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자 룩셈부르크

Freirepublik (토론 | 기여)님의 2016년 4월 30일 (토) 23:16 판 (→‎삶)

개요

로자 룩셈부르크는 폴란드, 독일의 혁명가이자 사회주의자로 20세기초 독일 사회주의 운동의 주요 인물 중 하나이다. 1919년 스파르타쿠스단 봉기를 주도하였으나 실패하고 우익 준군사집단인 자유군단에 의해 살해당했다.

성의 알파벳 표기가 두가지로 나뉘는데. Luksemburg와 Luxemburg이다. 로자가 독일과 폴란드 모두 살았고 운동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도서관에서 저서를 검색할 때 골치아픈 일이 생기는데 "로자 룩셈부르크", "Luksemburg,Rosa", "Luxemburg, Rosa" 세 가지 모두 등록되어 있을수 있다. 이 경우 Luksemburg로 검색하면 <자본축적론>이 나오지만 Luxemburg로 검색하면 나오지 않거나 정 반대의 경우도 있는 등의 일이 벌어진다. 책이름을 알면 책이름으로 검색하거나 ISBN으로 조회하는 편이 좋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1870년 3월 5일 러시아령 폴란드 자모슈치에서 태어났다. 룩셈부르크의 집안은 꽤 자유주의적이고 세계시민주의적인 환경을 가진 집안이었으며 유복한 집안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집안이 부르주아적인 환경이었던 것과 별개로 룩셈부르크는 어렸을 때부터 사회주의운동에 꽤 적극적인 인물이었다. 룩셈부르크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무렵인 1886년에 그녀는 "프롤레타리아트"[1]라는 러시아의 혁명정당에 가입하였으며 1889년에는 차르 러시아의 경찰들이 그녀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룩셈부르크는 러시아령 폴란드에서 떠나야 했다. 그리고 그녀는 스위스로 향했다.

당시 유럽에 만연한 반유대주의, 여성 투표권조차 보장되지 않는 당시의 낮은 여성인권 수준[2] 때문에 룩셈부르크가 진학할 수 있는 대학은 거의 없었다. 그의 고향이던 폴란드는 물론 독일도 여성은 대학에 진학할 수 없었으며 영국, 프랑스, 스위스정도가 여성이 대학에 갈 수 있던 나라였다. 그 중 폴란드 이민자가 많던 스위스를 선택한 로자 룩셈부르크는 취리히에서 국민경제학과 공법학을 전공하였다. 그녀는 취리히에서도 사회주의운동에 활발히 참여하였는데 폴란드 혁명적 사회주의당의 기관지 <노동자문제(Sprawa Rabotnicza)>에 꾸준히 글을 기고하였고 1893년에는 폴란드왕국사회민주당의 당 대표 자격으로 취리히에서 열린 제2인터네셔널의 사회주의 노동자 대회에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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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1886년에 지도자들이 처형되거나 강제노동형에 처해짐에 따라 사실상 해체되었으나 몇몇 소규모 조직들은 살아남았고 그 중 하나가 로자 룩셈부르크가 속한 조직이었다.
  2. 최초의 여성참정권은 1893년 뉴질랜드로 알려져 있다. 즉, 그 시절에는 여성참정권을 국가적으로 보장한 국가가 단 하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