여 하루에 4번이나 가택수색을 당한 적도 있다. 그리고 내 형제는 이토 히로부미 암살사건의 연루혐의로 체포되어 7개월간이나 투옥된 적이 있다. 대략적으로 일본인의 조선에서의 횡포는 조선인의 반항심을 격화시켜 조선인은 영구히 일본인과 융화하기 어려울 것이다.

1910년 4월, 일본은 "이범진의 이전 과실에 대해 어떠한 책임도 지우지 않겠다"고 러시아에 약속했다. 그들은 이범진을 귀국시켜 상당한 대우를 해주면, 자국의 손해를 피하고 한국인들에게 감화를 주는 데 유익할 것으로 보았다. 러시아 정부는 이범진에 대한 완전한 불가침권을 일본공사가 공식적으로 확약해야 한다는 입장을 제시했다. 일제는 이를 수락했으나, 이범진은 귀국을 원하지 않았다. 일제가 불가침권을 보장해 줄리 없다는 의심을 품기도 했고, 고종이 러시아에 계속 남아있으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고종은 1908년 1월 "짐은 러시아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으니,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더라도 러시아에 남아 니콜라이 2세 황제에게 도움을 청하고, 짐이 운명한 후에도 러시아에 계속 남으라"는 밀명을 내린 바 있었다. 이범진은 이에 따라 일제의 회유책에도 불구하고 계쏙 러시아에 머물렀고, 이위종은 부친의 뜻에 따라 러시아에서 생활했다.

그러던 1911년 1월 26일, 이범진은 상트 페테르부르크 근교의 노바야 제라브냐에 있는 별장에서 자결했다.부친의 충복 장씨로부터 비보를 접한 이위종은 부친이 생전에 정해놓은 장례 절차에 따라 장례를 치르고 사후 수습에 힘썼다. 러시아 각지에서 위로 전문과 서한이 왔고, 장례식 당일에는 재러 한인과 러시안인을 포함하여 수백명이 참석했다. 이위종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부친의 유해를 사원에 안치하고자 했지만 종무관원이 원하지 않아 우즈펜스케 묘지에 안치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일제가 부친의 유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조선이 독립을 회복한 후에 유해를 경성에 개장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부친이 남겨놓은 1만 2천 루블의 자금을 미주의 대한인국민회와 연해주의 한인단체, 독립운동가 및 그들의 유족들[3]에게 전달했다. 부친의 장례를 치른 뒤, 1911년 3월 1일 본국에 있는 모친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한을 발송했다.

장의 절차는 무사히 완료했으니 어머니도 이제 단념하시고 마음을 단단히 잡수시기 바랍니다. 아버님은 병으로 돌아가신 것과 달리 갑자기 나라를 위해 자살하셨으므로 어머님과 형님께 만사에 대해 지시를 받을 겨를도 없이 임의대로 장의를 지낸 것을 사죄드립니다. 아버님은 생전 3~4개월 동안 지극히 즐겁게 지내셨고 어떤 이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홀연히 이러한 전말로 16년의 세월이 마침내 공허로 돌아가고 말았으니, 아버님의 마음도 알 것 같습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한없이 많이 있지만, 다시 뵈올 날이 있을 것으로 알고 후일로 미루겠습니다. 어머님을 비롯하여 다들 자애하시기 바랍니다.


(중략)

아버님의 생전의 여러 물품들은 모두 매각했습니다. 의복과 서적 등은 아버님꼐서 여러 사람에게 분배했기 때문에 물품이라고는 의자나 탁자 같은 것들 뿐입니다. 16년간 만리타향에서 오로지 부자간에 서로 의지해온 저의 불행을 무엇이 비유할 수 있겠습니까.

이위종은 부친 생전에 이범진으로부터 매달 250루블의 생활비를 보조받았다. 그는 방이 6개 있는 집을 매월 160루블에 임대하여 하인들을 거느리고 마차와 자동차를 이용할 정도로 자못 넉넉한 생활을 영위했다. 그러나 부친이 자결한 후 극도의 재정곤란 상태에 빠졌다. 급기야 니콜라이 2세에게 진정서를 제출하여 생계비조차 없이 지내고 있으니 자신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거나 생활연금을 지급해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러시아 당국은 이위종의 재정상태를 조사한 뒤 1911년 1월 13일부터 3년간 월 50루블을 지급하기로 했다. 그후 이위종은 가옥과 지출을 줄여가며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힘썼다. 1912년 3월 21일 러시아 황제에게 자신을 러시아 국민으로 인정해주고 귀족의 직위를 내려달라고 하였다. 러시아 정부는 이범진이 왕족 출신이며 고종이 이범진을 "나의 친애하는 형제"라고 불렀던 사실에 주목하여 이위종의 청원을 승인했다. 이로써 그는 한국 국적을 버리고 러시아 국적을 취득했다. 또한 그는 6월경에 네라토프 외무상에게 자신은 러시아어를 잘 모르니 정부 소유 보드카 판매소에 취직을 알선해 달라고 진정했다. 이에 러시아 재무성은 1912년 7월 2일 이위종에게 상트페테르부르크 서북철도역 세관의 임시사무원인 서기 자리를 마련해줬다.

