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냉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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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 원본 편집]

평양냉면조선 요리에 있는 '찬국수(랭면)' 중에서 평안도황해도 지역의 향토음식으로 발전한 분파이다. 그 중에서 가장 풍요로운 땅인 평양에서 유난히 발전하여 지명이 붙은 이름이 되었다. 북측에서 '평양랭면'이라는 고유명사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입말에는 잘 오르지 않아도 평양냉면이라는 단어 자체는 과거부터 존재하였다.[1] 단, 한국어의 표준어 문법에는 두음법칙이 있기 때문에 냉면으로 바뀌어 표기되므로, 덩달아 본 항목명도 '평양냉면'으로 정해졌다.

상세[편집 | 원본 편집]

평양냉면은 익반죽으로 찰기를 높인 메밀면에 동치미 국물과 차게 식힌 고기육수를 섞은 수프를 부어내 만든다. 여기에 지단이나 삶은 달걀, 그리고 동치미 무를 더하고, 고기육수를 내기 위한 고기를 편육으로 하여 고명으로 얹어 마무리한다. 육수에 쓰이는 고기는 기름기가 적은 부위의 꿩고기를 최고로 쳤고, 꿩을 구할 수 없을 때는 닭을 대신 사용하였다. 여기서 꿩 대신 닭[2]이라는 속담이 생겼다. 쇠고기를 사용한 경우도 있었으나 전통적인 면에서 주류는 아니었다.

메밀의 제철이 겨울이기 때문에 평양냉면은 주로 겨울 음식으로서 즐겼다. 동치미 국물을 활용하거나 꿩육수를 쓰는 것도 그 일환이다. 그렇다고 여름에 먹는 것이 사도인 것만은 아닌데, 여름은 메밀 철이 아닌데다 동치미도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재래식 기술로는 도저히 만들 수가 없어서 비주류로 있었을 뿐이다. 현대 기술을 이용한다면 남반구 메밀에 냉장고를 활용하면 충분히 만들 수 있으므로 아무렴 좋은 일.

남측(한국)에 평양냉면과 가장 비슷한 음식으로는 강원도식 물막국수가 있다. 다만 막국수는 메밀이라는 면의 재료에서는 동일하지만 동치미 국물이 주류인만큼 국물과 갖은양념을 넣는 방법 등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이 음식으로 상당히 유명한 곳이 바로 옥류관(玉流館)이란 곳인데, 북한에서 상당한 명성을 가진 고급 음식점이다. 심지어 북한 뿐만 아니라 중국 베이징에도 체인점을 제한적으로 내고 있으며, 그 인지도 때문에 짝퉁 음식점도 종종 생겨나고 있다. 분점을 내는 것도 제한적이지만, 식당 내부를 촬영하는 것도 어느 정도 제재하고 있다. 웹툰 오무라이스 잼잼에선 디지털 카메라의 기록을 하나하나 지웠다는 내용이 나왔으며, 유튜버 영국남자두바이에 있는 분점을 갔을 때도 영상 촬영이 허가된 방에서만 찍기도 했다.[3]

역사[편집 | 원본 편집]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에 실린 북한 사회과학원 민속학연구소의 언급으로는, 평양랭면의 시초가 평양 대동강구역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며, 다음과 같은 일화를 서술했다.

고려시대 당시 평양의 찬샘골 마을(냉천동, 지금의 대동강구역으로 추정) 주막집에 달세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가 우연히 의암마을에 사는 장수노인을 만나 건강 비결을 물었더니 그게 메밀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주막 음식으로 메밀 수제비를 내놓아 큰 인기를 끌었다. 그 이듬해에는 대량으로 만들 수단이 필요했는지, 구멍을 뚫은 쇠판을 장착한 참나무분통를 직공에게 제작 의뢰해서 가져와 국수로 뽑게 되었고, 겨우내 보존하던 동치미국물에 말아서 내놓으니 그 맛이 굉장하여 사람들 사이에서 '곡수(穀水)'라고 불리고, 국수[4]의 어원이 되었다고 한다. 달세네 주막의 찬곡수는 이윽고 평양성 전체에 맛집으로 소문이 퍼져 임금의 귀에까지 들어갈 정도로 유명해졌다고 한다.

다만 정약용이 남긴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나 동국시세기(東國歲時記)[5] 등의 자료를 참고하면 지금의 평양냉면과 유사한 형태가 완성된 것은 아무리 빨리 쳐봐도 조선시대 중엽인 18~19세기 경이고, 그 이전의 유사 음식이라면 찬 국물에 말아먹는 병(餠)류 음식인 냉도(冷淘)가 고려시대에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될 뿐인데, 그러면 위 일화는 이 냉도를 가리키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구한말과 일제시대에 들어 서울에서 피서 음식으로 냉면이 큰 인기를 끌었고, 평양냉면도 1910~20년대 경에 그 인기에 올라타 서울로 진출하였다. 그 인기는 막국수나 다른 지역의 냉면을 취급하여도 '평양냉면집'이라 언급할 정도로 굉장하였다.

