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Justify (토론 | 기여) 편집 요약 없음 |
잔글 (봇: 자동으로 텍스트 교체 (-{{건축물 정보/문화재 +{{문화재 정보/삽입용)) |
||
(사용자 4명의 중간 판 7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 |||
1번째 줄: | 1번째 줄: | ||
{{ | {{건축물 정보 | ||
| | |건물이름 = 공주 공산성 | ||
|원어이름 = | |||
| | |그림 = [[파일:공산성.JPG|150px]] | ||
|그림 = 공산성.JPG | |||
|그림설명 = 공주 공산성 | |그림설명 = 공주 공산성 | ||
| | |종류 = | ||
|주소 = [[충청남도]] [[공주시]] [[산성동]] 2번지 | |||
|소유 = | |||
|착공일 = | |||
| | |개장일 = | ||
| | |철거일 = | ||
| | |건축 = | ||
|설계 = | |||
|건설 = | |||
|양식 = | |||
|높이 = | |||
|층수 = | |||
|총면적 = | |||
|대지면적 = 371,621 m<sup>2</sup> | |||
|웹사이트 = | |||
|비고 = | |||
|하위 틀 = | |||
{{문화재 정보/삽입용 | |||
|종목 = [[사적]] 제12호 | |||
|지정일 = [[1963년]] [[1월 21일]] | |||
|해제일 = | |||
}} | |||
}} | }} | ||
==개요== | ==개요== | ||
백제가 수도를 웅진(현 [[공주시]])으로 삼았을 때 백제를 방어하는 목적으로 세워진 [[산성]]이다. [[금강]] 바로 옆의 야산과 계곡을 둘러싼 산성으로 본래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서 돌로 쌓은 석성으로 개축하였다. 이 성의 명칭은 [[백제]] 당시에는 웅진성으로, [[고려]]시대에는 공주산성, 또는 공산성, [[조선]]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리웠다. | 경주 공산성(公山城)은 백제가 수도를 웅진(현 [[공주시]])으로 삼았을 때 백제를 방어하는 목적으로 세워진 [[산성]]이다. [[금강]] 바로 옆의 야산과 계곡을 둘러싼 산성으로 본래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서 돌로 쌓은 석성으로 개축하였다. 이 성의 명칭은 [[백제]] 당시에는 웅진성으로, [[고려]]시대에는 공주산성, 또는 공산성, [[조선]]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리웠다. | ||
==특성== | ==특성== | ||
4방에 문터가 확인되는데, 남문인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가 남아있고 동문과 서문은 터만 남아있었는데, 1993년에 동문터에는 영동루 서문터에는 금서루를 복원하였다. | 4방에 문터가 확인되는데, 남문인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가 남아있고 동문과 서문은 터만 남아있었는데, 1993년에 동문터에는 영동루 서문터에는 금서루를 복원하였다. | ||
암문, 치성, 고대, 장대, 수구문 등의 방어시설이 남아 있으며, 성 안에는 쌍수정, 영은사, 연지, 임류각지, 그리고 만하루지 등이 있다. 또한 연꽃무늬 와당을 비롯하여 [[백제]] [[기와]], [[토기]] 등의 유물들과 [[고려]], [[조선]]시대의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꽤 오랜 세월 사용된 성인데다 국가의 수도 또는 지방행정의 중심지로 계속해서 자리한 곳이다 보니 성의 모습도 해당 기간만큼 뒤섞여 있는 측면이 있으며, 유물도 꽤 다양하게 나오는 편이다. | 암문, 치성, 고대, 장대, 수구문 등의 방어시설이 남아 있으며, 성 안에는 쌍수정, 영은사, 연지, 임류각지, 그리고 만하루지 등이 있다. 또한 연꽃무늬 와당을 비롯하여 [[백제]] [[기와]], [[토기]] 등의 유물들과 [[고려]], [[조선]]시대의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꽤 오랜 세월 사용된 성인데다 국가의 수도 또는 지방행정의 중심지로 계속해서 자리한 곳이다 보니 성의 모습도 해당 기간만큼 뒤섞여 있는 측면이 있으며, 유물도 꽤 다양하게 나오는 편이다. | ||
