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진

楊星鎭(또는 楊成鎭).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1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76년 5월 28일 평안남도 평양부 외성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6년 안악군 일대에서 최광옥ㆍ김용제(金庸濟) 등 지역 유지들과 함께 민지계발(民知啓發), 산업증진(産業增進), 교육장려(敎育?勵)를 목적으로 면학회(勉學會)를 조직하고 서기를 맡아 활동하였다. 면학회에서는 1907년 면학서포(勉學書鋪)를 설립하여 출판 및 서점 사업에 착수하는 한편, 김구이광수를 초빙하여 양산소학교(楊山小學校)에서 사범강습회(師範講習會)를 개최하는 등의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12월 중순 안명근이 서간도에서 무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안악읍내로 들어와 원행섭의 집으로 가서 그에게 자신의 계획을 말하였다. 이에 적극적으로 찬성한 원행섭은 그날 밤 양성진을 비롯해 박형병(朴亨秉)ㆍ고봉수(高奉守)ㆍ한정교(韓楨敎) 등을 불러 모았다. 이때 양성진도 안명근의 무관학교 설립 자금 모집 계획에 적극 찬동하여, 고봉수 등과 함께 안악읍내 자산가 현황과 헌병분견소(憲兵分遣所) 위치 등 지역 정보를 조사하여 안명근에게 전달하였다. 한편 이들은 김구, 김홍량 등 안악 지역 애국계몽운동가들을 규합하여, 1910년 12월 20일 오후 11시 안악 교외의 남산 습락현에 모여 거사를 일으키고자 계획하였다.

12월 20일 밤 11시경, 양성진은 안명근, 원행섭, 박형병, 고봉수, 한정교, 한순직 등과 함께 권총 등을 휴대하고 습락현으로 갔다. 하지만 현장에 모인 인원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또 안악읍내의 자산가는 음력 12월이 지나야 거액의 현금을 소지할 것이라는 의견이 있어서, 이들은 거사의 실행을 음력 12월 15일(양력 1911년 1월 중순)으로 연기했다. 그러나 이들로부터 자금 기부를 요구받은 민병찬(閔秉瓚)과 민영설(閔泳卨)의 밀고로 인해 1911년 1월 10일 안명근은 평양역에서 경찰에 체포되었다. 일제 당국은 이들의 무관학교 설립 자금을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 암살을 위한 군자금이라고 날조해 105인 사건을 단행했고, 이때 양성진도 동지들과 함께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1년 7월 22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강도 및 강도미수 혐의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1] 공소했지만, 그해 9월 4일 경성공소원에서 기각되었다.[2] 다시 고등법원에 상고했지만, 같은 해 10월 20일 기각되었다.[3] 1912년 9월 13일 특전(特典)으로 징역 6년, 1914년 5월 24일 칙령 제104호에 의해 징역 4년 6월로 두 차례 감형되어 옥고를 치르고, 1915년 7월 18일 가출옥하였다. 이후의 행적 및 사망년도, 사망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6년 양성진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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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