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사로: 두 판 사이의 차이

편집 요약 없음
67번째 줄: 67번째 줄:
또 박물학자인 [[조르주 그로슬리에]](George Groslier)를 후원하여, 캄보디아 지역의 문화와 예술을 보전하는 데 크게 공헌하고, 지금의 [[캄보디아 국립 박물관]]의 설계와 건설에 총독부 예산까지 배정하는 등의 성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사로의 개혁 결과 인도차이나 지역의 문맹률은 획기적으로 감소하고, 총독부에 고용된 현지 엘리트들은 프랑스 식민당국에 충성을 아끼지 않아, 당분간 식민지 정국은 안정될 수 있었다. 카요 내각이 의도한 그대로였다.
또 박물학자인 [[조르주 그로슬리에]](George Groslier)를 후원하여, 캄보디아 지역의 문화와 예술을 보전하는 데 크게 공헌하고, 지금의 [[캄보디아 국립 박물관]]의 설계와 건설에 총독부 예산까지 배정하는 등의 성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사로의 개혁 결과 인도차이나 지역의 문맹률은 획기적으로 감소하고, 총독부에 고용된 현지 엘리트들은 프랑스 식민당국에 충성을 아끼지 않아, 당분간 식민지 정국은 안정될 수 있었다. 카요 내각이 의도한 그대로였다.


하지만 이런 사로의 개혁은 어디까지나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에 따른 사고에 근거한 것으로, 사로는 식민지인들의 사고방식이나 관습, 제도 등이 프랑스화되기 이전까지는 개화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개화되기 전까지 프랑스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그리고 1912년, 안남의 고등 판무관<ref>한자로는 중기흠사(中圻欽使)라고 불림</ref>이었던 조르주 마에(Georges Mahé)의 사원 및 황릉 도굴 사건의 처리에서 드러났는데, 사로는 마에의 폭주를 제지하면서도, 자신의 훈령을 어긴 마에에게 제대로 된 처분을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사로의 개혁은 어디까지나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에 따른 사고에 근거한 것으로, 사로는 식민지인들의 사고방식이나 관습, 제도 등이 프랑스화되기 이전까지는 개화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개화되기 전까지 프랑스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그리고 1912년, 안남의 고등 판무관<ref>한자로는 중기흠사(中圻欽使)라고 불림</ref>이었던 조르주 마에(Georges Mahé)의 사원 및 황릉 도굴 사건의 처리에서 드러났는데, 사로는 마에의 폭주를 제지하면서도 자신의 훈령을 어긴 마에에게 제대로 된 처분이나 견책을 내리지 않았다.


=== 전간기 거물 정치인으로서 ===
=== 전간기 거물 정치인으로서 ===

2022년 2월 7일 (월) 17:09 판

알베르-피에르 사로
Albert-Pierre Sarraut
파일:Premier Albert Sarraut.jpg
인물 정보
출생 1872년 7월 28일
프랑스 누벨아키텐 주, 지롱드 현
보르도 시
사망 1962년 11월 26일 (89세)
프랑스 파리
국적 프랑스
정당 급진당

알베르 사로(Albert Sarraut)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과 두 차례 총리직을 역임한 프랑스의 정치인이자 관료, 변호사, 기자이다.

생애

초창기

알베르 사로는 1872년 보르도에서 지역 언론사 사주인 오메르 사로(Omer Sarraut)의 아들로 태어나, 툴루즈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졸업한 후로 얼마간 기자 생활을 하다가, 보르도 지역의 급진당 간부였던 아버지의 영향력과 더불어, 드레퓌스 사건불랑제 위기로 인해 발효된 1901년 결사법의 혜택에 힘입어 오드 지역의 하원의원으로 당선된다.

정계 초기

그렇게 하원의원이 된 사로는 1905년에 급진당 중앙집행위원회의 위원으로 발탁되었으며, 에밀 콩브 내각이 발의한 1905년 정교분리법의 찬성측 일원으로서 활동한다. 그리고 이듬해 1906년 7월 13일, 드레퓌스 사건의 당사자인 알프레트 드레퓌스 대위와, 조르주 피카르 중령의 복권에 대한 투표가 하원에 부의되었을 때, 사로는 당시 드레퓌스를 무고했던 오귀스트 메르시에의 일파였던 폴 푸글리시-콩티 의원에게 일방적으로 결투를 선언당했고, 콩티의 칼이 사로의 폐부를 찌른 바람에 사로는 6주 동안 입원해 있어야 했다.

