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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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대한민국의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

李承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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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전주 이씨이다.

생애

대한제국 시절 협성회 회보와 독립신문 주필, 교육계몽운동 등으로는 독립협회 활동 등을 하였다. 대한제국 말기 밀사로 도미하였다가 실패했다고 알려져 왔으나, 최근 당시 이승만은 대한제국 정부나 황제의 대리인이 아니라 일진회의 대리인이라고 자칭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이후 하와이에서 한인학원과 한인학교 등을 운영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 방법을 놓고 의견이 갈라섰을 때 그는 국내의 사정을 외국에 알리고 양해를 구하는 외교독립론을 주장하였는데, 대한민국이 일본에게서 독립한다면 미국에게 넘겨주겠다고 한 의혹이 있다. 당연히 임시정부 임원들에게 대차게 까였다.[1] 특히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으나 국제 연맹에 위임통치를 건의 한 것을 계기로, 임시의정원에 의해 탄핵·파면되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한성 임시정부와 각지에서 수립된 임시정부의 수반을 거쳐 1919년 9월부터 1925년 3월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역임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국무위원회 외교위원 등을 역임했다. 주로 미국에서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벌였다. 틀:날짜/출력의 제25회 임시 의정원 회의에서 무임소 국무위원에 보궐 당선되었다. 이후 1933년 11월에 다시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임되고 틀:날짜/출력에는 임정 외교위원에 선임되었다. 일제 강점기 중반에는 스위스 등을 상대로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한편 일본의 미국 침략을 경고하였으며 태평양 전쟁 이후 미군 OSS와 임시정부 간의 연결을 주선하였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미국 체신청에서 발행한 태극기 모양 우표 발행에 크게 기여했으며, 항일 단파 라디오 방송 연설 등에도 참여하였다. 1945년 해방 후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에 추대되었으나, 귀국 후 거절하였다.

1945년 12월부터 김구·조소앙·김성수 등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관하였으며 정부수립 방법으로는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지지, 추진하였다. 대한민국 초대 국회의장을 역임하였다.

6.25전쟁때는 북한군이 이미 서울 코앞까지 와 있는 상황에서 북한군을 무사 격퇴하고 있다며서울시민들에게 생업에 종사하라는 말을 하고서 한강 대교를 폭파하고 서울을 빠져나가 튀었다. 북한군이 쉽게 진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했다고는 하지만 시민들이 고스란히 서울에 남아 있는 상태에서 폭파해 시민들도 피난가기 어렵게 만들었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에 따른 발췌개헌과 1954년의 사사오입 개헌으로 민주적 절차를 무시한 채 헌법을 두 차례 개정하여 대통령을 3회 역임하였다. 1958년 경향신문 폐간 사건으로 대표되는 언론탄압을 자행하였고, 진보당 사건을 통해 정적 조봉암을 제거하였다. 1960년 3.15 부정선거를 통해 4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훗날 영구집권을 꿈꾸려다가 4.19혁명으로 물러나게 된다. 에 의해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났고, 미국 하와이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장례는 대한민국에서 가족장으로 집행되었으며,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같이 보기


각주

  1. 이때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도 팔아먹는다고 이완용보다 더 한 매국노라는 소리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