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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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의 세력 판도.

흉노(중국어: 匈奴)는 몽골 초원에서 탄생한 최초의 유목 제국이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각 제후국들과 의 기록을 통해 그들의 행적을 알 수 있다. 언제부터 흉노라는 집단 명칭이 사용되었는지, 그들이 어떤 집단이었는지는 아직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훈족과 동족이라는 설도 있으나, 이 역시 아직은 설에 불과할 뿐, 증명된 바는 없다.

1 역사[편집]

1.1 첫 등장[편집]

흉노가 어떻게 나타난 집단인지, 언제 나타난 집단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은주시대에도 "혼유(渾庾)", "훈죽(獯粥)", "험윤(獫狁)"이라는 명칭이 문헌상에 등장하는데, 이들의 흉노의 조상이라는 주장도 있다.[1] 유목 집단이 확실하게 중국 북방에 등장하는 것은 기원전 4세기 말에서 기원전 초 사이로 보인다. 바로 "호(胡)"의 등장이다.

당시 각 제후국들은 호를 막기 위해 장성을 쌓고, 스스로 기병을 키우는 등의 노력을 기울인다. 한편 흉노가 처음으로 문헌에 등장하는 것은 기원전 318년이다. 당시 흉노는 한, 조, 위, 연, 제 다섯 제후국과 연합하여 진(秦)을 공격했으나 대패했다.

진 통일기 무렵, 흉노는 오르도스 지방에서 유목 생활을 영위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215년 진시황몽염에게 10만명, 혹은 30만명의 군사를 주어 흉노를 하남, 즉 황하 이남의 오르도스 지방에서 몰아냈다는 기록이 나오기 때문이다.[2] 이후 진은 만리장성을 완성하여 이들의 남하를 막고자 하였다.

이로 인해 흉노는 북방으로 밀려나며 큰 위기를 맞는다. 그러나 이 위기는 역설적이게도 군사적 영웅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었다.

1.2 묵특(묵돌)의 등장[편집]

묵특의 등장이 바로 그것이었다. 묵특두만(頭曼) 선우의 아들이었다고 전해진다. 두만은 묵특보다 그의 애첩의 소생, 그러니까 묵특의 이복동생을 후계자로 세우고 싶어했다. 한편으로는 월지가 힘 좀 세다고 짜증나게 구는 걸 좀 정리하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월지가 인질을 요구하자 그는 아들 묵특월지에 볼모로 보낸다. 월지는 볼모를 죽이려고 할 것이니, 보기 싫은 큰아들도 죽이고, 월지를 손봐줄 명분도 만들어진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두만의 예상대로 월지묵특이 도착하자마자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묵특은 천리마를 훔쳐타고 흉노로 돌아오는 데에 성공한다. 이 일로 묵특은 아버지의 신뢰를 얻어 만여 명의 병력을 지휘하게 된다. 그러나 묵특은 아버지가 살아 있는 한 안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아버지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그는 심복들을 뽑아 기마궁술을 연마케 하는 한편, 자신이 명적, 즉 소리나는 화살으로 무엇인가를 쏘면, 일제히 그 목표물을 향해 활을 쏘도록 훈련시켰다. 처음에는 짐승을 쏘면서 연습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묵특이 부하들 앞에서 자신의 애마를 향해 명적을 쏘았다. 부하들은 머뭇거렸고, 묵특은 자신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며 머뭇거린 부하들을 죄다 참수해버린다. 그 다음에는 자신의 연지, 즉 부인을 향해 명적을 날린다. 그의 아내는 곧 고슴도치가 되었지만, 아직도 머뭇거리는 부하들이 있었다. 묵특은 망설인 자들을 참수한다.

그리고 기원전 209년, 묵특은 마침내 사냥터에서 아버지를 향해 명적을 쏜다. 그의 부하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선우를 향해 활을 쏘았다. 두만은 벌집이 되어 사망하였다. 그는 계모와 이복동생을 차례로 죽이고 스스로 선우의 자리에 오른다.

그리고 묵특은 오르도스 상실 이후 위축되었던 흉노의 세를 무서운 속도로 불려나가기 시작한다.

1.3 초원을 제패하다[편집]

장성 이남은 진나라가 멸망하고 초한쟁패기가 한창일 무렵, 묵특은 초원의 각 집단을 하나하나 꺾어나간다. 먼저 동부 흥안령 일대의 동호(東胡)를 급습해 복속케 하였다. 그 다음 타깃은 자신을 죽이려 했던 월지였다.

감숙 지방의 월지묵특에게 밀려나 서방으로 이주한다. 누번과 백양을 수복하여 하남 지방을 되찾는 한편, 북쪽 바이칼 호 방면으로는 굴사(屈射), 정령(丁霊), 격곤(鬲昆), 신려(薪犂)를 차례로 복속시켰다. 이로서 동부 중앙유라시아 일대를 흉노의 지배 하에 두었다.

1.4 한군을 격파하다[편집]

항우초나라를 꺾고 다시금 중원에 통일 제국을 세운 유방은 윗동네에서 무섭게 커가는 흉노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세력이 확 커지더니 장성을 넘어와 약탈을 자주 자행하고, 가뜩이나 부족한 인력을 계속 납치해가니 한 고조로서는 언젠가는 정벌해야 할 대상이었을 것이다.

