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

종묘
종묘.jpg
건축물 정보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57 (훈정동)
소유 국유
대지면적 200,545 m2
문화재 정보
종목 사적 제125호
지정일 1963년 1월 18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훈정동 1-2번지에 위치한 조선 시대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를 모신 왕실의 사당. 1995년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흔히들 종묘 정전을 세계 최대의 단일 목조건축물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종묘는 동시대의 단일 목조건축물 중 최대이다.[1] 세계 최대는 일본의 절인 도다이지이다.[2]

유교 교리에 따라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사당이니만큼 건축 양식도 유교 양식을 충실하게 따라서 이 엄청난 규모에도 화려함 없이 검소하게 지어서 자연스러운 느낌과 경건한 마음이 들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현대의 종묘 관리도 굉장히 경건한 마음으로 행하고 있으며 따라서 들어가보면 신비로운 느낌마저 든다. 어느 정도냐 하면 평소에 침을 찍찍 뱉던 사람도 침을 그냥 삼키게 되고 발걸음을 조심하게 될 정도.

종묘의 신성한 분위기를 진짜로 제대로 느끼고 싶으면 안개가 껴있거나 안개비가 내리는 조용한 새벽에 가는 것을 추천한다. 새벽에 안개가 낀 상태에서 종묘 외대문의 매표소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새벽부터 와서 표를 사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일본인들이 맞이한다.

참고로 이상하게 일본인들이 유독 한국인보다 종묘에 많이 오는 경향이 있는데(...) 일본 관광객들이 일본의 지역별 신사를 방문하고 가는 데 익숙해져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한국 최대 규모의 신사[3]라고 할 수 있는 종묘에 많이 모이는 게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닐 것이다.

여담으로 사극같은 곳에서 종묘사직을 지키라는 얘기를 하는 경우가 간혹 있는데 거기서 말하는 종묘가 바로 이 종묘이며 사직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유교 문화권 왕조의 정신적 두 축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외대문[편집 | 원본 편집]

종묘의 정문으로 남쪽 방향으로 난 문이다. 정면 세 칸의 평삼문(平三門)으로 되어있다. 본래 정문은 원래 앞쪽 가운데에 있는 계단으로 들어서게 되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도로를 내면서 도로의 포장면이 높아지면서 이 계단은 땅 속에 묻혀버리고 현재는 장대석 기단만 노출되어 있다. 이 외대문은 세칸짜리 문이라 하여 외삼문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인근의 궁궐의 정문들과 비교하면 상당히 소박한(?) 형태이다. 다만 이 종묘의 시설이 시설인지라 정문 바로 바깥쪽에는 말에서 내리라는 하마비(下馬碑)가 있으며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된 어정(御井)이 자리하고 있다.

신로(神路)와 어로(御路)[편집 | 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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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표소에서 관람권을 끊고 외대문을 통해 들어가면 돌아가신 선왕의 혼령이 걷는 길인 신로(神路)와 왕이 걷는 길인 어로(御路)가 있는데 원래 경복궁에서는 어로가 가장 높게 위치하지만 여기 종묘에서는 길이 2단 계단처럼 되어서 가장 높은 길이 신로이고 2번째로 높은 길이 어로이다. 이 신로는 왕도 함부로 밟아서는 안되었으며어느 미친 왕이 선왕에게 노여움사서 천벌받으려고 신로를 밟을까암묵의 룰은 현재에도 이어져 신로에는 위 사진과 같이 신로를 밟지 말라고 한국어는 물론 일본어로도 표기된 표지판이 놓여져 있고 현장학습 나온 철없는 꼬맹이들이 아무 생각없이 신로 위로 걸어다니면 교사가 못하게 막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신로 옆의 어로를 걸으면서 안개가 낀 종묘로 가는 길로 쭉 뻗은 신로를 보면 신비로운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여담이지만 신로, 어로를 신도(神道), 어도(御道)로 표기하는 경우가 있는데 틀린 표기라고 한다. 도(道)는 추상적인 길을 뜻하고 로(路)는 구체적인 개념의 길을 말하기 때문.[4]


망묘루[편집 | 원본 편집]

공민왕 신당[편집 | 원본 편집]

망묘루 동쪽에 있는 작은 별당으로 고려의 31대왕 공민왕을 위하여 종묘 창건시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이하게도 신당 내부에는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가 한 자리에 있는 영정[5]과 공민왕이 친히 그렸다고 전해지는 대렵도풍의 준마도가 함께 봉안되어 있다.[6] 조선왕조의 제사 시설물인 종묘에 뜬금없이 고려의 왕, 그것도 마지막 왕도 아닌 공민왕이 종묘에 봉안된 정확한 이유는 밝혀져 있지 않으나 태조 이성계와 공민왕이 동시기 인물이고, 조선왕조의 경우 우왕창왕은 신돈의 자식으로 본데다 공양왕은 유배 후 살해를 해 버렸기 때문에 사실상의 정통성이 있는 마지막 고려왕조의 국왕으로 본 것이거거나 원의 영향력을 축출하고 자주성을 높이려고 하였던 공민왕의 시도에 대한 조선왕조의 평가였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참고로 신당의 정식 명칭은 '고려 공민왕 영정 봉안지당(高麗 恭愍王 影幀 奉安之堂)'이다.

형대청[편집 | 원본 편집]

재궁[편집 | 원본 편집]

공신당[편집 | 원본 편집]

칠사당[편집 | 원본 편집]

정전[편집 | 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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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정전을 옆에서 본 모습.

