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습니다. 이는 죽음을 사용하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1]
— 친구 임완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마천

사마천(司馬遷, 기원전 145년~기원전 86년)은 동양 역사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중국 최초의 정사, 《사기》(史記)를 집필한 인물이다. 궁형을 당하는 치욕을 무릎쓰고 사기를 완성하려는 집념으로 유명하다. 현실은 고자의 대명사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젊은 시절[편집 | 원본 편집]

사마천의 아버지는 사마담(司馬談)으로, 태사령으로 재임하며 역법과 황실의 전적을 관리했다. 그는 봉선 의식에 참여하지 못하여 분을 참지 못하고 죽었다고 한다. 사마담은 죽으면서 아들에게 자신이 편찬하고 있던 사서(史書)를 완성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고 한다.

봉선은 황제가 직접 하늘에 지내던 제사 중 하나인데, 자신이 하늘과 직접 대화할 수 있을만큼 훌륭한 군주라는 자신감의 표명이었다. 진시황이 최초로 거행한 이래 봉선은 한 무제, 광무제 등의 명군 혹은 태평성대를 맞은 황제가 아니면 거행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심지어 이세민마저도 봉선을 거행하지 못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런 의식인 봉선에 참여한다는 것은 이런 명군의 두터운 신임을 받는 신하라는 의미로, 당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명예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명예를 놓쳤으니, 홧병으로 죽을 만 하다.뭐?

사마천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태사령 직에 제수되었다. 그는 태사령 직책을 수행하면서도 틈틈이 아버지가 남긴 미완성의 사서를 계속 집필해가고 있었다.

이릉을 변호하다[편집 | 원본 편집]

이런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을 사건이 일어난다. 바로 이릉의 항복이다.

흉노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 이릉은 흉노 본대에 맞서 싸워 선우가 친히 이끄는 군대를 상대로 신적인 전과를 올리다가 지구전 끝에 투항하였다. 이릉은 당시 5천명의 보병만 가지고 8만에 가까운 흉노를 여러 차례 격파하다가 지구전 끝에 항복했다. 생각해보면 정말 무시무시한 전과를 올린 것이다. 그러나 한 무제는 이릉이 얼마나 불리한 조건에서 싸웠는지는 고려하지 않고 그저 이릉이 졌고, 항복했다는 사실만으로 분기탱천해 있었다. 황제의 분노는 매서웠고, 아무도 감히 이릉을 변호하지 못했다. 차라리 죽었어야 한다, 항복을 했으니 역적이 분명하다, 이런 이야기들만 쏟아지고 있었다.

이 때 이릉을 변호하고 나선 한 사람의 인물이 바로 사마천이었다. 사마천은 이릉이 이처럼 말도 안 되는 싸움에서 죽을 힘을 다하여 싸웠으니 오히려 그 용기를 칭찬해야 하며, 흉노에게 항복한 것은 아마도 다시 공을 세워 한으로 돌아오기 위해서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일로 사마천은 역린을 건드린 셈이 되었다. 한 무제의 매서운 분노는 곧 그에게 쏟아졌다. 무제는 그를 태사령 벼슬에서 파직하고 하옥한다. 그리고 사마천에게 역적을 변호한 죄로 사형이 선고된다.

사실 이는 무제의 노골적인 "이광리 밀어주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이광리는 무제의 애첩의 오빠(...). 그는 무능한 군인은 아니었던 듯 하나, 당시는 이릉과 함께 출전했다 대패한 상태. 이 상태에서 이릉을 옹호하고, 그의 군공을 칭찬한 사마천의 행위는 이광리를 깎아내리는 것처럼 비춰졌던 것이다. 한편, 이릉의 패배의 직접적 원인이었던 지원군 철군은 한 무제 본인의 결정이었다. 즉 이릉의 패배가 어쩔 수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황제에게 "너님이 잘못해서 멀쩡한 장수가 적한테 항복했음"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는 뜻.

사기 집필 vs 고자되기[편집 | 원본 편집]

어쩄거나 사형을 선고받은 그 앞에는 세 가지 길만이 남아 있었다. 이대로 사형을 당하든가, 50만전의 벌금을 내고 용서를 받든가, 궁형을 받아 고자가 되거나. 당시 50만전은 5천의 병사를 1년 동안 유지할 수 있는 비용이었다고 한다. 사마천의 집안 형편으로는 이 벌금을 낼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사형을 당한 사람은 그것으로 죗값을 치른 것으로 인정받아 장례를 정상적으로 치러준 반면, 궁형을 택한 사람은 사회적으로 매장당했다. 사형을 선고받을 정도로 천자의 신경을 거슬렀음에도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여 더러운 형벌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궁형은 평생 동안 죄 지어서 고자된 놈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살아야 하는, 가장 치욕스러운 형벌이었다. 당시 기술로는 궁형 집행 이후 살아남을 것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은 덤. 그러나 사마천에게는 완성해야 할 사서와 거금을 낼 엄두조차 나지 않는 가정 형편이 있었다. 그는 고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사기를 완성하다[편집 | 원본 편집]

이렇게 굳은 각오로 궁형을 받은 사마천이었지만, 궁형 집행 이후 그는 엄청난 고통에 시달렸다. 궁형을 받은 직후, 그는 이렇게 울부짖었다고 한다.

이것이 내 죄란 말이냐! 이것이 내 죄란 말이냐! 몸은 궁형을 당해 쓸모없이 되었구나!