한 고조는 한왕(韓王) 신(信)을 대(代) 땅에 파견하여 흉노를 견제하려 했다. (바짓가랑이 기어가기의 굴욕으로 유명한 그 한신과는 동명이인이다.) 그러나 신이 보기에 흉노와의 싸움은 승산이 없었다. 그래서 신은 화친을 시도했으나, 고조는 이를 배신 행위로 간주하고 신을 크게 책망한다. 그러지 신은 흉노로 투항해버린다.

신의 투항으로 생긴 힘의 공백 속으로 흉노의 4만 대군이 파고들었다. 한 고조는 분개하며 전쟁을 하기로 결정한다. 그는 친히 30만의 군대를 이끌고 흉노 정벌에 나섰다.

처음에는 좋았다. 한의 대군은 먼저 신의 군대와 만나 개박살을 내고 흉노를 향해 북상한다. 흉노의 군대는 노인과 병든 말로 구성되어 있었고, 퇴각을 계속하는 듯 보였다. 고조는 아예 병력의 일부만을 직접 데리고 흉노를 추격했다.

이윽고 한군은 백등산에 다다른다. 이때 흉노는 훼이크다 이 병신들아를 시전하며 고조의 소규모 부대를 그대로 포위한다. 일부러 고조 앞에 약군을 미끼로 던져 그를 백등산으로 유인했던 것이다.

한겨울 산중에 고립된 고조의 신세는 정말 비참했다. 30만에 달하는 본대와 연락할 방법만 있다면 이깟 포위야 얼마든지 부숴버릴 수 있으련만, 흉노는 외부와의 연락을 완전히 차단해버린다. 고조의 부대로서는 보급도 끊기고, 연락도 끊기는 최악의 사태를 맞은 것이다.

일주일 동안 고립된 끝에, 한 고조는 진평의 건의에 따라 묵툭의 아내(연지)에게 모피 코트를 보냈다. 아내의 간청에 따라 묵특은 포위망 한쪽을 풀어주었고, 한 고조는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한다.

더 자세한 내용은 백등산 포위전 참조하자.

1.5 화친 조약[편집]

어쨌거나 전쟁의 결과는 한의 완벽한 패전이었다. 한과 흉노 사이의 화친 조약은 한의 입장에서는 매우 치욕적인 조건으로 체결되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만리장성을 양국의 경계로 삼는다.
  • 한과 흉노는 형제의 의를 맺는다.
  • 한나라 공주를 흉노 선우에게 시집보낸다.
  • 한은 매년 흉노에게 옷감과 비단을 보낸다.

이 조약은 한 무제가 흉노에 대한 전쟁을 시작하기 전까지 한과 흉노의 관계를 규정하는 기초가 된다.

여기에서 유목 국가의 중요한 특성을 찾아볼 수 있다. 흉노에게 농경국가와의 전쟁은 물자 확보를 위한 것이었다. 흉노로서는 중국을 정복하고 다스릴 생각도, 능력도, 인구도 없었다. 그러나 유목 생활의 생산성은 낮은 편이었으며, 기껏 장악하기 시작한 육상 교역로, 즉 실크로드에서 팔만큼 좋은 질의 물건을 확보하는 것이 힘들었다.

흉노로서는 한의 물자를 어떻게든 끌어내야 했던 것이다. 한으로부터 매년 많은 양의 옷감과 비단을 받는 것은 물론, 한의 공주를 취하는 것도 바로 물자를 얻기 위해서였다.[3] 물론 한에서 진짜 공주를 보내는 일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 가짜 공주를 보냈으나, 흉노에게는 그 공주가 진짜 공주인지 여부보다 공주가 가지고 오는 지참금, 그리고 공주의 생활비 명목으로 매년 한에게서 받아낼 수 있는 막대한 물자가 중요했다.

이 목적을 더욱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흉노는 후에 화친 조약에 한 조항을 추가한다.

  • 국경지대에 관시(関市)를 설치하여 교역한다.

이는 더욱 효율적으로 한의 물자를 가져오기 위한 것이었다. 관시에서는 흉노의 말과 한의 다양한 물자들이 교환되었다.

한의 입장에서는 이 화친조약은 더할 수 없는 치욕이었으나, 고조가 유언으로 "흉노와 전쟁하지 말 것"을 남길 정도로 백등산에서의 패배로 인한 트라우마가 컸기에 흉노를 쉽게 건드릴 수 없었다. 흉노가 기마전술로 전략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던 것도 한몫했다.

1.5.1 묵특의 농서[편집]

한의 태도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여태후에게 묵특이 보내온 농서다.

대략 너네 나라에는 왕이 없고 우리 나라에는 왕비가 없으니 서로가 서로의 부족한 것을 취하는 게 어떻겠는가? 라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여태후의 반응이다. 여태후라는 여자는 매우 포악하고 사나운 성질을 가진 여자였다. 한 황실의 최고 어른인 자신을 한낱 오랑캐 따위가 조롱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당연히 여태후는 매우 분개하며 흉노 토벌을 명하고 군사를 일으킨다. 그러나 중신들이 이를 만류한다.

특히 계포는 10만 대군으로 흉노를 치자고 주장한 여후의 매제 번쾌를 두고 대놓고 저 새퀴의 목을 쳐야 합니다. 고조 폐하의 용맹함과 경험, 지혜를 가지고서도 흉노에게 대패했는데, 어찌 번쾌 따위가 지금 싸울 수 있겠습니까?라고 일갈하는 용자포스를 보여주었다.