==이야깃거리== | ==이야깃거리== | ||
*백제의 사비성 함락 당시 [[의자왕]]이 잠시 머물렀던 적이 있으며, 이후 백제가 멸망한 뒤 [[백제부흥운동]]의 중심 거점이기도 하였었다. | *백제의 [[부소산성|사비성]] 함락 당시 [[의자왕]]이 잠시 머물렀던 적이 있으며, 이후 백제가 멸망한 뒤 [[백제부흥운동]]의 중심 거점이기도 하였었다. | ||
*백제 멸망 이후 세월이 한참 지난 뒤 [[통일신라]]시대인 [[822년]]에는 [[김헌창의 난]]에서 김헌창의 거점으로 사용되었었다. | *백제 멸망 이후 세월이 한참 지난 뒤 [[통일신라]]시대인 [[822년]]에는 [[김헌창의 난]]에서 김헌창의 거점으로 사용되었었다. | ||
*[[조선]]시대 [[이괄의 난]] 당시 [[인조]]가 이곳으로 피난 왔었다. | *[[조선]]시대 [[이괄의 난]] 당시 [[인조]]가 이곳으로 피난 왔었다. |
2022년 4월 6일 (수) 01:32 기준 최신판
공주 공산성 | |
---|---|
공주 공산성 |
|
건축물 정보 | |
주소 | 충청남도 공주시 산성동 2번지 |
대지면적 | 371,621 m2 |
문화재 정보 | |
종목 | 사적 제12호 |
지정일 | 1963년 1월 21일 |
개요[편집 | 원본 편집]
경주 공산성(公山城)은 백제가 수도를 웅진(현 공주시)으로 삼았을 때 백제를 방어하는 목적으로 세워진 산성이다. 금강 바로 옆의 야산과 계곡을 둘러싼 산성으로 본래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서 돌로 쌓은 석성으로 개축하였다. 이 성의 명칭은 백제 당시에는 웅진성으로, 고려시대에는 공주산성, 또는 공산성, 조선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리웠다.
특성[편집 | 원본 편집]
4방에 문터가 확인되는데, 남문인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가 남아있고 동문과 서문은 터만 남아있었는데, 1993년에 동문터에는 영동루 서문터에는 금서루를 복원하였다.
암문, 치성, 고대, 장대, 수구문 등의 방어시설이 남아 있으며, 성 안에는 쌍수정, 영은사, 연지, 임류각지, 그리고 만하루지 등이 있다. 또한 연꽃무늬 와당을 비롯하여 백제 기와, 토기 등의 유물들과 고려, 조선시대의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꽤 오랜 세월 사용된 성인데다 국가의 수도 또는 지방행정의 중심지로 계속해서 자리한 곳이다 보니 성의 모습도 해당 기간만큼 뒤섞여 있는 측면이 있으며, 유물도 꽤 다양하게 나오는 편이다.
이야깃거리[편집 | 원본 편집]
- 백제의 사비성 함락 당시 의자왕이 잠시 머물렀던 적이 있으며, 이후 백제가 멸망한 뒤 백제부흥운동의 중심 거점이기도 하였었다.
- 백제 멸망 이후 세월이 한참 지난 뒤 통일신라시대인 822년에는 김헌창의 난에서 김헌창의 거점으로 사용되었었다.
- 조선시대 이괄의 난 당시 인조가 이곳으로 피난 왔었다.
- 2011년 10월 공주대박물관이 공산성 내부 저수조를 발굴하다 가죽제 찰갑을 발굴했다. 이 갑옷에는 "정관 19년"(貞觀十九年)이라는 글자가 뚜렷하게 남아있으며 이외에 식별이 가능한 글자 20여자와 갑옷 뒷면에 제작자가 한 것으로 추정되는 낙서가 발견되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