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자 룩셈부르크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1871년 3월 5일~1919년 1월 15일)는 폴란드·독일혁명가이자 사회주의자로 20세기 초 독일 사회주의 운동의 주요 인물 중 하나이다. 1919년 스파르타쿠스단 봉기를 주도하였으나 실패하고 우익 준군사집단인 자유군단에 의해 살해당했다.

성의 로마자 표기가 두 가지로 나뉘는데. Luksemburg와 Luxemburg이다. 로자가 독일과 폴란드 양쪽에서 모두 거주하며 활동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도서관에서 저서를 검색할 때 골치아픈 일이 생기는데 "로자 룩셈부르크", "Luksemburg,Rosa", "Luxemburg, Rosa" 세 가지 모두 등록되어 있을수 있다. 이 경우 Luksemburg로 검색하면 <자본축적론>이 나오지만 Luxemburg로 검색하면 나오지 않거나 정 반대의 경우도 있는 등의 일이 벌어진다. 책이름을 알면 책 이름으로 검색하거나 ISBN으로 조회하는 편이 좋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로자 룩셈부르크는 1871년 3월 5일 러시아령 폴란드 자모슈치에서 태어났다. 룩셈부르크의 집안은 꽤 자유주의적이고 세계시민주의적인 환경을 가진 집안이었으며 유복한 집안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집안이 부르주아적인 환경이었던 것과 별개로 룩셈부르크는 어렸을 때부터 사회주의운동에 꽤 적극적인 인물이었다. 룩셈부르크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무렵인 1886년에 그녀는 "프롤레타리아트"[1]라는 러시아의 혁명정당에 가입하였으며 1889년에는 차르 러시아의 경찰들이 그녀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룩셈부르크는 러시아령 폴란드에서 떠나야 했다. 그리고 그녀는 스위스로 향했다.

당시 유럽에 만연한 반유대주의, 여성 투표권조차 보장되지 않는 당시의 낮은 여성인권 수준[2] 때문에 룩셈부르크가 진학할 수 있는 대학은 거의 없었다. 그의 고향이던 폴란드는 물론 독일도 여성은 대학에 진학할 수 없었으며 영국, 프랑스, 스위스정도가 여성이 대학에 갈 수 있던 나라였다. 그 중 폴란드 이민자가 많던 스위스를 선택한 로자 룩셈부르크는 취리히에서 국민경제학과 공법학을 전공하였다. 그녀는 취리히에서도 사회주의운동에 활발히 참여하였는데 폴란드 혁명적 사회주의당의 기관지 <노동자문제(Sprawa Rabotnicza)>에 꾸준히 글을 기고하였고 1893년에는 폴란드왕국사회민주당의 당 대표 자격으로 취리히에서 열린 제2인터네셔널의 사회주의 노동자 대회에 참석했다.

스위스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룩셈부르크는 더 많은 공부를 하기 위해 파리로 떠났다. 당대 파리는 여러 나라의 망명자들과 지식인들이 모여 의견을 나누고 교류하는 도시로 룩셈부르크는 파리에 있을 동안 여러 망명자들과 교류하였다. 파리에 있던 룩셈부르크는 비스마르크가 반사회주의법령을 폐지하고, 독일 노동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나자 이를 구경할 것이 아니라 직접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베를린으로 향했다. 그러나 룩셈부르크는 폴란드인(러시아국적)이었기 때문에 독일 노동운동에 참여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당장 독일사회민주당에 당원이고자해도 독일 국적이 필요했다. 이 때 룩셈부르크의 동지였던 한 독일인이 자신의 아들(!)과 위장결혼을 시켜줬고 룩셈부르크는 독일 시민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 때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미 레오 요기헤스라는 리투아니아계 사회주의자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시대가 시대인지라 혁명을 위해서 위장결혼 하는거 쯤이야 신경 쓰지도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시민권을 획득한 룩셈부르크는 독일사회민주당 이론지이자 당대 사회주의 운동에서 매우 유명한 간행물 이었던 <새 시간(Neue Zeit)>에 기고하기 시작했다. 당시 <새 시대>의 편집장이 바로 카를 카우츠키였고 여기서 부터 카우츠키가와 인연이 생기게 되었다. 특히 카우츠키의 아내였던 루이제 카우츠키와는 철진한 친구였다고 한다.

그러던 와중 1905년 러시아와 러시아령 폴란드에서 총파업이 일어나자 로자 룩셈부르크는 혁명의 기운이 감돌고 있다고 느끼고 바르샤바로 향했다. 바르샤바에서 활동하던 룩셈부르크는 이내 러시아정부로 부터 독일인(...)이라는 이유로 추방당해 1906년 독일로 돌아오게 되었다. 독일로 돌아온 룩셈부르크는 독일사회민주당내 좌파로 입지를 굳히게 되었다. 그리고 사민당내 중도파와 우파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사민당내 중도파의 사상적 지도자는 카를 카우츠키였는데, 카우츠키와 룩셈부르크는 서로 대립하기는 했으나 개인적인 친분은 유지하고 서로에 대한 평가도 나쁘지 않았다. 당장 카우츠키는 룩셈부르크를 사민당 당훈련원 원장으로 보냈는데, 당훈련원은 당원에 대한 사상교육을 수행하던 상당히 중요한 기관이었다. 다만 이 관계는 서서히 나빠지게 되어 후기에 가면 개인적 친분도 단절되었다. 하지만 또 루이제 카우츠키와의 관계는 여전히 좋았기 때문에 카우츠키가와 아예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1914년이 되자 독일의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기 시작한 것이다. 사민당 내부에서는 전쟁공채에 찬성할 것인가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고 당연히 로자 룩셈부르크는 전쟁에 반대했다. 룩셈부르크는 이 전쟁을 "제국주의자들의 전쟁"으로 보았고 각국 노동자끼리 총을 겨누면 안 된다고 연설했다. 그러자 독일정부는 룩셈부르크를 반역죄로 체포했고 룩셈부르크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이 들어서자 정권에 봉기하고 사회민주주의 동지들을 배반했으나 곧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같이 보기[편집 | 원본 편집]

참고문헌[편집 | 원본 편집]

로자룩셈부르 정치저작집 룩셈부르크주의[3], 도서출판 풀무질 (서울 2002)

각주

  1. 1886년에 지도자들이 처형되거나 강제노동형에 처해짐에 따라 사실상 해체되었으나 몇몇 소규모 조직들은 살아남았고 그 중 하나가 로자 룩셈부르크가 속한 조직이었다.
  2. 최초의 여성참정권은 1893년 뉴질랜드로 알려져 있다. 즉, 그 시절에는 여성참정권을 국가적으로 보장한 국가가 단 하나도 없었다!
  3. 룩셈부르크주의는 스탈린주의 하 소련에서 비하적 용어로 사용되었지만 이내 룩셈부르크주의자들도 자신들의 사상을 룩셈부르크주의로 부르기 시작했다. 소련에서 다른 사상적 조류를 가지고 비하적으로 쓴 것 중 대표적인 것이 트로츠키주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