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외환 위기

1997년 외환 위기1997년 하반기에 일어난 금융 사건으로 대한민국의 외환보유량이 부족해서 외채를 갚을 수 없게 되자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 금융을 요청해서 외환을 빌린 사건이다. 이때 IMF의 인상이 너무나 강해서, 한국 내에서는 IMF라는 단어가 곧 1997년 외환 위기를 가리키는 속칭이 되었다.

당시에 외화보유액에 비해 큰 외채를 지고 있던 한국이 외화 부족으로 외채를 갚을 수 없게 되자 IMF 측에서 구제 금융을 통해 외환을 빌려주었다. 한편 많은 기업들이 유동성 위기를 겪어 한보철강·기아자동차·해태그룹·대우그룹 등의 대기업들을 비롯해 무수한 기업들이 도산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큰 경기침체로 이어졌다.

사건의 진행[편집 | 원본 편집]

원인[편집 | 원본 편집]

외환위기 전 한국 경제는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저이윤-고부채 구도[편집 | 원본 편집]

여러 정책을 통해 산업정책에 금융을 종속시켜 금융기관의 경영주체가 서지 않았다. 그 결과 기업에 대한 금융의 규율 기능이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기업은 이윤보다는 차입에 의한 성장을 위주로 하여 저이윤-고부채 구도가 정착하였다. 실제로 아래의 그래프(, 평균차입비용. 단위:%. 한국은행)를 보면 외환위기 전 자기자본순이익률이 평균차입비용을 지속적으로 밑돌고 있다.

자기자본순이익률, 평균차입비용. 단위:%. 한국은행

정부의 외채 상환 능력 부족[편집 | 원본 편집]

한국 정부는 1997년 8월 민간부문의 외채에 대해 지급 보증을 했다. 그러나 정부(한국은행)의 외화준비금이 너무 적었다.

단기외채, 수입, 외환보유고. 단위:100만달러. 한국은행

해결[편집 | 원본 편집]

한국의 외한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IMF는 구제금융을 마련하였다. 당시 임창열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장관은 김영삼 대통령 주재로 열린 회담에 참석한 뒤 2백억달러 이상을 IMF에 요청하기로 하며, 캉드쉬IMF총재에게 전화를 걸어 자금지원을 요청했다. 외환위기 해결의 조건으로 IMF와 미국은 고금리 정책, 전면적 구조조정, 전면적 시장 개방이라는 세 가지 요구를 하기도 하였다.

결과[편집 | 원본 편집]

IMF 외환 위기를 이겨내며 국가의 패망은 막았지만, IMF 당시 정책으로 인해 경제가 전면적으로 개방되며 국내 자본은 약한 상태에서 외국 자본에게 일방적인 활동 무대가 주어졌다. 아래 그래프는 2001년부터 2007년 상반기까지 외국과 국내의 투자금액과 차익을 나타낸 그래프이다. 외국이 투자한 경우에는 투자금액은 1,896억달러이고 거둔 차익은 약 3,309억 달러인 반면 같은 기간 한국이 외국에 투자한 금액은 2,662억달러이고 거둔 차익은 507억달러다. 결론적으로, 투자한 금액은 한국이 많은데 차익은 외국인이 많았다.

Imfgraph3.png

외환 위기가 미친 영향[편집 | 원본 편집]

구제금융을 받은 후 대한민국은 긴축제정과 구조조정이 활발히 일어나게 되었으며, 개인이 파편화 되고 사회적인 상품화가 만연해지면서 신자유주의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로 인해 실업자 증가, 안정적인 일자리의 감소로 인한 비정규직 증가, 가족의 해체 등 다각도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공공재의 민영화 압력이 커진 것도 이 시점부터이다.

시장개방으로 인한 외환 투자가 주식시장에 쉽게 들어온 것도 이때의 영향이 크다. 특히 론스타 같은 헤지펀드가 들어왔으며, 외환은행 지분 매각 과정에서 먹튀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런 흐름은 20년이 지난 2016년 이후까지도 진행중이다.

철도에도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공사중이던 노선은 개통이 연기되고 계획했던 노선은 연기 또는 백지화되기도 했다. 서울의 3기 지하철 계획이 백지화되고 2002 한일 월드컵에 대비해 공사중이던 노선은 서울 지하철 6호선을 제외하면 월드컵을 넘긴 뒤에야 개통했다. 특히 비수도권 지하철에게는 하필 노선망을 확충하려는 시기에 터지는 바람에 피해가 컸다. 이 영향으로 광주 도시철도대전 도시철도는 1호선이 생긴 지 10년이 지났는데도 후속 노선의 계획이 여러 번 바뀌는 바람에 아직도 착공되지 않고 있다.IMF 크리

이 사태를 계기로 새로 도입된 것이 있는데 그건 바로 경전철민간투자사업이다. 재정 중전철 사업이 경전철 또는 민자 중전철 사업으로 바뀌는 경우가 많았다. 외환위기 이후에 연장 노선이 아닌 신규 노선으로 착공된 중전철 노선을 보면 국철을 활용하는 노선이거나 민자 노선[1]이다. 중전철 중에서도 대형 전동차 노선만 생기고 있고 지방 광역시 지하철에 쓰인 중형 전동차 노선은 모두 경전철로 계획이 바뀌면서 더 이상 생기지 않고 있다.

3기 지하철 백지화로 인해 서울의 강남~도심 지하철 노선이 늦어지고, 2호선이 같이 생길 줄 알고 지은 광주 도시철도 1호선안습의 길을 걷게 되고, 수인선동해남부선 복선전철화는 티스푼 공사의 레전설로 남게 되고, 민자사업의 수요예측 병크 등등 철도에 남긴 상처는 아직도 남아 있다.

사회경제적으로 보았을 때 가장 심각한 요인은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한국사회의 저출산 문제가 시작된 것이었다. 당장 1997년도부터 시작된 출생자 감소는 2000년의 밀레니엄 베이비 세대와 속칭 황금돼지띠라고 불리는 2007년도 출생자가 잠깐 증가하는 것을 제외하면 지속적으로 추세 감소곡선을 그리고 있으며 특히 1996~1999년생 사이의 출생자 격차는 웬만한 지방 소도시급에 해당하는 12만명 이상의 급락을 기록한다. 이 충격은 외환위기 발생 후 20년이 지난 2017년까지도 그대로 지속되고 있으며 오히려 저출산 정도가 더 심각하게 진행되어 1980년대 출생자 숫자가 80만명에 육박했던 것에 비해 이들 세대의 자녀세대에 해당하는 2010년대 출생자 숫자는 연간 40만명선이 붕괴되면서 불과 한 세대만에 세대 구성 인구 비중이 반토막나는 수준까지 내려와 한국 경제의 잠재성장률을 지속적으로 갉아먹고 있으며 이는 이들 세대(1980년대 출생자)의 부모세대에 해당하는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와 맞물려 한국 경제에 지속적인 부담이 되고 있다. 그나마 1980년대 출생자들은 IMF이후 회복된 시기의 막차라도 얻어탈 수 있었지만 이후 출생자 세대인 1990년대 출생자들은 이들이 사회에 진출할 시기 직전에 터져버린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인한 세계경기침체로 가뜩이나 좁아진 문이 더욱 좁아져버린 그야말로 최악의 세대가 되어버렸다.

참조[편집 | 원본 편집]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