1907년 랑그도크 포도주 위기에서

1907년 랑크도크 포도주 위기가 일어날 당시, 사로는 조르주 클레망소 내각에서 내무부 차관으로 입각해 있었는데, 프랑스 남부 출신이었던 덕분에 사로는 당시 시위를 일으킨 랑그도크를 비롯한 남부 양조업자들의 비참한 상황과 그 정당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사로는 시위의 주동자였던 마셀린 알베르와, 사실상 알베르가 이끄는 아르젤리에 위원회(Comité d'Argeliers)와의 협상을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총리였던 클레망소는 사로의 협상 제안을 "내가 남부 놈들을 잘 아는데, 결국 놀자판으로 끝나기 마련이라고!"(Je connais le Midi, tout ça finira par un banquet!)라는 비웃음 섞인 농담과 함께 거부했고, 6월 10일까지 사태가 가라앉길 기다렸으나 결국 사태는 곧 전국을 휩쓸 정도로 격화되고 말았다.

그리고 6월 11일, 뒤늦게서야 클레망소는 사로를 매개로 삼아, 저명한 사회주의자이자 아르젤리에 위원회와 끈이 닿아 있던 나르본 시장 에르네스트 페룰하고의 협상을 시도했으나, 이미 전날인 10일에 클레망소 내각에 대한 항의표시로 시장직을 사임한 페룰은 "우리 뒤에 있는 300만 명은 협상하지 않을 거요."(Quand on a trois millions d'hommes derrière soi, on ne négocie pas.)란 말과 함께 거부했다.

결국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격화된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 클레망소는 6월 17일 남부 지역에 군대를 내려보내 무자비하게 진압한 뒤, 내무차관인 사로에게 국가헌병대를 동원하여 시위 참가자들을 모조리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리나, 사로는 이를 거부하고는 내무차관직을 사임하기에 이른다.

인도차이나 총독으로서

그렇게 내무부 차관 자리에서 사임하고, 사로는 공화사회당아리스티드 브리앙 내각에 전쟁부 차관으로 입각한 뒤, 1910년까지 재직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인 1911년 11월에 사로는 인도차이나 총독으로 발령받게 되는데, 이는 당시 조제프 카요 내각에서 인도차이나 지역의 무장봉기 가능성에 대한 염려로 행한 인사로, 당시 정부가 폴란드계 안토니 클로부코우스키 총독 이후로 제대로 된 총독 임명을 하지 않아 총독 대리들이 난무하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지역에서 오래간만에 떨어진 정식 총독 임명이었다.

그리고 사로는 왜 자신이 인도차이나 지역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는지 이해하고 있었고, 임지에 도착하자마자 유신제를 예방함으로서 식민지인을 존중하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실질적인 초대 총독이었던 폴 두메르의 강압적 식민통치 노선을 온건화하는 작업에 들어갔는데, 먼저 기초 교육을 널리 확대하여, 많은 식민지인들에게 교육의 혜택을 받게 하고, 베트남어의 새로운 표기법(쯔꾸옥응으)을 제정하고 널리 보급하면서 문맹률을 줄이는 데 힘썼다. 그리고 그전까지는 프랑스인 파견 관료들이 독점하고 있던 총독부의 관직의 문호 역시 개방하여, 베트남 현지 관료도 총독부 고위 관료로 출세할 수 있도록 제도에 손을 보았다.

또 박물학자인 조르주 그로슬리에(George Groslier)를 후원하여, 캄보디아 지역의 문화와 예술을 보전하는 데 크게 공헌하고, 지금의 캄보디아 국립 박물관의 설계와 건설에 총독부 예산까지 배정하는 등의 성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사로의 개혁 결과 인도차이나 지역의 문맹률은 획기적으로 감소하고, 총독부에 고용된 현지 엘리트들은 프랑스 식민당국에 충성을 아끼지 않아, 당분간 식민지 정국은 안정될 수 있었다. 카요 내각이 의도한 그대로였다.

하지만 이런 사로의 개혁은 어디까지나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에 따른 사고에 근거한 것으로, 사로는 식민지인들의 사고방식이나 관습, 제도 등이 프랑스화되기 이전까지는 개화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개화되기 전까지 프랑스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그리고 1912년, 안남의 고등 판무관[1]이었던 조르주 마에(Georges Mahé)의 사원 및 황릉 도굴 사건의 처리에서 드러났는데, 사로는 마에의 폭주를 제지하면서도 자신의 훈령을 어긴 마에에게 제대로 된 처분이나 견책을 내리지 않았다.

전간기 거물 정치인으로서

국민혁명 합류

말년

각주

  1. 한자로는 중기흠사(中圻欽使)라고 불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