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하연

韓何然(또는 韓河鉉). 이명은 한하원(韓河源).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03년 12월 18일 경상남도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6년 3월 함경남도 원산에서 조종구(趙鍾九)와 함께 동지를 규합하여 원산청년회(元山靑年會)를 결성하고 이향(李鄕)·조시원·유우석(柳愚錫) 등과 함께 대중적 청년단체인 원산청년회를 중심으로 아나키즘 비밀결사인 본능아연맹(本能兒聯盟)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27년 4월 23일 원산청년회에서 활동하다가 사회주의계열 청년들의 습격을 받고 격투 끝에 서로 사상자가 발생했고, 이 일로 경찰에 체포되어 함흥지방법원에서 상해치사혐의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은 뒤 경성복심법원에서 원심대로 판결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28년 7월 27일 고등법원에서 정당방위가 인정되어 무죄를 언도받고 출옥하였다.

그후 그는 1928년 일본으로 건너가 흑풍회(黑風會)를 강화하여 흑우연명(黑友聯盟)으로 발전시키면서 원심창·장상중(張祥重)·정태성(鄭泰成) 등과 함께 기관지로 《호조운동(互助運動)》을 발행하며 무정부주의 선전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1929년 2월 귀국한 그는 경남 마산에서 김산(金山) 목사와 함께 소비조합운동을 전개하였다.

1933년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를 처단하려던 이강훈, 백정기 등이 경찰에 체포되어 일본으로 압송되자 이들에 대한 규명운동을 전개하면서 홍성환을 파견하여 위문하는 등의 지원을 하였다. 이후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은거하던 그는 8.15 광복 후인 1946년 아나키즘 정당인 독립노농당(獨立勞農黨) 기획부장으로 참여했다. 이후 1960년 3월 26일 부산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한하연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4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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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