결국 여태후는 울며 겨자먹기로 흉노 정벌을 취소하고, 답신을 보낸다. 내용은 대략 하늘이 내린 선우께서 저를 부르시니, 응해야 마땅하겠으나, 저는 이미 늙어 기력이 쇠하고 머리와 이도 빠져버렸습니다. 다만 선우께서 즐길 수 있도록 황제의 수레 두 대를 보내오니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만큼 한이 흉노에 대해 가지는 공포심은 강렬했던 것이다.

1.6 실크로드 장악[편집]

지도의 Tianshan이 천산 산맥

묵특 말년부터 흉노는 서진한 월지를 다시 정벌하는 작업을 시작한다. 월지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긴 했지만, 아직 하서회랑의 도시국가들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월지의 영향력을 제거하지 않고는 실크로드라는 매력적인 교역로를 장악할 수 없었다. 흉노 우현왕이 화친 조약을 어기고 허난성 지역을 대대적으로 침공하는 일이 일어나자, 묵특은 징계 차원에서 우현왕을 월지 정벌로 파견한다.

우현왕은 월지를 다시금 털어버리고, 하서회랑의 26개 도시국가를 흉노에 복속케 한다. 그러나 이 무렵 묵특이 사망하여 실크로드 장악을 완성할 책임은 그의 아들 노상 선우에게 넘어가게 된다. 이 무렵 월지는 다시 서진하여 천산 산맥 부근에 분포하고 있었는데, 노상은 여기까지 월지를 추격하여 월지 왕을 살해하고, 그의 머리를 술잔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로서 월지의 세력은 다시 크게 위축되었고, 흉노는 실크로드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할 수 있었다. 이후 흉노는 동복도위라는 관리를 파견하여 주기적으로 실크로드의 도시국가들에 대해 세금을 걷었다.

1.7 무제의 강경책[편집]

한나라의 국력은 착실하게 성장해 나갔다. 한 무제시기에 이르러 한은 전성기를 달리기 시작한다. 정예 기병을 정성들여 양성하고, 장건을 서역에 파견하여 월지와의 동맹을 꾀하는 따위, 무제는 대흉노전 준비를 착착 해나간다.

기원전 133년, 무제는 흉노에 대한 전쟁을 개시한다. 원래 흉노의 선우를 마읍으로 유인하여 죽이려고 하였으나 기밀유지에 실패하여 작전 실패했다.

이로서 흉노와 한의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한 무제에게는 젊고 패기 넘치는 위청곽거병, '비장(飛將)' 이광 등 특출한 장수들이 있었다. 기원전 129년, 전쟁 시작부터 이들은 엄청나게 활약했고, 이에 힘입어 한은 하남 지역(오르도스)를 수복하는 데에 성공한다. 곧 이 지역에 군현을 설치했다.

이로서 한은 흉노의 주요 근거지 중 하나를 직접 지배 하에 두었다. 121년 이후에는 더 나아가 몽골 고원 북부까지 쫓아가 흉노에게 큰 타격을 입히고, 하서 지방으로 진출하기 시작한다. 당시 전황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위청곽거병 항목 참조.

기원전 119년 이후, 한은 중국 역사상 최초로 하서회랑 각 도시국가들을 정복하고, 군현을 설치하여 직접 지배권 하에 두었다. 104과 102년에는 이광리의 주도로 대완(우즈베키스탄) 원정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대흉노 전쟁은 한에게 매우 큰 물적, 인적 자원 소모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세계 2차 대전 당시 미국처럼 쇼미더머니를 갈기다가 국력이 거덜나기 시작했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결국 기원전 89년, 전쟁의 끝을 선포하는 "윤대의 조"가 발표되었다.

한나라로서는 대흉노 전쟁을 통해 흉노를 완전히 복속시키겠다는 목적을 달성했다고 보기는 어려우나, 흉노의 위협을 일시적으로나마 정리하는 데에 성공했다. 또한, 하서회랑이 한의 영향권 하에 들어가며 흔히 "실크로드"라고 불리는 육상 교통로가 안정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한편 흉노로서는 오르도스라는 매력적인 근거지와 실크로드라는 교역로에 대한 장악력, 한의 물자 지원 등을 상실했다. 이로 인한 불안 속에서 흉노의 1차 분열이 싹튼다.

1.8 1차 분열[편집]

기원전 1세기 중반 무렵, 흉노의 1차 분열이 시작된다. 이는 유목 국가들의 뿌리깊은 문제이기도 한데, 유목 국가의 후계 과정은 큰 불안 요소를 가지고 있다. 정치 제도가 발전한 정주민 국가에서는 보통 뚜렷한 왕위세습 원칙(장자상속과 같은)에 따라 왕위가 상속된다. 이는 관료제 등의 발달로 왕이 역량이 부족하더라도 어느 정도 국가 운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목국가에서는 국가의 운영이 거의 전적으로 왕의 역량에 달려 있다. 그렇기에 선대 군주의 후손이나 형제 가운데 능력이 있는 사람 혹은 여론의 지지를 얻는 사람이 즉위하는 일이 많다. 바꿔 말하면, 여론이 모이지 않는다면 바로 국가의 분열로 이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특히 국가의 세력이 약화될 때 유목군주의 권위는 크게 흔들리는데, 이런 때 분열이 일어나기 쉬웠다. 기원전 60년경 흉노의 상황이 이러하였다.

기원전 1세기 중반, 흉노의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무제의 대공세로 오르도스를 상실하고, 실크로드 도시국가들에 대한 영향력마저 일부 상실한 상태였다.

