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순직

韓淳稷.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17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1 생애[편집]

1884년 11월 6일 황해도 신천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0년 박형병(朴亨秉)·원행섭·양성진·고봉수(高奉守)·한정교(韓禎敎) 등과 함께 안명근의 무관학교 설립 계획에 가담했다. 안명근은 1910년 12월 19일 안악읍에 있는 원행섭의 집에 모여 거사를 준비했다. 이때 한순직은 그날 밤 안명근, 고봉수(高奉守)와 함께 읍내 자산가의 저택을 미리 정찰하여 자산가의 성명, 자산의 규모, 헌병분견소의 위치, 거주하는 일본인의 수 등을 조사하여 기록해 뒀으며, 12월 20일 밤 11시경 교외의 남산 습락현에서 모이기로 했다.

한순직은 12월 20일 밤 남산에서 집합하기에 앞서 원행섭·박형병과 함께 헌병분견소와 그 부근 일본인 가옥의 상황을 정찰하였다. 그리고 안명근 등과 함께 권총을 휴대하고 습락현으로 가서 [김구]] 등과 합세하여 읍내로 들어가고자 했다. 하지만 거사 당일에 모인 인원이 예상보다 적었고 또 안악읍 내의 자산가는 음력 12월 이전에는 거액의 현금을 소지하고 있지 않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당일의 거사는 연기하고 다시 같은 해 음력 12월 15일 밤에 모이기로 결정하였다. 그 후 그는 안명근과 함께 신천군 읍내 삼리(三里)의 이원식(李源植)으로부터 독립운동자금으로 현금 6,400원과 현금 4,000원의 출금표를 모집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1911년 1월 10일 안명근이 일제 경찰에게 체포된 뒤, 일제는 안명근 등의 활동을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 암살을 위한 모금 활동으로 날조하고 105인 사건으로 확대시켰다. 이로 인해 체포된 그는 1911년 7월 22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강도 및 강도미수 혐의로 징역 15년을 언도받고[1] 공소했지만 9월 4일 경성공소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2] 이후 1914년 5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칙령 제104호에 의거하여 징역 6년으로 감형되었고, 1915년 10월 23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가출옥으로 석방되었다. 이후의 행적 및 사망년도, 사망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7년 한순직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2 외부 링크[편집]

3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