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도해전

배경[편집 | 원본 편집]

청일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해전으로 전쟁 직전 청나라일본은 서로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병력을 상륙중이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한반도에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양측 모두 병력과 보급을 해상을 통해 수송해야만 하는 상황이었고. 그것도 가능한 한양 인근이나 전장 인근으로 병력을 상륙시키는 것이 시간상으로 가장 유리한 상황이었다. 청의 경우 그나마 만주를 통해 육로로 연결이 되어있었지만 당시 한반도에는 철도도 부설되어있지 않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육상 교통로는 사실상 개판이어서 육로는 있으나마나한 수준이었다. 일본의 경우는 당연히 바다를 통해, 그것도 인천을 통해 병력을 투입하는 것이 한양 부근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가장 신속한 방법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황해의 제해권을 확보하기 위한 상황에서 발생한 것이 바로 이 풍도해전이다.

전투 경과[편집 | 원본 편집]

1894년 6월 9일 청군 3천명이 아산만을 통해 상륙하였으며, 이들은 평양 방면에서 남하하는 청군과 합세하여 한양 인근의 일본군을 방어하기 위해 성환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반대로 6월 12일 인천에 상륙한 일본군의 혼성여단은 서울에 진입한 뒤 성환의 청나라 군대를 공격하기 위하여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일본의 연합함대 사령관 이토는 한국의 서해안을 장악하고 7월 25일 이후에 전투를 개시해도 좋다는 지시를 받은 상태였다.이에 25일 일본 함대의 제1유격대 사령관 쓰보이 소장이 3척의 순양함 요시노, 나니와, 아키스시마를 지휘하여 풍도[1] 앞 해상에 도착할 무렵 청군의 군함 제원과 광을 2척을 발견하였다. 이에 양측은 07:25부터 서로 포격전에 들어갔으나 전투력에서 밀리는 청군의 함정 2척은 외해로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다시 청군의 또 다른 군함 1척과 상선 1척이 출현하였는데 군함은 조강함으로 영국 상선기를 게양한 수송선 고승호를 호송중이던 상황이었다. 이를 발견한 아키스시마가 접근하자 조강함은 백기를 게양하고 전투의사가 없음을 밝혔으며, 옆에서 따르던 나니와가 고승호를 정지시키고 검색하였는데 이 고승호는 영국인 선장이 승선중이었으며 청나라의 육군 1,100명을 아산만으로 수송중이던 상황이었다. 이 당시 배를 지휘하던 영국인 선장은 일본 군함의 명령에 따르겠다고 하였으나 청군의 지휘관은 교전이 시작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일본 군함의 명령에 불응하였다. 이에 나니와의 함장 도고 헤이치로[2]는 고심끝에 발포를 명령하여 고승호를 격침시키고 영국인 선원을 모두 구조하였다.

결과[편집 | 원본 편집]

이 풍도 인근 해상에서의 교전으로 청일전쟁이 시작되게 된다. 서로 선전포고는 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전쟁은 시작된 셈. 사실 일본은 영국 선적의 고승호를 격침시킨 것에 대하여 상당히 당황한 상황이었다. 혹시라도 영국이 청의 편을 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던 것. 실제로 국제적으로 이 고승호 격침사건으로 일본이 많은 비난을 받은 것 까지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국제법상 정당한 행위였다는 평가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일본의 걱정은 기우로 끝나게 되고 이후 일본은 청과의 전쟁을 본격적으로 수행하기 시작한다.

각주

  1.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풍도동에 해당하는 곳으로 대산항 북쪽 약 10km지점에 자리한 섬이다
  2. 쓰시마 해전에서의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 도고 헤이치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