게다가 기원전 60년 흉노의 서쪽 변경을 담당하고 있던 일축왕이 한에 입조하면서 흉노는 타림 분지의 오아시스 국가들에 대한 지배권을 한에게 완전히 넘겨야 했다. 이로서 실크로드 교역로에 대한 흉노의 지배는 일차적인 종말을 고한다. 여기에 더해 선비오환 등이 흉노의 지배에서 벗어나 초원에서의 지배적인 지위도 크게 흔들렸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악연구제 선우가 즉위 후 2년 만에 죽자 흉노는 사분오열되었다. 당시 수많은 선우들이 난립하였는데, 이름이 남아 있는 선우만 일곱 명이다. 이 중 친형제간이었던 질지(형)와 호한야(동생)가 가장 강성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흉노의 대분열을 틈타 한에서는 서역 도시국가들에 대한 지배권을 재확인하고, 아예 서역도호부를 설치하여 서역을 직접지배권 하에 두었다. 이때 군관을 파견하는 한편, 이 지역의 풍속과 사회에 대한 자세한 조사가 이루어진다.

호구조사가 실시되었고, 그 지역의 정치 체계, 중국에서의 거리, 지리적 위치, 접근성, 산물 등에 대한 자세한 조사가 실시되었다. 당시 조사의 기록이 남아 있어 당시 중앙아시아의 사회상을 파악하는 데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1.9 호한야의 통합[편집]

호한야의 동흉노와 질지의 서흉노 세력이 팽팽히 겨루고 있던 중, 호한야가 신의 한 수를 둔다. 기원전 51년, 한에 입조한 것. 한 마디로 "한에 순종할 테니, 흉노 전체의 선우가 될 수 있도록 지원해 주세요"라는 거래를 한 것이다.

한은 흉노의 선우가 스스로 신하를 자처하니 매우 기뻐하며 그에게 "흉노선우새"라는 도장을 내린다. 특히 주목할 것은 도장의 명칭이 "새"라는 것인데, 이는 원래 황제의 도장, 즉 옥새에만 붙을 수 있는 명칭이기 때문이다. 황제 아래의 제후나 왕의 도장은 "인"이라고 불린다.

한은 흉노의 선우를 특별대우하여 제후나 왕보다는 위, 황제보다는 아래에 있는 위치에 둔 것이다.

여튼 한의 물자와 군사적인 도움으로 호한야는 흉노를 다시금 통합할 수 있었다. 실제로 기원전 36년 질지가 전사한 전투는 서흉노와 한나라 군대 사이에서 일어난 전투였다.

이 전투로 서흉노는 와해되었고, 호한야는 흉노를 재통합할 수 있었다. 통합이 이루어진 이후에도 BC 33년 호한야는 재입조해 대대적인 물자 지원을 얻어갔다.

한의 재정에 큰 부담이 될 정도. 왕소군의 이야기도 호한야 선우의 시절에 나온 것이다.

호한야의 통합 이후 약 100년 동안 흉노는 안정기에 들어선다. 심지어 한 때 최전성기에 버금가는 세력을 회복하기도 했다. 왕망이 즉위하여 을 건국하며 주변국에 대한 예우를 격하한 일이 있었는데, 이를 계기로 서역과 초원에서 들끓은 신에 대한 반감을 이용하였던 것.

그러나 후한 건국 이후에는 다시 세력이 위축된다.

1.10 2차 분열[편집]

그러나 기원후 1세기 중반 2차 분열기가 찾아온다. 이번에도 흉노의 세력이 약화되어 가는 가운데 터진 계승 문제가 주요 원인. 1차 분열 때 질지의 서흉노와 호한야의 동흉노가 갈등했다면 이번에는 북흉노와 남흉노로 나뉜다. 남흉노는 한에 입조하여 복종하는 길을 택하였다.

포노 선우가 이끄는 북흉노는 북몽골초원에서 한에 대항했다. 이 분열기 이후 흉노는 초원에서 그 중심적인 지위를 잃어버린다.

흉노가 쇠퇴하면서, 기원전 1세기경 처음 나타났던 선비가 강성해졌다. 선비 (유목집단) 항목 참조.

기원후 79년에는 반초가, 89년에는 두헌이 대대적인 흉노 정벌을 감행하여 흉노를 대파했다. 이 때 흉노 일축왕을 비롯하여 21만명이 한에 투항했다고 한다.[4] 91년에는 경기(耿夔)가 이끄는 한군이 금미산에서 북흉노를 대파했다.

선우의 모친을 비롯하여 5000명이 전사한 참담한 패배였다. 북흉노는 서진하여 일리 강 유역으로 이주한다. 이 때 이주하지 않은 흉노 잔여 세력 10만여 락(천막)이 선비로 흡수되었다는 기록이 눈에 띈다.[5] 일리 강 유역에서 천산 산맥에 이르는 영역에 자리잡은 북흉노는 오랫동안 그 세력을 유지했다. 2세기 전반기까지 흉노는 일부 서역 국가들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현대의 카자흐스탄 지역에 분포하고 있었다.

한 조정과 서역의 패권을 놓고 계속해서 경쟁을 벌이면서 접촉을 했던 것도 확인된다.

그러다가 156년, 선비에게 패배한 흉노는 다시 서진하여 중국의 역사 기록에서 이탈한다. 이 시점에서 북흉노는 몽골 초원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했으며, 선비가 몽골 초원의 헤게모니를 쥐게 된다.

