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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소프트맥스]]의 게임 '''마그나 카르타'''을 찾아왔다면 [[마그나 카르타 (게임)]] 항목을 참고하자.


{{퍼온문서|마그나 카르타|13536176}}
마그나 카르타({{llang|en|Magna Carta}}, '''대헌장''')은 [[영국]]의 존 왕에게 짜증난 [[귀족]]들이 [[국민]]들과 동조해 뜯어낸 협박 문서다.
{{학술 관련 정보}}
{{노잼}}
 
Magna Carta, 대헌장(大憲章)


== 개요 ==
== 개요 ==
당시 [[영국]]은 [[프랑스]]와의 싸움에서 패전했는데 <del>전쟁광</del>존 왕이 또 싸움을 걸어 [[패전]]했던 상황이었다. 비유를 하자면 도박으로 잃은 돈을 따기 위해 다시 도박을 하는 그런 [[흠좀무]]. 잦은 [[전쟁]]으로 [[국민]]은 짜증이 엄청나게 나 있던 상황. 설상가상으로 국고가 바닥나자 존 왕은 <del>또 전쟁하려고</del> 귀족들에게 세금을 거두려 했고, [[귀족]]과 [[국민]]이 빡쳐서 [[위아더 월드]]하게 되었다. 자업자득으로 존 왕은 [[퇴위]]당해 [[처형]]될 위기에 쳐했지만..


[[파일:Magna Carta (British Library Cotton MS Augustus II.106).jpg|thumb|230px|마그나 카르타]]
왕을 [[처형]]시키면 골치아파질 것을 예상한 [[귀족]]측이 존 왕의 권한을 제한하는 각서를 써주는 걸로 무마하게 된다.
[[File:Magna Carta (1297 version, Parliament House, Canberra, Australia) - 20080416.jpg|thumb|[[오스트레일리아 국회의사당]]에 마그나 카르타 1297년판이 전시되어 있다]]
마그나 카르타는 [[1215년]] [[6월 15일]]에 영국의 [[잉글랜드의 |존 왕]]이 귀족들의 강요에 의하여 서명한 문서로, 국왕의 권리를 문서로 명시한 것이다. 왕에게 몇 가지 권리를 포기하고, [[법적 절차]]를 존중하며, 왕의 의지가 [[법치주의|법에 의해 제한]]될 수 있음을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국왕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문서화하기 시작하여 전제 군주의 절대 권력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흔히 영국 [[민주주의]]의 시발점으로 강조되는 것과 달리, 문서 자체에 민주주의적 요소는 없다. {{ㅊ|속였구나!}} 이 문서에서 민주주의의 시사점은 후대에 국왕과 대립이 발생했을 때 계속 확대 해석된 것이다.


== 배경 ==
== 배경 ==
[[1189년]] [[잉글랜드의 헨리 2세|헨리 2세]]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리처드 1세]]가 즉위했다. 그러나 그는 10년간을 [[십자군 전쟁]]과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외국에 있었고, 본국에는 단지 6개월 가량만 있었다. 따라서 사실상 그의 동생인 존이 왕 역할을 하고 있었다(존은 헨리 2세의 아들이자 리처드 1세의 동생이다).
당시 [[프랑스]][[영국]]은 신하 관계에 있었다. 사실 존 왕이 [[영토 전쟁]]을 하게 된건 [[프랑스]]가 존 왕이 아닌 아서 왕자가 공식적인 왕의 계승자라고 주장하면서 시작되었다.
 
10년 뒤인 [[1199년]], 사자심왕 리처드 1세가 사망하자 존이 정식으로 대관식으로 즉위했다.
[[프랑스]]의 [[프랑스의 필리프 2세|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의 아들인 아서 왕자(브르타뉴 공)가 정당한 왕위 계승자라고 주장하였고, 프랑스로 존 왕을 소환하였으나 존 왕은 거절하였다(이때는 영국 왕은 프랑스 국왕의 봉신이었다<ref>프랑스왕의 봉신이었던 노르망디 공작이 영국을 정복해 영국왕이 되어 노르만 왕조를 개창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노르망디 공작의 작위는 2015년 현재 영국 국왕인 [[엘리자베스 2세]]가 아직까지 보유하고 있다.</ref>).
 
존 왕은 프랑스와 영토 전쟁을 명목으로 조세를 대폭 상향 조정했다. 그러나 프랑스와 전쟁에서 크게 패하여 [[노르망디]]의 대부분을 빼앗겼고, 교황과의 충돌로인해 [[파문]]을 당했다.


