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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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淳完. 창씨명은 카하라 준칸(香原淳完).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1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1 생애[편집]

1925년 3월 7일 전라북도 군산부 개복정에서 개신교 목사의 7남으로 출생했다. 보통학교 졸업 후 1941년 3월 일본 도쿄로 건너가 신전구 소재 사립 창평중학교 야간부에 입학해 우유배달부 또는 날품팔이 노동자로 일하며 학비를 벌며 공부했다. 1943년 12월 10일경, 하숙집인 도쿄 중야구 궁원정통 4정복 6번지에서 우연히 만난 친구 밀산창숙(密山昌淑)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선일체는 말뿐이고 오늘날과 같이 일본인이 우리들 조선인을 차별하고 압박하는 한 이러한 이상은 절대 구현될 수 없다. 조선은 일본으로부터 벗어나 독립하지 않는 한 영원히 이 압박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므로 우리들 청년은 조선독립을 위해 활약하지 않으면 안 된다.

1944년 1월 17일 서원진조의 하숙집인 도쿄 대삼구 봉래장에서 서원진조와 만나 내선관계에 대해 논의했다. 서원진조가 "독일군은 최근 패퇴를 계속하고 있으므로 끝내 패전할 것이다. 그리고 독일이 패전하면 일본 또한 패배할 것이다."라고 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독일이 패전하면 소련은 일러전쟁 당시의 한도 있어서 반드시 일본에게 도전해 올 것이니, 일본 패전은 필연적인 것이다. 일본 패전은 조선 독립의 호기이므로 우리들은 조선 독립을 위해 매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

1944년 3월 3년 수료 후 조선으로 돌아와 함경북도 종성군 주을읍 소재 삼정주식회사에 근무 중인 친형의 의뢰로 공장 인부로 일했다. 1944년 7월경 함북 종성군 주을읍 삼정주식회사 주을공장에서 일하던 중 밀산창숙으로부터 곧 징병되는 것에 극도로 비관하고 있다는 통신을 접하자, 다음과 같은 답신을 보냈다.

입영은 자네만 하는 것이 아니고 나도 내년에는 입영한다. 입영은 조선독립운동에 몸을 바쳐 일할 우리들 조선인 청년에게 주어진 시련이라고 생각하면 조금도 비관할 것이 아니다.

이후 친형이 직장이 옮기자 1944년 10월 퇴직 후 군산부에서 무직으로 지냈다. 1945년 2월 19일 징병검사를 받은 결과 을종(乙種)에 합격했다. 입영 전인 2월 15일, 익산군 이리읍 서정 230번지에 거주하던 금본건정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최근 전국의 양상은 일본 측이 불리하여 일본의 패전은 결정적인데, 일본의 패전은 조선독립의 좋은 기회이므로 우리들 청년은 독립운동에 매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네는 배우지 못하였으니 이제부터 공부를 하여 지식을 넓혀라.

그러나 곧 일본 경찰에게 모든 사실이 발각되면서 체포되었고, 1945년 7월 28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1] 이후 옥고를 치르다 8.15 광복으로 석방되었고, 서울에 거주하다 6.25 전쟁 중 실종되었다. 1955년 6월 28일 사망처리되었다.

2 사후[편집]

2008년, 국가보훈처는 홍순완의 이름과 혐의, 징역형이 선고된 법원 판결문을 발견했다. 이후 후손을 찾기 위해 3년간 추적한 끝에 홍순완의 조카 홍성표 씨를 찾아냈고, 4년 후인 201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2] 하지만 실종 상태여서 유해를 찾을 수 없었기에, 2016년 12월 7일 국립서울현충원에 그의 위패를 세웠다.

3 외부 링크[편집]

4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