이후 북흉노는 아마 흑해 근방의 초원으로 이주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유럽에서 족이라고 불렸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

남흉노는 오르도스와 산서성 일대에 분포하며 중국을 다른 북방민족으로부터 지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심지어는 선비, 오환, 강 등을 토벌하는 용병 역할을 한 일도 있었다. 한에 대해 순종적인 태도를 취하는 선우들에 대해 남흉노의 유력 집단들은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 사이에 끊임없이 갈등이 발생했다.

선우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다. 삼국시대에는 조조가 아예 선우를 유명무실화하고 흉노를 5부로 재편하여 직접 지배 하에 두었다.

1.11 5호16국 시대, 그리고 소멸[편집]

남흉노는 내몽골 지역에서 계속적으로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게 된다. 선비와 함께 용병으로 중원을 뛰어다니는 일도 잦았다. 흉노가 마지막으로 활약한 시대는 오호십육국시대였다. 전조(당시 한)를 개창한 사람은 유연인데, 유연의 집안은 후한에게서 유씨 성을 하사받은 흉노 집단이었다.

유연의 전조 개창은 중원을 지배하는 유목민족의 왕조의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흉노라는 이름이 문헌에 등장하는 것은 역시 5호16국시대, 흉노 혁련발발이 산시성 지역에서 하(夏)를 건국했다는 기사이다. 하의 멸망 이후 흉노라는 이름은 중국 역사 기록에서 사라진다. 초원에 남았던 흉노 집단은 선비, 유연 등, 후대의 유목제국들 안으로 편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중원으로 유입된 흉노는 5호16국시대와 시기를 거치며 중국 사회 안으로 편입되었을 것이다.

2 그들은 누구였는가[편집]

흉노의 지배층이 문화적/혈통적으로 동호계, 퉁구스계, 튀르크계 중 어느 쪽에 속하는지는 정확히 결론난 바 없다. 몽골 초원에서 발견된 유골과 기록상 흉노의 외양 등을 바탕으로 흉노의 지배 집단은 유럽계라고 보는 시각도 있으나, 이 역시도 확실한 것은 아니다.

고분에서 발견된 유골들에 대해 실시된 유전자 검사의 결과에 의하면 전체 유골의 약 11%가 "유럽계"로 나온다고 한다. 분명한 것은 흉노 이전에 이미 중앙유라시아 전역의 유목, 수렵 집단들 간에 인적, 문화젹 교류가 있었다는 것이며, 흉노는 그 과정에서 출현한 집단이라는 것이다.

또한 유의하여야 할 사실은, '흉노는 단순히 하나의 민족이나 혈통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흉노가 강성해져 초원 전역에 대해 정치적인 지배력을 행사할 동안에는 초원의 다양한 유목 집단들이 스스로를 "흉노"라고 지칭했을 것이다.(혹은 흉노 제국 내에서 쓰이던 명칭으로) 흉노의 역사에 접근하는 가장 정확한 시각은 흉노 "제국"으로서 그들을 이해하는 것이다. 흉노"족"이라고 불리는 집단은 분명 이 제국의 중핵을 이루었겠지만, 흉노라는 명칭으로 불린 전체 집단 가운데에서 소수에 불과했을 것이다.

흉노의 언어 역시 아직은 미스터리할 뿐이다. 몽골계통설, 투르크계통설, 퉁구스계통설과 몽골과 퉁구스계통이 섞인 언어라는 설 등, 설만 무성하다. 노인 울라 16호 고분 등의 흉노 유적지에서는 흉노의 문자로 추정되는 기호가 새겨진 유물들이 출토된다. 그러나 흉노 문자는 아직 해독되지 않았다.

3 사회[편집]

흉노의 대군주는 선우(單于)라고 불렸다. 선우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는 선우(유목군주) 항목 참조. 선우는 연제(戀鞮) 씨족에서 배출되었으며, 전통적으로 호연, 란, 수복 등의 씨족에서 연지, 즉 아내를 맞아들였다. 후한 대에는 구림씨족이 추가된다. 이들 인척씨족의 수령들은 "골도후(骨都侯)라고 불리며 선우를 보좌하고, 휘하의 유목집단들을 감찰, 재판했으며, 한과의 교섭을 담당했다고 한다.

흉노는 영역을 크게 좌방, 중앙, 우방으로 나누었다. 동쪽의 좌방은 좌방왕장, 서쪽의 우방은 우방왕장들이 관리했다. 이렇게 영역을 삼분하는 것은 후대의 유목제국들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 특성이다. 좌방은 고조선과 예맥, 상곡(上谷)에 접했으며, 우방왕장은 상군(上郡)을 겨눈 위치에 놓였으며, 월지, 저, 강과 접했다고 한다. 중앙은 선우정(單于庭), 즉 선우의 직접 지배 영역이었으며, 운중(雲中)과 대(代)에 접하였다.

선우 아래의 최고위 지도층은 만기(萬旗)라고 불렸다. 사기에 의하면 만기에는 좌우현왕, 좌우록리왕, 좌우대장, 좌우대도위, 좌우대당호, 좌우골도후 등 24장이 포함되었다고 한다. 만기는 분지를 직접 다스렸으며, 휘하에 천장, 백장, 십장과 비소왕(裨小王), 상봉(相 封), 도위(都尉), 당호(当戸), 저거(且渠) 등의 속료를 거느렸다고 한다.[6] 만기란 만 명의 병력을 거느렸다는 의미이나, 몽골 등 후대의 유목제국들에서도 "만호"들이 만명의 병력을 거느리지 못했던 경우가 흔했다는 것을 고려하여 대부분의 학자들은 흉노의 실제 병력을 10만 정도로 추정한다.