1913년 1월 11일, 이위종은 사조노프 외무상에게 청원서를 보냈다. 자신은 러시아의 국민이자 귀족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므로 국가 부서에서 근무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면서, 외무부내 극동부서에서 근무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또한 자신이 몽골계이기 때문에 일본인과 중국인의 습성을 잘 알고 있어서, 러시아에 상당한 이익을 안겨줄 거라고 덧붙였다. 러시아 외무성은 이에 대해 이위종에게 "이제 방금 러시아 국민으로 편입된 사람에게 외무부 근무를 허락하는 건 적합하지 않다"는 통보를 전달했다. 7월 8일, 이위종은 부친이 자결하기 전 모든 문서를 소각하는 바람에 스타니슬라프 3급 훈장이 불타버리고 말았다며 훈장을 다시 발급해달라고 요구해 승인을 받았다. 8월에 니콜라이 황제에게 청원서를 보내 집이 있는 토지를 임대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14년 10월 철도부 차량운행통제과 고등서기관으로 근무하고 있던 그는 경제적 곤란을 호소하면서 자신을 여객열차 검사관으로 임명해달려고 요청했다. 1915년 3월 러시아 철도청장관은 이위종이 철도부에서 받는 봉급과 러시아 정부의 보조금 덕분으로 재정상태가 갈수록 좋아지고 있다고 외무장관에게 보고했다.

1917년 8월 23일 페트로고프에서 각처 대신회담이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이위종의 넉넉치 않은 살림살이를 지원하기 위해 월 50루블의 보조금을 지급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에 네라토프 외무대신은 1917년 10월 6월 베르나츠키 재무대신에게 서한을 보내 한러우호를 위해 힘쓴 이범진의 공헌과 새로운 조국을 위해 노력한 이위종의 활동을 높이 평가했다. 아울러 그는 이위종에 대한 보조금을 1920년 1월 28일까지 지급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렇듯 러시아 정부로부터 나름대로 지원을 받고 있던 그는 군대에 들어가기로 마음 먹었다. 1915년 12월 중순, 블라지미르 군사학교 교장에게 입학허가 진정서를 보냈다. 그는 1902~1904년 프랑스 셍실 군사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다가 러일전쟁이 발발하여 불가피하게 퇴교하게 되었다며, 입학허가를 청원했다. 12월 24일 내무성 페테르부르크시 총무과 민원실은 블라지미르 군사학교측의 신원조회 요청에 대해 이위종이 페테르부르크에 거주하는 동안 불행한 정치적 사건에 연루된 적이 없다는 증명서를 발급했다. 이에 블라지미르 군사학교는 12월 26일에 12월 20일부 군사학교 관리국의 지시로 이위종의 블라지미르 군사학교 입학을 1916년 1월 14일부로 허가했으며, 월요일이나 목요일에 신체검사를 실시할 것이니 그레베치까야 18번지 군사학교에 오전 9시 출두하라고 하였다.

이위종은 신체검사를 받아 합격하였고, 1916년 1월 14일 블라지미르 군사학교에 입교하여 약 3개월 반동안 장교훈련을 받았다. 그가 러시아군에 입대하기로 마음 먹은 건 일제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12년 여름 전 일본 총리 가쓰라 타로가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일제는 안중근 의거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극동의 재러한인들을 일시 구금하거나 국내로 압송했다. 이때 페테르부르크에서는 시보안과장이 이위종을 조사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일본은 러시아와 연합한 뒤 한일운동자들의 개인적 신상과 약력이 기입된 명부를 작성하여 러시아 정부에 제출하고, 추방을 요구했다. 이때 매번 이위종을 비중 있게 거론하면서, 그를 러시아 영토 밖으로 내보내라고 요구했다. 이위종은 이에 큰 압박을 느끼고 러시아군에 입대하여 러시아인으로 인정받음으로써 추방을 모면하기로 했던 것이다.

다만 가정 불화도 군 입대 결정에 한몫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위종의 부인 엘리자베타는 1915년 12월 8일 러시아 외무장관에게 다음과 같은 청원서를 보냈다.

