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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원행섭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원행섭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 외부 링크 ==
== 외부 링크 ==
* 국가기록원 -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2 독립유공자 공훈록]
*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2 독립유공자 공훈록]



2021년 11월 19일 (금) 16:35 판

元行燮.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1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생애

1880년생이며 황해도 안악군 안악읍 상장리 출신이다. 그는 1910년 12월 19일 황해도 안악읍에서 안명근한순직 등과 함께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기로 결의하였다. 같은 날 밤 안명근ㆍ양성진ㆍ박형병(朴亨秉)ㆍ고봉수(高奉守)ㆍ한정교(韓楨敎) 등과 함께 읍내 재산가의 성명과 자산의 규모, 헌병분견소의 위치, 거주 일본인의 인원 수 등을 조사하였다.

1910년 12월 20일 한순직ㆍ박형병 등과 함께 읍내 헌병분견소와 그 부근의 일본인 가옥의 상황을 정찰하였다. 같은 날 밤 11시경 안명근 등과 권총을 휴대하고 습락현으로 가서 김구김홍량 등과 합류한 뒤 읍내로 들어갔다. 1911년 1월 중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기로 결정하고 해산하였다. 그러나 안명근이 1911년 1월 10일경 체포되어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

원행섭은 1911년 2월 체포되어 안악헌병소에서 구금 취조를 받던 중 탈옥하였다. 같은 해 7월 22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궐석재판으로 징역 15년을 받았다.[1] 1916년경 체포되어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19년 3.1 운동 당시 감옥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여 고초를 당했다. 1926년 10월경까지 만 11년의 옥고를 치렀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원행섭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외부 링크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