흉노는 여러 집단의 연합체로, 스스로를 흉노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대부분 유목민이었다. 유목집단의 구성은 친족집단(씨족집단)부터 여러 친족집단이 정치적 상하관계로 묶여 구성된 대규모 집단들까지 다양했다.

유목 생활을 위해 이들은 소가 끄는 수레 위에 천막을 싣고 다니는 방식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직 게르와 같은 조립식 텐트가 발명되지 않았다는 추정도 있다.[7] 이들은 말, 소, 양을 비롯하여 다양한 동물들을 목축하였으며, 주로 목축생산물을 이용하여 의식주를 해결하였다.

흉노 제국 내에는 농경민도 있었다. 납치당한 사람, 포로, 공주를 따라온 사람, 협상으로 넘겨받은 인구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흉노의 영역 내에서 집단 거주를 했으며, 문화적,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4 경제[편집]

흉노의 경제는 물자 확보를 위한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기본적으로 유목의 생산성은 그렇게 높을 수 없다. 그러나 교역로에서 팔 물건이 필요했고, 자신들의 기본적인 경제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그리고 선우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서는 많은 물자가 필요했다.

그러다 보니 농경민과의 관계가 이들의 경제를 상당 부분 정의하게 된다.

상술했듯이 화친 조약에서 흉노가 요구한 조항들은 모두 한나라의 물자를 얻어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들은 농경민에 대한 약탈, 정주민 국가와의 협상과 교역, 주요 교역로 장악 등을 바탕으로 경제를 꾸려나갔던 듯하다.

4.1 약탈의 역할?[편집]

흉노의 경제에서 약탈이 어떤 역할을 차지했는지에 대한 논란이 많다. 기본적인 견해는 약탈은 직접적으로 물자를 얻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견해들도 많다. 우선, 약탈은 한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이기 위한 흉노의 가장 강력한 카드였다. 한 고조의 굴욕적 패배 이후, 한은 흉노와의 전면전을 꺼렸다. 이때 흉노는 약탈을 통해 한에게 지속적으로 위협을 가하고, 화친 조약을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개정해나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즉 약탈은 약탈을 통한 물자 확보보다는 한과 지속적으로 교섭하고, 협상을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는 한 방편이었다는 것이다. 한편 약탈의 진짜 목적은 물자 확보보다는 인력 확보가 목적이라는 의견도 있다. 약탈과 함께 납치도 항상 같이 이루어지는데, 이때 납치한 사람들은 흉노 영역권 내로 옮겨져 모여 살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흉노의 영역권 내에서 중국식 거주 시설의 유적이 발견되기 때문이다[8] 유목 제국 안의 정주민들은 수공업과 농업에 종사했을 것이며, 제국은 이들을 통해 모자라는 생산성을 어느 정도 보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즉 유목 제국들의 정주 지대 약탈은 물자 자체보다 물자를 생산할 능력을 갖춘 인력을 확보하는 것이 주요 목표였다는 주장이다.

5 기타[편집]

5.1 사마천 고자되는 이야기[편집]

한 무제 시절 이릉이란 장군이 흉노 본대에 맞서 싸워 선우가 친히 이끄는 군대를 상대로 신적인 전과를 올리다가 지구전 끝에 항복한 일이 있었다.

이릉은 당시 5천명의 보병만 가지고 8만에 가까운 흉노를 여러 차례 격파하다가 지구전 끝에 항복했다. 이때 한 무제는 이릉이 얼마나 불리한 조건에서 싸웠는지는 고려하지 않고 그저 이릉이 졌고, 항복했다는 사실만으로 분기탱천해 있었다.

이때 사마천이 한 무제에게 이릉을 그렇게 막 까는 건 아니지 않냐고 진언을 올렸다가 잘린다. 관직에서도 잘리고 음경도 잘리고.

사실 이는 무제의 노골적인 "이광리 밀어주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이광리는 무제의 애첩의 오빠. 그는 무능한 군인은 아니었던 듯 하나, 당시는 이릉과 함께 출전했다 대패한 상태. 이 상태에서 이릉을 옹호하고, 그의 군공을 칭찬한 사마천의 행위는 이광리를 깎아내리는 것처럼 비춰졌던 것이다. 한편, 이릉의 패배의 직접적 원인이었던 지원군 철군은 한 무제 본인의 결정이었다. 즉 이릉의 패배가 어쩔 수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황제에게 "너님이 잘못해서 멀쩡한 장수가 적한테 항복했음"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는 뜻.

5.2 신라왕족 흉노설[편집]

이 이론의 핵심은 김일제라는 인물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김일제는 흉노 휴도왕의 아들인데, 아버지가 무제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다가 한의 신뢰를 얻어 김씨 성을 하사받고 벼슬이 거기장군까지 올랐다.

김일제의 집안은 중국의 김씨의 시조라고 한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김일제가 신라 왕족의 조상인지 여부이다.