[2]

궁형 이후 그의 처지를 설명해주는 글귀가 있다. 친구 임안에게 보낸 편지인 보임안서에서, 그는

그리고 지금 이지러진 몸으로 뒤치다꺼리나 하는 천한 노예가 되어 비천함 속에 빠져 있는 주제에 새삼 머리를 치켜들고 눈썹을 펴서 시비를 논하려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조정을 업신여기고 같은 시대의 선비를 욕되게 하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아! 아아! 저 같은 인간이 새삼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새삼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3]

라고 말한다. 심리적으로만 힘든 것이 아니었다. 궁형은 그의 몸에도 씻을 수 없는 후유증을 남겼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견뎌내며 그는 사기 집필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삶에 애착을 가지고 죽기 싫어하며, 부모를 생각하고 처자를 돌보려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의리에 자극을 받으면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 부득이합니다. 저는 불행히도 일찍 부모님을 여의었고 가까운 형제도 없이 홀로 외로이 살아왔습니다. 소경께서는 제가 처자식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셨습니까? 진정한 용사라 하여 명분뿐인 절개 때문에 꼭 죽는 것은 아니며, 비겁한 사람이라 하여도 의리를 위하여 목숨을 가볍게 버리는 경우가 왜 없겠습니까? 제가 비록 비겁하고 나약하여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하였지만 거취에 대한 분별력은 있습니다. 어떻게 몸이 속박되는 치욕 속에 스스로를 밀어 넣겠습니까?

천한 노복이나 하비도 얼마든지 자결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저 같은 사람이 왜 자결하지 못하겠습니까? 고통을 견디고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한 채 더러운 치욕을 마다하지 않은 까닭은 제 마음속에 다 드러내지 못한 그 무엇이 남아 있는데도 하잘것없이 세상에서 사라져 후세에 제 문장이 드러나지 못하면 어쩌나 한이 되었기 때문입니다.[4]

죽음보다 더한 치욕. 그것을 견뎌내면서도 그는 사기를 완성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게 완성된 사기는 중국 역사 서술의 모범이자 최고봉으로 꼽힌다.

궁형 집행 3년 후, 무제는 연호를 바꾸며 대사면령을 내렸다. 사마천은 이 때 옥에서 풀려났다. 이후 그는 무제의 신임을 되찾아 환관이 오를 수 있는 최고 관직인 중서령에 봉해졌다. 환관의 신분으로 그는 사기를 완성한다.

말년[편집 | 원본 편집]

아이러니하게도, 사기를 완성한 이후 그의 삶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어떻게 죽었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그의 후손들 사이에는 그가 임안에게 보낸 편지인 보임안서의 특정 글귀가 무제의 성질을 건드려 처형당했다고(...) 전한다. 실제로 그의 후손들은 사마(司馬)씨를 사용하지 않고 司자와 馬자를 변형하여 동(同)씨와 풍(馮)씨를 사용하며 살고 있다.[5]

평가[편집 | 원본 편집]

궁형은 사대부에게는 죽음보다도 더한 치욕이었다. 궁형을 당한 이후 그는 가는 곳마다 비웃음을 면하지 못하였고, 음경이 절단된 부위에서 나는 냄새 때문에 가족들마저도 그를 멀리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에 굴하지 않고, 평생을 다해 사기를 완성했다.

이미 언급했듯, 사마천의 사기는 중국, 나아가 동아시아 사학의 시발점으로 꼽힌다. 기존의 역사 서술은 편년체, 즉 연대에 따라 역사를 서술하는 방식이었다. 사마천은 여기에서 벗어나 본기, 열전, 표, 지로 사기를 구성했다. 이를 기전체라고 부른다. 본기는 역대 제왕의 치세를 연대에 따라 기록하는 것이며, 열전은 제왕은 아니었으나 역사에 중요한 족적을 남긴 인물들의 삶을 기록한 것이다. 표는 연표로, 사기에서는 주제별 연표를 만들어 각 사건에 대하여 간략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지는 문화, 경제, 지리, 사상 등의 여러 주제들에 대하여 서술하는 부분이다. 특히 본기와 열전이 사기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사마천의 인물 중심의 역사관을 보여준다. 그는 역사는 후대에 교훈을 남기는 것이 그 목적이라고 생각하였으며, 그에 따라 인물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고, 그들에 대한 도덕적 평가를 내리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는 모든 중국 정사의 모범이 된다.

한편 사기는 국가 주도가 아닌, 개인이 편찬한 책(私撰書)이다. 중국 정사 24사 가운데 개인이 편찬한 사기와 한서, 후한서, 삼국지를 통틀어 전사서(前四書)라고 부른다. 그만큼 사기는 이후의 어느 정사도 지니지 못한 자유분방함을 지니고 있다. 한 고조 유방과 맞선 항우나 한 고조 사후 독단적으로 권력을 휘두른 여태후 등을 본기에 포함시켜 제왕과 동급으로 서술하고 있는가 하면, 한 무제에 대한 비판을 거침없이 서술하고 있기도 하다. 심지어 사료의 신빙성을 판단하며 공자의 기록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이 자유분방함은 이후 어느 중국 사서도 따라하지 못한 특징이다. 원래 사마천은 국가를 찬양하는 역사서를 서술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가 궁형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자유로운 비판 정신을 가지고 사기를 저술하지 못하였을지도 모른다. 고자가 되었기 때문에 좋은 책을 써낼 수 있었다. 결국 고자라서 유명해졌다는 건가? 레알 사기 집필 vs 고자되기

후대의 환관들은 그를 환관의 상징적 시조로 여겼으며, 강철장군(...)이라고 부르며 추앙했다고 한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