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환 (1905년)

洪性煥.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1 생애[편집]

1905년 10월 16일 함경남도 북청군 북청읍 신포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5년 12월 30일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겨울방학으로 고향에 내려와 신사상을 보급할 목적으로 자각단(自覺團)을 조직할 것을 계획하고, 1926년 1월 1일 자각단의 목적·임원·회비 기타 규칙을 정하고, 홍성륵(洪性玏) 외 청년 30여 명을 단원으로 가입시켰다.

그 후 서울로 돌아와 2월 중순경, 경성청년회원 김영(金瑩)에게 자각단의 선언서 및 강령을 기초하게 하였다. 20일경에 경성청년회관에서 상무집행위원 김유선(金有善)에게 등사판을 빌려 선언서 40여 매를 인쇄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3월 23일경, 고향으로 돌아가 홍성일(洪性日) 등 자각단원에게 배포하고, 자각단의 목적을 위해 활동하다가 4월에 체포되어 징역 10월을 받고, 1927년 7월 16일에 출소하였다.

1927년 11월 26일에 열린 홍원청년연맹 용천지부 설치대회에서 집행위원장에 선임되어 12월 22일 제1회 월례회를 주관하여 만주동포 축출 대책 문제 등을 논의하였다. 한편 신간회 홍원지회 간사로 활동하여 1927년 12월 30일 제1차년도 제5회 간사회에 참석하여 부서의 분담과 기타 결의사항을 논의하였다.

1928년 1월 12일 홍원청년연맹 용천지부 제2회 집행위원회를 주관하며 순회강연을 하고 2월 21일 적극적인 정치투쟁으로 운동방향을 전환하기 위해 용천 제2지부가 결성대회에 참석했다. 3월 2일 홍원청년연맹 순회강연단을 맞아 담화 중 용천면 용호야학회(龍湖夜學會) 운영과 관련하여 경찰서로 압송되어 1928년 4월 6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른 후 1929년 4월 5일 출소하였다.

1932년 이후 홍성환은 일본 동경에서 흑우연맹(黑友連盟)과 동흥노동연맹(東興勞働同盟)에 소속되어 <자유코뮨>을 발행하였다. 한편 주중 일본공사 아리요시(有吉) 암살 미수사건의 주동자인 백정기·원심창·이강훈이 일본으로 압송되자 아나키즘 조직인 동흥노동동맹의 일원으로 동지 양일룡(梁一龍)·최학주(崔學柱), 흑기노동조합(黑旗勞働組合) 조합원 정찬진과 함께 1933년 7월 상순경부터 이들을 구원할 방법을 강구하였지만 끝내 구하지 못했다.

1934년 7월 24일 재동경 무정부주의 계통 흑우연맹의 간부로서 다른 단체장과 함께 남한지방 수해 구원 활동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1936년 3월경, 일본무정부공산당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 서울에서 조용히 지내다 1973년 8월 14일에 사망했다.

홍성환의 독립운동 행적은 해당 기록이 오랫동안 발견되지 않아 묻혀져 있었다. 그러다 2008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결과 그의 독립운동 행적이 밝혀졌다.[1] 이에 따라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고, 2009년 그의 유해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2 외부 링크[편집]

3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