일단 확실한 것은 신라 중대 이후 신라 왕실은 스스로 김일제의 후손을 자처했다는 것이다. 이는 여러 금석문 자료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大唐故金氏夫人墓銘

먼 조상 이름은 일제(日磾시니 흉노 조정에 몸담고 계시다가 서한(西漢)에 투항하시어 무제(武帝) 아래서 벼슬하셨다. 명예와 절개를 중히 여기니 (황제께서) 그를 발탁해 시중(侍中)과 상시(常侍)에 임명하고 투정후(투<禾+宅>亭侯)에 봉하시니, 이후 7대에 걸쳐 벼슬함에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경조군(京兆郡)에 정착하게 되니 이런 일은 사책에 기록되었다. 견주어 그보다 더 클 수 없는 일을 하면 몇 세대 후에 어진 이가 나타난다는 말을 여기서 징험할 수 있다.

한(漢)이 덕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난리가 나서 괴로움을 겪게 되자, 곡식을 싸들고 나라를 떠나 난을 피해 멀리까지 이르렀다. 그러므로 우리 집안은 멀리 떨어진 요동(遼東)에 숨어 살게 되었다. [9]


이는 김씨부인의 할아버지 김충의에 대한 부분인데, 김충의는 신라인으로 중국 정사에 기록이 남아 있으며, 아직 성씨 사용이 흔하지 않던 시기이므로 김충의는 신라 왕족 중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무대왕릉비에서도 비슷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는데, 신라 왕실의 유래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투후(秺侯) 제천지윤(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10] 라는 대목이 바로 그것이다. 투후 제천지윤이란 역시 김일제를 뜻하는 말이다.

신라 흉노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근거는 이 뿐이 아니다. 신라 문화에서도 흉노와의 친연성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특히 신라의 무덤 양식과 유물 등을 북방 민족의 그것과 비교하며 유사점들을 지적한다. 특히 돌무지덧널무덤이 흉노나 스키타이의 쿠르간과 유사하다는 것이 강조된다.

그러나 이 설은 거의 완벽하게 부정당한 상태이다.

우선,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의 발생 시기는 4세기경으로 추정되는데,[11] 김일제는 기원전 134년 출생한 인물이며, 김일제의 후손이 왕망과 연관되어 패가망신한 것이 14년, 기원후 1세기이다. 즉 김일제의 후손이 이동하기 시작한 시기부터 신라에 돌무지덧널무덤이 나타날 때까지 300여년의 시간적 괴리가 생겨난다.

게다가 삼국사기에 실린 신라 김씨의 원조 김알지가 등장한 시기는 65년이다. 14년 패가망신한 김일제의 후손이 50여년 만에 신라에서 유력한 세력으로 등장하는 게 가능한지 여부는 둘째치고, 만약 신라 왕족이 김일제로부터 이어지는 흉노계 집단이 맞다면, 왜 돌무지덧널무덤이 김알지가 신라로 유입된 시기에 발생하지 않았던 것인지 설명할 수 없다. 만약 김씨가 왕이 된 이후에야 돌무지덧널무덤을 사용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고 해도, 최초의 김씨 왕은 미추 이사금으로, 3세기 사람이다. '흉노의 유입'과 돌무지덧널무덤의 발생 간에는 어떻게 설명해도 100년의 간극이 생겨난다는 것.

게다가 신라돌무지덧널무덤과 유목민의 쿠르간은 유사하기는 하지만, 세부적으로 보면 여러 가지 차이를 보이는 무덤양식이다. 신라 고분 연구가 진척되면서 돌무지덧널무덤까지 이르는 여러 발전단계가 파악되었기에, 현재는 돌무지덧널무덤을 신라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무덤양식으로 파악하고 있다.

또한 신라 왕실이 스스로를 흉노와 연관지은 것은 7세기경에 등장한 위의 두 비문 뿐이다. 엄청난 시기적 괴리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고대에는 스스로의 가문을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하여 중국 역사서에 등장하는 영웅이나 제후와의 친연성을 날조하는 일이 흔했다.

흉노의 일파가 신라로 이동해왔음을 증명할 고고학적 자료가 없고, 중요한 근거로 꼽혔던 돌무지덧널무덤과 쿠르간의 유사성이 부정되면서, 현대 학계에서는 신라 왕실에서 김일제를 스스로의 조상으로 내세운 것도 같은 목적으로 날조된 것이라고 본다.

다만, 하나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경주김씨 족보에 기록된 김알지 설화와 문무왕비와 신문왕비에 기록된 성한왕의 설화가 놀랍도록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비문의 대수를 타고 올라가면 성한왕은 김알지의 2세손인 "세한"과 동일한 인물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게다가 한자를 통해 우리말을 구성했기 때문에 당시에는 성한과 세한이 같은 발음이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즉, 성한왕=김세한인데, 성한왕의 설화가 김알지의 설화와 거의 같다는 것은 김알지 역시 가공의 인물이고 후대에 족보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1대를 추승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5.3 훈-흉노 동족설[편집]

훈은 4세기경부터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고 게르만계 민족들의 대이동을 일으킨 유목집단으로 유명하다. 91년 타키투스의 기록에 카스피해 주변에 분포하고 있던 "훈노이"(훈의 복수형) 라는 집단이 등장한다. 이는 훈에 대한 최초의 기록으로 꼽히지만, 이 집단이 과연 훈이었는지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유럽 역사에 훈이 확실하게 등장하는 시기는 4세기경인데, 370년 흑해 연안으로 이동해 온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항목 참조.

