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가이거

Johannes Wilhelm "Hans" Geiger
요하네스 빌헬름 한스 가이거
Hans geiger.jpg
이름 한스 가이거
출생 1882.09.30, 독일제국 노이슈타트
사망 1945.09.24(향년 62세), 독일 포츠담
국적 독일
연구분야 물리학
지도교수 어니스트 러더퍼드
제자 왈터 뮬러

한스 가이거는 가이거 계수기를 만들어낸 것으로 유명한 독일의 물리학자이다.

상세[편집 | 원본 편집]

1882년에 엘랑겐 대학 교수 빌헬름 가이거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902년에 엘랑겐 대학에서 물리학과 수학으로 학위를 받았다. 이후 영국의 멘체스터 대학에서 아서 슈체스터(Arthur Schuster)의 지도를 받다가 1907년에 그가 은퇴하자 어니스트 러더퍼드에게 지도를 받았다. 1911년에 존 미첼 누탈과 함께 방서선 붕괴에 관련된 가이거-누탈 법칙(Geiger–Nuttall law)을 발표하였다. 1912년에 독일로 돌아와 베를린의 독일국가과학기술원(German National Institute of Science and Technology)에서 왈터 보세, 제임스 채드윅과 함께 근무하였으나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가이거가 포병장교로 복무하는 1914년부터 1918년 동안 중단되었다.[1] 1924년에는 그의 실험장비로 콤프턴 산란을 확인하여 아서 콤프턴이 노벨상을 수여받는 것을 도왔다. 1928년부터 킬 대학의 교수직을 맡았으며 1928년에 그의 제자 왈터 뮬러와 함께 가이거-뮬러 계수기를 개발하여 기존에 알파 입자만 검출할 수 있던 가이거 계수기가 베타입자와 감마선까지 검출할 수 있도록 계량하였다. 1939년에 핵분열이 발견된 이후 독일의 핵개발 연구팀 우라늄 클럽에 참여하게 된다. 이후 베를린에 머물렀고 베를린 전투와 이후 소련의 점령 기간동안 살아남았고 2달 뒤에 포츠담으로 이사가서 1945년 9월 24일에 62세의 나이로 죽었다.

기타[편집 | 원본 편집]

  • 어느정도 반나치적 행보를 보이기는 했지만 그의 동료인 한스 베테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추방당할 때는 딱히 그를 지지하지 않았다.
  • 주변 인물들은 여럿이 노벨상을 받았는데 정작 본인은 못받았다. 그의 동료인 한스 베테도 1967년에 항성의 핵융합에 대한 연구로 노벨상을 수여받았다.
  1. 앞서 언급된 3명중 가이거 혼자 노벨상을 못받았다. 채드윅은 1935년에 중성자를 발겨한 공로로, 보세는 1954년에 막스 보른과 함께 수상했다. 그리고 가이거가 포병장교로 복무하는 동안 채드윅은 영국인이라는 이유로 수용소로 끌려갔었고 보세는 기병으로 복무하던 도중 러시아군에게 포로로 잡혀서 1920년에나 풀려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