노르망디의 대부분을 빼앗기고 영주들과 대립 관계에 놓였고, 교회와도 맞섰으며, 귀족이나 도시에 대해 과도한 세금을 매긴 존 왕에게 귀족과 성직자들이 반발을 일으킨 것은 당연했고, 결국 영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프랑스]]와 [[영토 전쟁]]으로 세금을 왕창 거뒀는데 패해서 [[노르망디]]의 대부분을 빼앗기고 설상가상으로 [[교황]]과 충돌도 일어났다. [[영주]]들에게도 [[교회]]에게도 [[귀족]]에게도 [[국민]]들에게도 공공의 적. <del>듣고보니 들고 안일어날수가 없잖아</del>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라 불리는 이 문서는 존 왕과 귀족들 간의 이러한 무력 충돌의 결과, 수세에 몰린 존 왕이 전통적으로 귀족들이 누리던 봉건적 권리와 지위를 재확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봉신과 주군 간의 봉건적 관계에서 봉신이 지는 의무는 흔히 "조언과 원조(concilium et auxilium)"로 요약된다. 존 왕은 당시 프랑스에서 자신이 오래 수행해 온 전쟁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봉신들의 이 의무를 악용하여 수탈을 거듭하였으며, 이것이 봉건 귀족들을 자극하게 된 것이다. {{ㅊ|그러니까 존 왕이 자제할 줄 알았다면 현대 민주주의는 없거나 있어도 훨씬 늦게 나타났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 문서 중, "어떠한 군역세 또는 봉건 원조도 우리 왕국의 공통된 조언(commune consilium)에 의하지 않고서는 징수하지 않는다"는 조항(제12조)은 특히 유명하다. 이 조항은 후일 일반적으로 징세에 대해서는 의회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의미로 해석되게 된다. 또한 "자유민은 그와 동등한 자의 적법한 판정(judicium parium suorum)에 의하지 않고는 체포, 구금되거나, 재산이 박탈되거나, 법적 보호가 박탈[되지 않는다]"는 조항(제39조)은 후대의 법률가와 역사가들에 의하여 배심재판을 보장하는 뜻으로 해석되어 왔지만, 원래의 의미는 봉건 영주가 전통적으로 누리던 봉건법정을 열 권한을 보장하는 내용이었다.
 
"카르타(Carta)"는 중세 영국 법제하에서 특정 집단에게 국왕이 부여하는 특혜나, 구체적 양허사항을 담고 있는 문서를 말한다. 도시, 직업 집단, 대학교 등에게 국왕이 부여하는 특혜(libertates; liberties)를 규정한 문서들이 바로 그것이다. "마그나 카르타" 또한 이 범주를 넘어서는 것은 아니며, 따라서 현대적 의미의 "인권선언"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법제도의 변천과정에서 흔히 그러하듯이, 과거의 문서가 담고 있는 의미는 후세의 해석자들이 지배하게 되며, 마그나 카르타는 후대의 해석을 통하여 민주주의와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문서로 각인되게 되었다.
 
== 경과 ==
존의 실정(失政)에 견디지 못한 귀족들이 런던 시민의 지지를 얻어 왕에 압력을 넣어 템스 강변의 러니미드에서 왕에게 승인하도록 한 귀족 조항을 기초로 작성되었다. 원문에는 개조번호(個條番號)가 없으나 '''18세기 이래 63개조로 정리'''되어 있다. 새로운 요구를 내놓은 것은 없고, 예로부터 관습적인 모든 권리를 확인한 문서로서 '''교회의 자유, 봉건적 부담의 제한, 재판 및 법률, 도시 특권의 확인, 지방 관리의 직권 남용 방지, 사냥, 당면한 애로 사항의 처리 등 여러 규정'''을 포함하고 있다.
 
[[1215년]] [[6월 15일]], 존 왕이 날인한 문서, 이것이 바로 '''마그나 카르타'''(혹은 '''대헌장''')이다.