하지만 1945년 광복과 함께 정치적 분쟁이 터져 실질적 분단이 이뤄지면서 이북 음식인 평양냉면의 인기가 크게 떨어지고, 서울로 진출한 평양냉면집들도 이념 전쟁에 희생되었다. 이어진 1950년 한국전쟁으로 원재료 수급에도 차질이 생기게 되어 돼지고기(수육)를 대량으로 쓰는 평양냉면을 그대로 유지하기가 어려워져 동치미 국물이 주가 되는 민간식 찬국수로 회귀하였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함경도 피난민들이 강원도(철원 및 속초)를 거쳐 서울로 넘어왔는데, 이들의 함경도 농마국수 개조판인 함흥냉면(특히 칡냉면)이 진한 맛으로 큰 인기를 끌면서 심심한 맛의 평양냉면(이북냉면)은 90년대 후반까지 사실상 아는 사람만 아는 음식 수준으로 전락하였다.

그러던 2000년 6월 15일 남북정상회담을 통하여 북한과 남한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바뀌고, 덕택에 남한 주민들의 북한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게 되었다. 평양 출신 탈북자도 이 시기의 전후로 사회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향토음식 전문점을 차리는 일이 늘어나 본격적으로 평양 음식의 첫 전성기를 누렸으며, 평양식 물냉면이 그 진두에 서 다시금 수도권 일대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진한 맛을 좋아하는 남한 사람들에게 여전히 평양냉면은 극복해야만 맛을 알게 되는 어려운 음식이었는데, 사정 좋게도 경제 사정이 그 직전(1998년 외환위기)보다는 나아진 2000년대 초중반기였기에 기존의 외식문화를 넘어선 미식형 외식문화의 타겟으로 삼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인터넷 소통 공간이 대폭 확대된 2010년대에 들어 더욱 강해져, 호불호가 크게 갈리는 음식으로 오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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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수에 별다른 간을 하지 않기 때문에 기본은 상당히 심심한 맛[6]이다. 동치미 국물의 비중이 커지면 신 맛이 살아나지만 그만큼 찌릿하게 날카로워지고, 고기 육수의 비중이 커지면 감칠맛은 나와도 밍밍해지는 단점을 안기 때문에, 그 어중간한데서 타협하느라 미묘한 맛이 만들어진 것. 거기에 땅냄새가 강한 메밀면의 껍데기 향까지 더해져서, 냉면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면 흡사 흙을 마시는 듯하다고 할 정도로 싫어하게 되는 원인이다. 또한 심심한 맛으로 먹어야 한다는 것도 이러한 재래식 제법에서 기인한다.

그렇지만 세월이 흐르면 요리도 진화하는 법. 일명, '옥류관식 랭면'이라 하여 북한에서도 나름 냉면육수의 발전이 있었는데, 꿩이나 닭 대신에 소고기를 주류로 사용하고, 기존 고기일색 육수에 간장으로 감칠맛을 더하고, 야채를 넣어서 맛을 보완하거나 곰국 수준으로 진하게 우린 국물을 사용하기도 하고, 취향에 맞춘 고추양념[7]을 얹어내는 식으로 일률적이던 심심한 맛에서 탈피하였다. 이는 탈북자가 대거 발생한 201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알려지시 시작했는데, 1950년대 피난민에 의해 정착된 레시피가 주류였던 남측의 이북냉면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공깽[8]을 선사한 바가 있다.

각주

  1. 남측에서는 향토음식으로서 영향이 강하여 물냉면 혹은 이북식 냉면, 처럼 딱히 통일된 명칭이 없었다. 본격적으로 '평양냉면'이 유행한 것은 남북관계가 화기애애해진 2000년대 초에 들어서야 정착된 것.
  2. 정확히는 냉면만을 가리키는게 아니라, 겨울철에 떡국이나 장국 육수를 끓이기 위한 경우에서 나온 것이다. 다만 평양에서 고기요리가 크게 발달했다는 점을 고려한다.
  3. 진짜 북한식당 "옥류관" 평양냉면의 맛은!? (YouTube, 영국남자)
  4. 북한측에서 냉면을 지칭하는 말로서.
  5. “무김치나 배추김치에 메밀국수를 말고 여기에 돼지고기를 섞은 것을 냉면이라 하고,...(중략), 냉면은 평안도 냉면이 최고이다.”
  6. 사투리로 '슴슴하다'라는 표현을 쓴다.
  7. 기존 냉면에도 고춧가루를 약간 뿌려먹는 방식이 있었다.
  8. 2018년 판문점 선언 직전때 특히나 불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