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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황제(黃帝)로부터 태초(太初)[1]에 이르기까지의 사실(史實)을 역술(述歷)하였으니, 이는 모두 130편이다."
— -《태사공자서》

사기(史記)란 사마천이 작성한 역사서로 진정한 고자되기의 산물이자 중국 최고의 역사서 중 하나로 손꼽힌다.

성립 과정

편찬시기는 BC 109~91년 사이로 추측되는 문서로 사마천이 아버지의 유언을 이어서 계속 만든 것으로 추측된다. 사마천은 아버지의 그러한 유언을 받들어 역사서를 쓰던 중 흉노에게 투항한 이릉을 변호하다가 한무제의 노여움을 사서 사형을 받을 뻔 보나 역사서를 완성하기 위해 궁형을 받고 결국 생존하게된다.[1]그 뒤 사마천을 고자로 만든 것을 후회하게 된 한무제가 고자로 만들고자 한 신하들을 다 죽였다고(...). 어찌됬건 이러한 고난과 역경을 뚫고 나온 책이 사기가 되시겠다. 그 뒤 한 선제 시기에 이르러서 사마천의 손자인 양운에 의해 널리 알려지게 된다.

특징

최초의 기전체식 사서

기전체식 사서란 인물을 중심으로 다루는 역사서를 의미하고, 이에 대비되는 개념은 편년체식 사서로 조선왕조실록을(세종실록은 예외), 기전체식 사서로는 정사 삼국지를 예로들 수 있다.

명분에 엮매이지 않음

사기의 특징 중 하나는, 바로 명분에 엮매이지 않고 실리를 중시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한 혜제때에는 실권을 여후가 잡고 있었기에 한 혜제 본기가 아닌 여후 본기가 있으며, 항우를 한 때나마 천하를 재패했다는 이유로 왕을 다루는 세가가 아닌 황제를 다루는 본기에 넣고 있다. 또한 공자 역시 제후가 아니였음에도 불구하고 세가에 넣어져 있다.[2]

역사석 가치 및 신뢰성

정사로서 기술된 당대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본 정보는 섬세한 기술로 당시의 생활이나 습관을 알 수 있는 부분이 많다. 특히 「서(書)」의 내용은 전한 시대의 세계관이나 정치, 경제, 사회 제도 등에 대한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또한 흉노를 비롯한 주변 이민족이나 서역에 대한 기술도 현재 알려져 있는 지리와 유적 발굴 등에서 판명된 당시 상황과의 정합성이 높고, 이러한 지방의 당시를 알기 위한 귀중한 단서가 되어 있으며, 진시황 본기의 "진시황이 자신의 무덤에 근위병 3천 인의 인형을 묻었다"는 기술역시 병마용의 발견으로 진실이 되는 등 당시 역사적 사건을 드러내는 하나의 큰 자료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일부 내용에서는 연대 비교시에 모순점이 발견되기도 한다.

그 외에도 나라와 관련된 기술이 있다.

사상적 배경

『사기』의 내용 전반을 관통하고 있는 사상은 바로 「하늘의 도라는 것은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天道是非)」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하늘의 도리, 즉 인간의 세상에서 이루어져야만 하는 올바른 길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지에 대한 물음이다. 《사기》 열전에서 가장 먼저 다루고 있는 「백이열전」(伯夷列傳)에서 사마천은 의인(義人)임에 틀림없는 백이와 숙제가 아사(餓死)라는 초라한 죽음을 맞은 것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에 대해서는 사마천 자신이 과거 친구이자 이릉의 불가피한 항복을 변호했던 올바른 행동을 하고도 궁형이라는 치욕스러운 형벌을 받은 것에 대한 비통함이 깔려 있다는 분석이 있다.

그가 《사기》를 집필하던 시대 한 왕조는 무제에 의한 유교의 국교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공자에 대해서도 제후(諸侯)가 아닌 그를 굳이 세가(世家)의 반열에 넣은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사기》의 기술은 유교 사상이 주가 되는 와중에 다른 사상도 가미되어 있는데(사마천 자신이 도가에 특히 호의적이었기 때문이었다고도 한다) 이것은 「사실」을 추구한다는 역사서 편찬 목적에서 비롯되었다. 반진(反秦) 세력의 명목상의 영수(領袖)였던 의제의 본기를 짓지 않고 실질적인 지배자인 항우의 본기를 지은 것도, 여후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던 혜제를 본기에서 제외하고 마찬가지로 「여후본기(呂后本紀)」라는, 여후의 본기를 지은 것도, 그러한 자세의 발로였던 것으로 보인다.

왕후(王侯)를 중심 대상으로서 서술하면서도 민간의 인물을 다룬 「유협열전」(遊侠列傳), 「화식열전」(貨殖列傳), 암살자의 전기를 다룬 「자객열전」(刺客列伝) 등 권력과는 거리가 멀었던 인물에 대한 기술도 많다.

또한 당시 무제와 외척간의 추악한 권력다툼을 묘사한 「위기무안후열전」(魏其武安侯列傳)이나, 남색(男色)이나 아첨으로 부귀를 얻은 자들을 다룬 「영행열전」(佞幸列傳), 법률을 등에 업고 위세를 부리며 사람들을 괴롭혔던 관리들의 이야기를 모은 「혹리열전」(酷吏列傳)과 더불어 법률을 가지고 사람들을 올바르게 이끌었던 관리들에 대해서도 「순리열전」(循吏列傳)으로 정리하는 등, 안이한 영웅 중심의 역사관에 치우치지 않는 유연하고 다양한 시점유지도 눈여겨볼 점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한의 숙적이었던 흉노를 비롯한 주변 기마민족이나 이민족에 대해서도 한의 가치관을 기준으로 논평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사실만을 담담하게 쓴다는 태도로 임하고 있다.