비록 상술했듯이 종묘 정전은 세계 최대의 단일 목조건물은 아니지만 그래도 동시대 세계 최대의 단일 목조건물인 것은 변함이 없다. 맨 위의 사진만 보아도 이미 충분히 거대하지만 실제로 가 보면 그냥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웅장하다. 실제로 가 보면 그 엄청난 규모에 압도당하는데 전체 전각의 길이가 101m에 육박하기 때문에 천벌받을 각오하고 저 복도에서 100m 달리기를 하는 것이 가능할 정도.

너무 거대한지라 어지간한 전문가용 렌즈로도 정전의 전체 모습 촬영이 불가능하다. 건물 길이가 너무 긴 것도 있지만 시야를 확보하기 위한 거리가 내삼문까지로 한정되어 있어서 그런 것. 위의 사진처럼 건물 전체가 나와 있는 사진용자은 따로 찍어서 이어 붙인 것이다.

저 정전 앞에 펼쳐진 단도 진짜 넓은데 자세히 보면 중앙이 살짝 볼록하게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비가 내렸을 때 빨리 배출하기 위해서인데 맨 위의 사진을 보면 오른쪽 부분에 배수구(?) 비슷한 게 존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원래는 11칸의 건물이었다. 그런데 영조 때 왕이 계속 죽으면서 신주가 계속 늘어서(...) 종묘가 꽉 차게 되는 바람에 4칸을 증축면서 15칸으로 늘게 되었고 이후 헌종 때 또 꽉 차서 또 4칸을 증축하면서 19칸이라는 미친 건물이 되었다.[7] 이렇게 건물을 증축하는 방식은 우리나라 건축 양식 중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특이한 방식이다. 종묘의 정전의 기둥들을 잘 보면 기둥마다 오래된 정도가 다른데 서쪽이 새로 지은 건물들이다.

수복방[편집 | 원본 편집]

정전 악공청[편집 | 원본 편집]

전사청[편집 | 원본 편집]

제정[편집 | 원본 편집]

영녕전[편집 | 원본 편집]

종묘 영녕전
건축물 정보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57, 종묘내부 (훈정동)
소유 국유
문화재 정보
종목 보물 제821호
지정일 1985년 1월 8일

정전의 북서쪽에 자리한 건물로 왕조가 설립된 이후 시간이 흐르고 죽은 왕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건물을 늘리거나 새로 지어야 할 필요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입주자가 너무 많아질 것에 대비하여 지은 전각이다. 정전을 무한정 길게 증축할 수도 있는데. 영녕전은 세종 3년(1421년) 정종(당시 공정왕)의 신주를 종묘에 모실 때 정전의 전각이 부족하여 지은 것으로 나라 창업한지 몇 년이나 지났다고 벌써 모자라? 처음에는 6칸짜리 건물이었으나 이쪽에다가 모시는 왕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여러 차례 확장공사를 거듭하여 현종 2년에 현재의 규모인 16칸짜리 건물로 변모하게 되었다.

본래. 역대 국왕의 신위는 창업주인 태조와 현직 국왕의 4대조, 불천위(不遷位)에 해당하는 생전 업적이 뛰어난 국왕과 왕비들의 신위는 정전에, 정전에서 옮겨진 국왕과 왕비, 새로이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위는 영녕전에 모시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국왕들은 불천위로 간주되어 정전에 모셔지고 영녕전에는 태조의 4대조와 추존왕, 그리고 후사가 없어 왕위를 잇지 못한 왕들이 주로 정전에서 옮겨져 모셔졌다. 영녕전에 모셔진 대표적인 왕들로 정종, 문종, 단종, 인종, 명종, 경종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자식이 없어 대를 잇지 못한 죄를 지은 왕위를 잇지 못한 왕들이다.

현재 영녕전에는 16실에 34명의 왕과 왕비의 신주가 봉안되어 있다. 가운데 4개의 방을 양쪽 옆에 딸린 방들보다 높게 꾸미고, 각 방에 태조의 4대조까지의 추존왕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와 왕비들의 신주를 봉안하여으며. 서쪽 5번째 방부터 16번째 방까지 각각 정종과 왕비, 문종과 왕비, 단종과 왕비, 덕종과 왕비, 예종과 왕비, 인종과 왕비, 명종과 왕비, 원종과 왕비, 경종과 왕비, 진종과 왕비, 장조와 왕비, 의민황태자(영친왕)와 태자비의 신주가 봉안되어 있다.

우연이겠지만 종묘의 정전과 영녕전은 마지막 왕인 의민황태자(영친왕)가 봉안되면서 빈 곳이 없게 되었다. 우연치고는 기묘한 상황.

영녕전 악공청[편집 | 원본 편집]

종묘 관람[편집 | 원본 편집]

한동안 종묘는 창경궁과 육교로 연결되어 있어서 창경궁을 관람하면서 자연스럽게 종묘까지 자유관람할 수 있는 코스가 있었으나 2010년 5월 10일부로 폐쇄되면서 정문인 외대문(외삼문)으로만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시간제 관람[편집 | 원본 편집]

기본적인 종묘 관람은 시간제 관람이 원칙이다. 1회 최대 300명까지 관람이 가능하며 문화재청의 종묘관리소 홈페이지에서 관람예약을 하거나 현장에서 관람권을 구매해야 한다. 참고로 예약 후 별도의 연락없이 입장시간 10분 전까지 표를 사지 않을 경우에는 관람예약은 자동 취소된다 참고로 홈페이지로 예약했을 경우 매표소에서 예약확인서를 제출해야 한다. 또한 외국어 안내 시간에는 외국인을 동반하지 않은 내국인은 입장이 불가능하다. 관람 시간은 대략 1시간 내외로 소요된다.

자유 관람[편집 | 원본 편집]

매주 토요일 및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은 별도의 예약 없이 자유관람이 가능한 날이다.

같이 보기[편집 | 원본 편집]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