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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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宙一. 호는 해동(海東). 대한민국독립운동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75년 9월 22일 경상도 청도군 이위면 소진동(현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오진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31세 때 일본 규슈 구마모토에 유학가서 어학을 6개월 배웠고, 도쿄 연수학관에서 수학을 3~4개월간 공부하다가 귀국했다. 이후 평안북도 백마군 옥천학교(玉川學校)에서 교사로 근무하다가 다시 도쿄로 유학가서 세이소쿠 예비학교(正則豫備學校)를 졸업한 뒤 1년 만에 귀국했다.

1908년 달성 친목회를 조직한 그는 경북 예안의 사립학교, 경남 구포의 구명학교(龜明學校) 등을 거처 대구 협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또한 우현서루에 달성 친목회 부설 강유원(講遊園)을 개설하고 신학문을 지도하는 등 인재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친목회 회원인 서상일과 교류하면서 서상일이 경영하던 태궁상회(太弓商會)의 점원이 되었다.

1915년 음력 1월 15일, 그는 대구 안일암에서 시회(詩會)라는 명목으로 윤상태(尹相泰)·서상일·이시영 등과 함께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朝鮮國權恢復團中央總部)라는 비밀결사를 만들고 기밀부장(機密部長)으로서 활동했다. 또한 광복회에도 관여하여 1916년 8월 대구 권총 사건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었고, 1917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5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출옥 후 대구에 명신학교(明新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을 취임하여 학생들에게 조국광복의 기수가 될 것을 역설하고, 광복회(光復會)·의용민족대동단(義勇民族大同團) 등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각 민족단체의 지도자들과 계속적인 연락을 취하였다.

1919년 3월 3.1 운동이 전국 각지로 확산되자, 그는 서울의 이갑성과 연락을 취하면서 김태련(金兌鍊)·이만집 등의 동지와 함께 대구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했다. 그러나 3월 3일 일제의 예비검속 때 체포되어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면소 방면되었다.[1]

출옥 후 김영서(金英瑞)·정운기(鄭雲騏) 등과 함께 대구에서 교남학교를 설립하고, 교육을 통하여 항일사상을 고취하다가 일본 경찰의 강권 발동으로 교직을 박탈당했다. 1927년 8월 1일 대구에서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홍주일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2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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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