이러한 사마천의 태도는 유교가 중국 사회의 주도권을 잡게 되면서 종종 비판 대상이 되었다. 《한서》를 지은 반표의 경우 사마천이 건달이나 졸부 같은 인물을 사서에서 다루고 유교를 경시하며 도교에 가까운 입장을 취했다며 비판했고, 《문심조룡》(文心雕龍)에서는 여자인 여후를 본기로서 서술했다며 비난하였다. 《사기》를 일종의 악서(惡書)로 보는 시점은 몹시 일찍부터 존재했는데, 성제 때에 제후인 동평사왕(東平思王) 유우(劉宇)가 한 조정에 《태사공서》를 요구했는데, "옛날의 합종연횡(合從連衡)이며 권모술수가 자세히 담겨 있는 책이라 제후들에게 읽게 할 책이 아니다"라는 의견이 나와 결국 허락되지 못했다는 것이다.[3] 또한 촉한의 초주(譙周)는 사서의 편찬은 경서(經書) 즉 유교 서적에만 의거해야 하는데 《사기》는 그러지 않고 제자백가의 설까지 인용했다며 비난하고, 《고사고》(古史考) 25편을 지어 유교 경전에 비추어 《사기》의 오류를 교정하기도 했는데, 《고사고》는 훗날 당대에도 《사기》를 읽을 때면 함께 읽히곤 했음을 당대 유지기(劉知畿)가 편찬한 《사통(史通)》 고금정사편(古今正史篇)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후대에는 《사기》와 《한서》의 비교 분석이 많은 지식인에 의해 이루어졌다.

문학적 가치

역사 서술을 위한 간결하면서도 힘찬 문장은 「문성(文聖)」 또는 「백전노장의 군대 운용」과 같은 것으로 격찬받았다. 특히 「항우본기」는 명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역사적 가치

구성

사기는 다음과 같은 구성을 갖추고 있다.

  • 본기
  • 세가
  • 열전

본기

총 12편. 왕(王)들의 연대기를 다룬다. 중국 역사 초의 5제(五帝)에서 한(漢) 무제(武帝)까지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4]

  • 오제본기(五帝本紀)
  • 하본기(夏本紀)
  • 은본기(殷本紀)
  • 주본기(周本紀)
  • 진본기(秦本紀)
  •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 항우본기(項羽本紀)
  • 고조본기(高祖本紀)
  • 여태후본기(呂太后本紀)
  • 효문본기(孝文本紀)
  • 효경본기(孝景本紀)
  • 효무본기(孝武本紀)

총 10편. 본기에 나오는 제왕 및 제후들의 흥망을 정리하여 보여주는[4] 연표이다.

  1. 삼대 세표 (三代世表)
  2. 십이제후 연표 (十二諸侯年表)
  3. 육국 연표 (六國年表)
  4. 진초지제 월표 (秦楚之際月表)
  5. 한흥이래제후 연표 (漢興以來諸侯年表)
  6. 고조공신후자 연표 (高祖功臣侯者年表)
  7. 혜경간후자 연표 (惠景間侯者年表)
  8. 건원이래후자 연표 (建元以來侯者年表)
  9. 건원이래왕자 연표 (建元已來王子年表)
  10. 한흥이래장상명신 연표 (漢興以來將相名臣年表)

총 8편. 역대의 정책과 제도, 문물의 발달사 및 전망을 다룬다.[4]

세가

총 30편. 역사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진 제후(諸侯)들에 대해 다룬다.

열전

총 70편. 왕과 제후 외에 역사적으로 중요한 개인들을 다룬다. 대상은 영웅, 정치가, 학자, 군인, 일반 서민까지 다양하다.[4]

보사기

당나라 시대에 사마정이 사기의 내용을 보충한 것이다.

  • 삼황본기

바깥 고리

주석

  1. 다른 방법으로는 돈을 내서 풀어나는 방법이 있지만 사마천으로 써는 무리였다.
  2. 단 이는 공자가 중국 및 동아시아 전반에 미친 사상, 역사적인 영향을 고려했을 때에는 들어가도 큰 이상한 적은 없다.
  3. 반고: 《한서》 권80 「선원육왕전(宣元六王傳)」, 後年來朝,上疏求諸子及太史公書,上以問大將軍王鳳,對曰:「臣聞諸侯朝聘,考文章,正法度,非禮不言。今東平王幸得來朝,不思制節謹度,以防危失,而求諸書,非朝聘之義也。諸子書或反經術,非聖人,或明鬼神,信物怪;太史公書有戰國從橫權譎之謀,漢興之初謀臣竒策,天官災異,地形阸塞:皆不宜在諸侯王。不可予。不許之辭宜曰:『五經聖人所制,萬事靡不畢載。王審樂道,傅相皆儒者,旦夕講誦,足以正身虞意。夫小辯破義,小道不通,致遠恐泥,皆不足以留意。諸益於經術者,不愛於王。』」對奏,天子如鳳言,遂不與。
  4. 4.0 4.1 4.2 4.3 사기(史記(本記, 世家)), 최대림, 홍신문화사, 1993년 6월 30일, 3~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