훈의 동복

어쨌거나 유럽 학계에서 훈의 유래는 오랫동안 미스터리였다. 유럽 역사에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8세기 훈과 흉노가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는 학설이 제기되었고,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학자들이 많아졌다. 현재까지도 훈-흉노 동족설은 완전히 증명되지도, 완전히 부정되지도 않은 채 역사학계의 떡밥으로 남아 있다.

훈과 흉노가 동족이라는 주장은 연대, 유물, 기록에 근거한다. 일단 흉노와 훈의 발음상의 유사성을 차치하고서라도, 4세기경 박트리아에서 '흉노'라고 기록한 것을 소그디아나에서는 '훈'으로 번역하고, 소그디아나에서 '훈'이라고 기록한 것을 박트리아에서는 '흉노'로 번역했음이 밝혀졌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4세기경 낙양이 함락될 때, 소그디아나에서는 "훈"을 낙양을 점령한 주체로, 중국에서는 "흉노"를 낙양 점령의 주체로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흉노의 동복(의례용 구리 솥)과 훈의 동복이 매우 유사하며, 몽골리아의 합성궁이 유럽에 전해진 시기가 훈의 등장 시기와 일치한다. 최소한 흉노와 훈 사이에 문화적 연관성이 존재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뜻.

편두를 한 두개골

그러나 훈에서 확실히 행해진 편두(어릴 때 머리를 묶어 두개골이 길쭉하게 자라도록 함)가 흉노에서 행해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또한 훈의 관습 가운데 남편이 죽으면 미망인은 스스로의 얼굴을 긁어 상처를 내는 관습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흉노에 이런 관습이 있었다는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두 집단 간에 분명히 문화적 차이가 있었다는 것. 한편 흉노와 훈을 같은 집단으로 보는 가장 결정적인 근거로 꼽히는 것은 흉노가 이란의 알라니족(奄蔡)을 정복했다는 중국 정사의 기록이다. 이 정복의 시기가 훈이 알라니족을 정복한 시기와 일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록은 위서에서 처음 등장한 후 북서, 조서 따위에서 차용되었는데, 위서에서는 흉노를 이 점령의 주체로 기록하고 있지 않다고 한다.

아직은 흉노와 훈이 같은 집단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증거가 부족한 것이다. 또한 1~2세기 중국 역사기록에서 서서히 이탈한 북흉노가 정말로 4세기경 갑툭튀한 훈의 선조라면, 그 사이는 아무런 기록이 없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모르는 시기가 되어버린다.

현재로서는 훈과 흉노를 현대적인 의미에서 같은 "민족"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리가 있다. 훈 내에는 여러 계통의 유목민이 혼재되어 있었기에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훈이 몽골 고원에서 온 집단일 가능성은 매우 높다. 훈이 흉노의 일파에서 출발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훈의 문화는 당시에도 유라시아 대륙의 양쪽 끝단은 초원의 세계를 통로로 하여 연결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6 인터넷 은어로서의 사용[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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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족 흉노설을 근거로 백제=전라도(사실 백제는 서울지방을 근거지로 발전한 정권이다), 신라=경상도, 신라의 시조가 흉노이니 경상도는 흉노(족) 라는 편협하고 자의적인 역사인식을 가진 지역 패권주의자들 혹은 반 영남 정서를 가진 네티즌들 사이에서 한때 회자되었던 지역드립이다.

이미 과거의 글에서나마 볼 수 있는, 약발이 다 된 드립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이 드립을 치는 경우가 아주 간간히 보인다.

대체로 흉노는 불의 민족이니 경상도 사람들은 그들의 후손답게 흉포하다느니 하는 궤변과 함께 세트로 사용된다.

최근엔 너무나 강렬하면서 비극적인 어떤 사건을 비하하는 드립이 흥하면서 그것으로 완벽하게 대체된 것으로 보인다. 입에 차마 담을 수 없는 패륜적 고인드립이라 여기에 지면을 할애하기조차 아깝다.

정상적인 사고방식과 정치적 신념을 가진 위키러라면 "흉노"를 이런 뜻으로 사용하지 말자. 의미 없는 지역감정 조장일 뿐이다.

한편 가끔 흉노가 백인계라는 주장을 가져와 경상도는 백인의 피를 물려받았다든가 하는 이상한 드립을 치는 사람들도 보인다. 당연히 백인우월주의에 젖어 있는, 좋지 않은 시각이다. 자신들에 대한 부정적인 드립을 아름다운 정신승리로 승화해낸 사람들이라고나 할까. 이 역시 정상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위키러라면 절대 따라해서는 안 된다.

7 각주

  1. "아틀라스 중앙아시아사"(가제), 김호동, (미출판)
  2. "아틀라스 중앙아시아사"(가제), 김호동, (미출판) (교수님께서 수업 자료로 미완성 원고를 주셨습니다.)
  3. 중앙유라시아의 역사, 고마츠 히사오 외
  4. 김호동, 아틀라스 중앙아시아사, 사계절, 근간
  5. 김호동, 아틀라스 중앙아시아사, 사계절, 근간
  6. 아틀라스 중앙아시아사, 김호동, 미출판
  7. 중앙유라시아의 역사, 고마츠 하사오 외
  8. 중앙유라시아의 역사, 고마츠 히사오 외.
  9. 부산외대 권덕영 교수 번역을 바로바로의 중얼중얼에서 재인용
  10. 역시 바로바로의 중얼중얼에서 인용
  11. 〈적석목곽분으로 들여다본 신라〉, 《논쟁으로 읽는 한국사 1 전근대》, 이성주, 역사비평사,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