== 마그나 카르타의 내용 ==
== 마그나 카르타의 내용 ==
다음은 마그나 카르타의 주요 조항 중 일부이다.
[[왕]]이라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는 하지 못하는 [[불문율]]이 있었다. 사실 마그타카르타의 내용 자체는 이전부터 관례적으로 내려오던 것을 문서에 옮긴 [[관습법]]에 불과하지만, 국왕에게서 뜯어낸 [[공식]]적인 문서라는 것에 의의가 있다. 대강의 내용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제 1조''' 교회는 국왕에게 자유롭다
* '''제12조''' 오래된 관습상 인정되어 온 것(관례로 굳어진 것) 외의 과세 혹은 봉건 지원금은 귀족들의 자문을 거치지 않으면 부과할 수 없다. 다만 왕이 인질이 되었을 때의 협상금, 왕의 아들이 기사가 될 때 필요한 비용, 왕의 장녀가 시집을 갈 때 필요한 비용 등은 예외로 한다.
* '''제 12조''' 왕의 명령만으로는 전쟁 협력금 등의 명목으로 세금을 거둘 수 없다
* '''제21조''' [[대귀족]]은 동료 귀족에 의해서만 처벌될 수 있다. 그러나 큰 죄목(반역죄 등)일 경우로만 제한한다.
* '''제 13조''' 런던과 다른 자유시들은 교역의 자유가 있고, 자체적으로 관세를 정한다
* '''제39조''' 자유민은 동등한 신분을 가진 자에 의한 합법적 재판 혹은 국법에 의하지 않고서는 체포, 감금, 추방, 재산의 몰수 또는 어떠한 방식의 고통도 받지 않는다.
* '''제 14조''' 왕은 이러이러한 때에만 의회를 소집할 수 있다
 
* '''제 38조''' 잉글랜드의 자유민은 법이나 재판을 통하지 않고서는 자유, 생명, 재산을 침해받지 않는다.
조약의 내용들로 알 수 있듯이 대헌장은 오직 성직자와 귀족, 그리고 봉건 제후의 권리만을 보장하는 문서였다. 또한 이 문서에서의 자유민이란 성직자, 귀족, 자유 시민(거주와 이주의 자유가 있는 평민)을 뜻한다.
 
== 결과 및 의의 ==
마그나 카르타로 인해 왕의 권한은 크게 줄어들었고 귀족과 성직자들의 권리는 크게 늘었다. 이는 곧 의회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마그나 카르타는 원래 고위 귀족신분만을 위한 문서였으나 후대에 가서는 부르주아 시민들에 대한 것으로 확대 해석되었다. 특히 12조에서의 왕의 과세권 제한 내용은 이후에 발생한 [[권리 청원]], [[권리 장전]] 등의 영국 부르주아혁명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고, 영국 의회정치의 기틀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에드워드 코크의 견해==
[[파일:Edward coke.jpg|thumb|right|[[에드워드 코크]]는 마그나카르타가 귀족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해석했다.]]
 
[[에드워드 코크]] 경은 마그나 카르타를 깊게 논평한 최고의 법학자 중의 한 명이다. 그는 1225년 판본을 해석했는데, 마그나 카르타가 귀족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해석했다. 코크는 마그나 카르타가 수백년 간 잘못 해석되어 왔다고 비판했다.<ref>Turner, Ralph V. ''Magna Carta'' Longman (2003) 148</ref> 그는 마그나 카르타의 자유들(liberties)이 개인의 자유(individual liberty)과 같은 것이라고 해석했다.<ref>Holt, J.C. ''Magna Carta'' Cambridge University Press 2nd edition (1992) p12</ref>


코크는 마그나 카르타의 자유들을 보완하기 위하여 1628년 [[권리청원]]을 기초했다. 권리청원을 제정하는 토론 중에, 코크는 국왕의 주권을 부정하는 유명한 주장을 했다. 그는 국왕이 아니라 성문법이 절대적이라고 믿었다.<ref>Turner, Ralph V. ''Magna Carta'' Longman (2003) 157</ref>
== 마그나 카르타의 무효 ==
당시 최강의 [[교황]]권을 누리던 [[인노첸시오 3세]]가 "너희들 아무리 내가 국왕과 사이가 안좋아도 그렇지 어디서 왕을 협박해!"라고 하는 바람에 마그나카르타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그 직후에 [[헨리 3세]] 파인 [[윌리엄 마셜]]이 이끄는 왕당파가 반란군들을 박살내면서 휴지조각이 되어버린다. 설상가상으로 존 왕의 뒤를 이은 [[헨리 3세]]는 "존 왕과 약속했지 나하고 약속한건 아니잖아" 라면서 무시해버렸다.


==참고==
== 뒤늦은 주목 ==
몇백년동안 잊혀졌다가 [[국왕]]과 [[의회]]가 [[대립]]하게 된 17세기에 주목받게 되었다. 귀족들은 이 '''마그나 카르타'''를 기반으로 전제 왕권과 대결했다. 이 대립은 [[청교도 혁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에드워드 코크]] 경과 같은 [[재판장]]들은 마그나 카르타를 연구해 '''법을 통한 지배'''라는 개념을 확립하게 되었다.


