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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8월 26일 (토) 11:30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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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일생은 상하이의 역사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를 존경하는 사람은 없다.
— 아시아투데이 추정남 기자

두웨성(간체: 杜月笙, 정체: 杜月生, 한자음: 두월생, 1888년 8월 22일 ~ 1951년 8월 16일)은 중화민국의 범죄자, 전(前) 군인, 전 기업인으로, 중국의 거대 범죄 조직인 청방의 우두머리로 악명을 떨쳤다. 그는 '큰 귀', '아편대왕', '중국의 알 카포네'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유년 시절[편집 | 원본 편집]

1888년 8월 22일, 청나라 광서제 시절에 장쑤성 송강부 상하이 현 가오챠오 촌[1]의 고아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들은 이사를 가서 그를 낳았고, 그의 출산 후 어머니는 사망하였다. 9세 때 아버지가 죽고, 계모가 떠나고, 여동생이 노예로 팔려가자 출생지로 돌아가서 할머니와 살았다. 그는 교육이라곤 받아본 적도 없었으나 사람들에게 귀가 커다란 소년으로 유명하였다.

1902년에 상하이 프랑스 관할구역의 매점에서 과일깎이와 청소부로 취직했고, 밤만 되면 아편을 흡입하고 도박을 즐기는 부도덕한 삶을 살았다. 당시 상하이는 온갖 범죄와 유흥, 환락으로 곪아있는 부패한 도시라 그곳의 분위기에 자연스레 녹아들 수밖에 없었다. 그 후 매점에서 해고된 뒤, 매춘업소의 보디가드로 일하다가 16세의 나이에 청방에 가입하게 되었다.

출세[편집 | 원본 편집]

청방 가입 후 그는 조직 내에서 뛰어난 수완을 보였다. 그 덕에 프랑스 관할구역 청방의 우두머리이자 경찰 반장 황진롱의 밑으로 들어갔다. 잔학무도한 황진롱의 밑에서 비위를 맞춰가며 더더욱 높은 자리에 올라 마침내 황진롱의 오른팔이 되었다. 그러다가 황진롱이 자신의 오페라 극장에서 자신이 흠모하던 배우를 욕하던 군벌의 아들을 부하들을 시켜 죽도록 패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틀 후에 황진롱은 그 군벌 세력에게 납치되었으나 황진롱의 부하들은 군벌이 두려워 그저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두웨성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 사건을 기회로 삼아 보석으로 황진롱을 구출하였다. 황진롱은 감동하여 사건 이후 우두머리의 자리를 그에게 물려주었다. 청방의 새로운 우두머리가 된 그는 상하이의 아편 수송 보호를 황진롱을 납치한 군벌에게 약속받았다. 이렇게 해서 그는 상하이에서 가장 돈을 잘 버는 사업을 운영하였다. 그의 어마어마한 자금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의 설립을 주선할 정도였다.

그리고 1923년, 장제스가 이끄는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이 합세하여 군벌을 몰아내 화북 지구에서 상하이까지 도달하였지만, 장제스는 자신의 상하이 내 입지를 위협하는 공산당이 거슬려서 1927년에 암흑가의 대부로 성장해있던 두웨성과 손을 잡는다. 당시 두웨성 또한 자신의 아편 사업 독점권이 공산당원들의 승리로 위태로워지기에 장제스와 협력한 것이다.

그들의 동맹 이후 1927년 4월, 새벽 4시에 공산주의자들이 대규모 동맹 파업을 벌이자 두웨성의 지시를 받은 청방 수천 명의 조직원들이 거리로 몰려들어 백색 테러를 가했다. 5천 명이나 되는 공산주의자들이 백주대낮에 청방 측의 기관총 세례를 받아 벌집이 되고, 총검에 목이 잘려나가 수많은 머리들이 거리에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백색 테러를 저지른 공로로 두웨성은 국민당 군대의 장군의 자리에 올랐다.

장군의 자리에 오른 그는 많은 사람들의 존경심을 사로잡았으며, 글을 모르는 자신을 대신할 학자들을 고용해 자신과 가족들에 대한 책을 쓰게 하였다. 1941년에는 많은 돈을 자선단체에 기부하였고, 상공회의소의 회원이 되었으며, 5개의 은행과 대학 하나를 소유한 경영주로 성장하였다. 국민당이 세운 아편 거래 금지 위원회의 수장이 되어 국민당이 몰수한 아편을 독차지하여 거리에서 되팔기도 하였다. 나이트 클럽에 그가 들어서기만 하면 자리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하지만 상하이 범죄의 배후에는 여전히 그가 있었다. 그의 테러는 상하이 금융권을 위협했으며 그에게 대항하는 자는 온몸의 힘줄이 끊겨 집 앞에다 버려졌다. 그럼에도 국민당과 청방은 굳건한 유대 관계를 유지하였다.

몰락[편집 | 원본 편집]

1937년, 일본 제국이 이끄는 군대가 중화민국을 침공하여 중일전쟁이 발발하였다. 8월 14일, 진격을 거듭하는 일본군은 상하이를 공격하였다. 두웨성은 일본군의 침공을 막아내기 위해 조직원들을 전장에 투입하였다. 전시 체제로 탈바꿈한 청방 조직원들은 게릴라전을 펼치며 일본군에 대항하였으나, 3개월 후, 상하이마저 일본군의 손아귀에 들어가버린다.

두웨성을 비롯한 상하이의 상류층들은 일본군을 피해 화물선에 숨어 홍콩으로 피신하였다. 8년 후, 중일전쟁에서 제2차 세계 대전까지의 기나긴 전쟁이 끝난 뒤에야 그는 상하이로 돌아왔다. 그러나 상하이 사람들은 그가 자신들을 버렸단 이유로 그에게 온갖 야유를 퍼부었다. 그리고 1949년 4월, 국공내전으로 인해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이 타이완섬으로 쫒겨나고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이 승리하였다. 결국 자신의 커다란 후원자마저 잃어버린 그는 상하이를 영영 떠났다.

최후[편집 | 원본 편집]

수십 년간의 아편 중독으로 인해 건강이 안 좋아진 그는 결국 1951년 8월 16일, 홍콩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의 사후 청방은 조직명을 삼합회로 바꿨다. 국민당군 출신 거자오황이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는데, 그가 바로 오늘날까지 현존하는 삼합회 중 두 번째로 세력이 큰 14K의 설립자이다.

각주

  1. 현재의 상하이시에 해당하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