남편과 별거한 지도 벌써 2년이 지났습니다. 1913년 3월부터 별거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나에게 딸 셋을 남겨두었습니다. 그의 타고난 괴팍한 성격 때문에 아이들을 그에게 양보할 수 없었습니다. 빛을 청산한다는 핑계로 가치나시에 있는 아파트와 심지어는 나의 개인 사물까지 처분해버렸습니다. 그 돈을 어떻게 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자산을 처분하여 마련한 돈으로 그는 나와 아이들을 페테르부르크로 이사시키고 아이들 부양비로 매월 30루블씩 지불할 것을 약속하면서 우리만 남겨두었습니다. 부양비는 1~2개월 걸러서 주기도 하다가 15루블, 17루블씩 주더니 금년 10월부터는 10루블만 주었습니다. 지난 5월에는 아이들을 데려가겠다고 협박하기까지 했습니다. 외무부가 매월 그에게 지원하는 50루블을 아이들의 양육비로 나에게 줄 수는 없는지요. 아니면 최소한 30루블이라도요. 남편이 사관학교에 입교하여 전선으로 나가면 저는 일전 한 푼도 없이 아이들과 남게 됩니다.


그는 매월 85루블을 전 근무지인 페테르부르크 바르샤바 철도역으로부터 받고 있어서 혼자 생활하는데 충분합니다. 큰 딸은 9세이고 둘째딸은 6세이며, 셋째 딸은 4세입니다. 아이들의 교육비가 필요합니다. 그는 아이들의 생계비 지원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렇ㄷ다고 저는 아이들을 경험없고 무책임하고 오만한 성격의 소유자인 그가 양육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습니다. 놀켄 부인 올림.

1916년 3월 1일, 이위종은 사조노프 외무장관에게 5월 1일자로 군사학교를 졸업할 에정이니 자신을 제1황실 근위대에 임명해주고, 동시에 최고 군사령부의 전령장교로 파견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자원하여 러시아군에 들어가 장교로 복무했던 것으로 보인다. 1917년 10월 6일 러시아 외무대신은 이에 대해 "이위종이 자원하여 2년간 러시아군에 복무하였으므로 이전 수준의 보조금을 계속 지급해야 한다"고 하였다. 러시아 혁명이 발발한 1917년 10월부터 1919년 8월까지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지만, 붉은 군대의 장교로 계속 근무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19년 8월 12일 모스크바 동방연맹 건물에서 3.1 운동을 기념한 한인 집회가 열렸다. 이때 이위종이 참석하여 연설하였다. 이즈베스치야 신문은 1919년 8월 15일자 기사에서 이위종의 연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군중이 모인 가운데 보병대 기관총 부대장으로서 우파지역 탈환 때 큰 공로를 세웠고, 러시아로 이민오기 전까지는 1908년부터 빨치산 우두머리였던 이위종은 소비에트 정부에게 러시아와 시베리아에 있는 모든 한국인들을 (공식집계상 2만여명) 동원하여 한국특사대를 조직하여 시베리아와 한국에서 일본인들을 몰아내자는 제안을 하였다. 이위종은 연설을 마치면서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동지들과 힘을 합쳐야 함을 호소했다. 왜냐하면 러시아 국민들만이 미국인들처럼 사리사욕을 쫓지 않고 박해받는 자들의 자유를 위해 진정으로 투쟁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소비에트 지역에 한국의 붉은 군대를 조직할 중앙집행기구를 신속하게 설립해야 함을 제안하였다. 열렬한 박수갈채와 독립운동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이위종의 제안은 만장일치로 받아들여졌다.

1920년 5월경에 작성된 일제측 첩보기록에 따르면, 이위종은 한인 적군부대 사령관으로서 휘하에 약 4천명의 한인 병사들을 이끌고 이르쿠츠크 서쪽 지역에서 활동했다고 한다. 또한 일제 첩자들은 본국에 <조선과 과격파의 관계의 건>(1920.5.20)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모스크바 소재 노동정부 외무부에는 극동국이라는 것이 있으며, 이 국에서는 중국인 및 조선인의 유력자를 두어 극동에 관한 과격사상 선전 기타에 관한 사무를 담임하고 있고, 조선인측에서는 전 주러한국공사 이범진의 아들 이위종이 있어 조선인으로 하여금 군정부라는 것을 조직하고 스스로 그 수령이 되어 선인에 대하여 징병제도 같은 반강제적 병역징집법을 실시하여 모스크바로부터 이르쿠츠크까지 사이에 40세 이하의 조선인 장정 약 7천 800명을 이미 징집하고 있다.

이위종의 이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1920년 8월 일본군이 시베리아 출병을 단행한 뒤 러시아 적군과 맞붙었을 때 전사했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나, 이것이 사실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이위종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 오영섭, <이위종의 생애와 독립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007.[2]
  • 국가보훈처, 2007년 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각주

  1. 사실 스테드는 헤이그 특사보다 먼저 유럽으로 간 호머 헐버트와 베를린에서 만났다. 헐버트는 한국의 처지를 호소하고 협력해달라고 부탁했고, 스테드는 이를 받아들였다.
  2. 1905년 11월 초 니콜라이 2세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기 위해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당도한 외교특사 현상건이 고종의 친필로 서명한 지급보증서를 갖고 상하이주재 운청은행으로부터 1만 루블을 연리 7%로 빌린 사실이 있다.
  3. 이상설, 김현토, 유인석, 이범윤, 안중근 유족, 이준 유족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