* [[헌법]]
본래 [[마그나 카르타]][[귀족]]들의 [[특권]]을 철저하게 주장하는 내용이었지만 세월이 지나다보니 해석이 달라지면서 평등사상의 전파와 법치주의의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 [[십자군전쟁]]
* [[잉글랜드의 존|존]]
*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리처드 1세]]
* [[권리장전]]
* [[권리청원]]
* [[영국 의회]]


{{각주}}
현재 마그나 카르타는 특별히 [[헌법]]같은게 없는 현재의 [[영국]]에서 헌법과 같은 [[지위]]가 있다. 시대에 발맞춰 일부 조항들은 폐지되었지만.

2015년 5월 18일 (월) 17:11 판

혹시 소프트맥스의 게임 마그나 카르타을 찾아왔다면 마그나 카르타 (게임) 항목을 참고하자.

마그나 카르타(영어: Magna Carta, 대헌장)은 영국의 존 왕에게 짜증난 귀족들이 국민들과 동조해 뜯어낸 협박 문서다.

개요

당시 영국프랑스와의 싸움에서 패전했는데 전쟁광존 왕이 또 싸움을 걸어 패전했던 상황이었다. 비유를 하자면 도박으로 잃은 돈을 따기 위해 다시 도박을 하는 그런 흠좀무. 잦은 전쟁으로 국민은 짜증이 엄청나게 나 있던 상황. 설상가상으로 국고가 바닥나자 존 왕은 또 전쟁하려고 귀족들에게 세금을 거두려 했고, 귀족국민이 빡쳐서 위아더 월드하게 되었다. 자업자득으로 존 왕은 퇴위당해 처형될 위기에 쳐했지만..

왕을 처형시키면 골치아파질 것을 예상한 귀족측이 존 왕의 권한을 제한하는 각서를 써주는 걸로 무마하게 된다.

배경

당시 프랑스영국은 신하 관계에 있었다. 사실 존 왕이 영토 전쟁을 하게 된건 프랑스가 존 왕이 아닌 아서 왕자가 공식적인 왕의 계승자라고 주장하면서 시작되었다.

프랑스영토 전쟁으로 세금을 왕창 거뒀는데 패해서 노르망디의 대부분을 빼앗기고 설상가상으로 교황과 충돌도 일어났다. 영주들에게도 교회에게도 귀족에게도 국민들에게도 공공의 적. 듣고보니 들고 안일어날수가 없잖아

마그나 카르타의 내용

이라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는 하지 못하는 불문율이 있었다. 사실 마그타카르타의 내용 자체는 이전부터 관례적으로 내려오던 것을 문서에 옮긴 관습법에 불과하지만, 국왕에게서 뜯어낸 공식적인 문서라는 것에 의의가 있다. 대강의 내용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제 1조 교회는 국왕에게 자유롭다
  • 제 12조 왕의 명령만으로는 전쟁 협력금 등의 명목으로 세금을 거둘 수 없다
  • 제 13조 런던과 다른 자유시들은 교역의 자유가 있고, 자체적으로 관세를 정한다
  • 제 14조 왕은 이러이러한 때에만 의회를 소집할 수 있다
  • 제 38조 잉글랜드의 자유민은 법이나 재판을 통하지 않고서는 자유, 생명, 재산을 침해받지 않는다.

마그나 카르타의 무효

당시 최강의 교황권을 누리던 인노첸시오 3세가 "너희들 아무리 내가 국왕과 사이가 안좋아도 그렇지 어디서 왕을 협박해!"라고 하는 바람에 마그나카르타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그 직후에 헨리 3세 파인 윌리엄 마셜이 이끄는 왕당파가 반란군들을 박살내면서 휴지조각이 되어버린다. 설상가상으로 존 왕의 뒤를 이은 헨리 3세는 "존 왕과 약속했지 나하고 약속한건 아니잖아" 라면서 무시해버렸다.

뒤늦은 주목

몇백년동안 잊혀졌다가 국왕의회대립하게 된 17세기에 주목받게 되었다. 귀족들은 이 마그나 카르타를 기반으로 전제 왕권과 대결했다. 이 대립은 청교도 혁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에드워드 코크 경과 같은 재판장들은 마그나 카르타를 연구해 법을 통한 지배라는 개념을 확립하게 되었다.

본래 마그나 카르타귀족들의 특권을 철저하게 주장하는 내용이었지만 세월이 지나다보니 해석이 달라지면서 평등사상의 전파와 법치주의의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현재 마그나 카르타는 특별히 헌법같은게 없는 현재의 영국에서 헌법과 같은 지위가 있다. 시대에 발맞춰 일부 조항들은 폐지되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