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레

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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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본명 펠레 에드손 아란치스 두 나시멘투
출생 1940년 10월 23일 (83세)
브라질 트레스 코라송스
국적 브라질
신체 173cm
프로선수 경력
종목 축구
포지션 공격수
소속팀 산투스 FC (1956~1974)
뉴욕 코스모스 (1975~1977)
PELE를 어떻게 읽는가? G-O-D.
— 선데이 타임스, 1970 월드컵 결승전이 끝나고[1]

축구의 대명사, 축구라는 스포츠를 상징하는 축구의 神
저주의 달인

클럽 경력[편집 | 원본 편집]

산투스(1956-1974)[편집 | 원본 편집]

처음에는 여러 아마추어 클럽을 거치다가 아버지 돈지뉴가 뛰었던 바우루라는 클럽의 유스로 선수생활을 시작했다. 펠레를 지도한 바우지마르 지 브리투는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선수가 될 수 있을 거라는 말과 함께 산투스에 입단시켰고 15살 때 프로계약을 맺고 데뷔까지 하게 된다.[2] 1957년에 펠레는 16살 때 팀의 주전 자리를 차지해 상 파울루와 히우 지 자네이루의 주(州)간 교류전이었던 토흐네이우 히우-상 파울루(이하 RSPS)에서 9경기 5득점을 기록했다. 상 파울루 주(州)리그인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이하 SPS)에서는 14경기 19득점으로 득점왕, 상위스플릿에서도 15경기 17득점을 기록했으며 국가대표로 발탁된다.

1958 FIFA 월드컵에서 전설을 세운 뒤 SPS에서 38경기 58득점으로 우승과 득점왕을 거머쥐었는데 역대 최다득점 기록임은 물론이고 지금은 주리그 경기 수가 줄었기 때문에 사실상 깨지지 않을 기록이다.[3] 1959년에 RSPS에서 우승을 차지하지만 이후 참가한 대회에서 연달아 고배를 마신다. SPS에서는 파우메이라스에게 밀려서 준우승에 그쳤고,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이하 CP) 참가팀을 정하기 위해 생긴 전국 토너먼트 타사 브라질(이하 TB)에서는 결승전에서 바히아와 재경기 끝에 패배했다.[4] 한편 이 무렵에는 비시즌 기간에 국제 친선경기가 많았는데 산투스는 적극적으로 국제 투어를 돌았고 펠레는 1959년에 처음으로 100골을 기록했다.[5]

1960년에는 부상 때문에 평이한 시즌을 보냈지만[6] 1961년부터 본격적인 전성기를 달린다. RSPS-SPS-TB 3개 중요 대회에서 모두 경기당 1골 이상을 기록하며 공식경기 38경기 62득점을 기록했고 SPS와 TB에서는 득점왕과 우승을 동시에 거머쥐었다. 친선경기를 합치면 커리어 최다득점인 110골. 1962년에는 RSPS를 생략해버렸고 월드컵에서도 부상 때문에 구경만 하며 상반기를 날려먹었지만 후반기에 그야말로 제대로 버닝했다. SPS와 TB는 물론이고 CP와 인터콘티넨탈컵까지 우승하며 4관왕에 오른다. 결승전에서 꺾었던 팀은 가힌샤가 이끄는 보타포구, CP 에서 2연패를 기록한 페냐롤, 유러피언컵에서 2연패를 기록한 벤피카였다. TB와 CP는 재경기 끝에 우승했는데 각각 2골씩 넣었고, 인터콘티넨털컵은 2경기 5득점(...) 몰라 뭐야 그거 무서워

1963년에는 RSPS에서 우승과 득점왕을 차지했고 SPS는 부상 때문에 30경기 중 19경기밖에 못 나와 3위에 그치지만 득점왕을 차지했다. 1/3 정도는 접어줘도 득점왕 이어지는 남은 3개대회는 부상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전부 우승했다.[7] 1964년에는 부상 때문에 경기를 많이 빼먹어 공식경기 출장이 31경기에 불과했으며 특히 CP는 아예 나가지도 못한채 팀이 4강에서 탈락해버렸다. 그래도 RSPS-SPS-TB 우승을 차지했으며[8] 당연히 득점왕도 2개 챙겼다. 참 쉽죠? 이듬해에는 RSPS는 팀이 꼴찌했으나 그래도 7경기 5골을 기록했고 SPS와 TB는 또 우승. CP는 우승팀 페냐롤과 혈투를 벌인 끝에 4강에서 떨어지지만 커리어 처음이자 마지막 득점왕을 거머쥐었다.[9]

그러나 1966년부터 펠레와 산투스는 정상에서 내려오게 된다. 축구황제의 대관식으로 여겨졌던 1966 FIFA 월드컵에서 끔찍한 살인태클로 심각한 부상만 당하고 떨어졌으며, 이 여파로 클럽 커리어가 죄다 꼬여버린 것. 월드컵 이전에 있었던 RSPS는 우승했다지만 펠레는 1경기도 뛰지 않았으며, 월드컵 이후에 열린 SPS-TB는 둘 다 놓쳤는데 특히 SPS 득점왕 10연패에도 실패했다. 잠깐 10연패가 이상한 거 아냐? 이후 펠레는 과거처럼 압도적인 제왕으로 군림하지 못했으며 언론으로부터 '왕의 시대는 끝났다.'라는 소리를 듣기까지 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펠레니까 가능한 평가인데 1969년까지 SPS에서 64경기 60득점, RSPS와 TB를 대체한 토흐네이우 호베르투 고미스 페드로자에서는 43경기 32득점을 기록했다. 진짜 끝난 거 맞아? 그러나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정말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1970 FIFA 월드컵으로 자신의 위대함을 다시금 보여줬으나 혹사와 부상으로 전성기가 끝난 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고, 1973년에 태운 마지막 불꽃을 제외하면 이렇다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결국 은퇴를 선언한다.

뉴욕 코스모스(1975-1977)[편집 | 원본 편집]

비록 축구계에서 은퇴하긴 했지만 펠레라는 이름이 갖는 무게는 여전했다. 축구 불모지였던 미국에 축구를 전파한다는 이유로 펠레는 복귀를 결정했고, 뉴욕 코스모스와 계약을 체결한다. 축구 전파는 허울뿐인 명분이고 실제로는 돈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지만 펠레로 인해 미국축구가 많은 화제를 불러온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올스타로 뽑히는 등 3시즌 동안 NASL 간판스타로 활동했고 마지막 시즌에는 우승도 차지했다. 이 우승 이후 1977년 10월 산투스와 코스모스 간 친선경기를 끝으로 완전히 은퇴했으며 이 경기에서 직접 프리킥으로 마지막 골을 넣었다.

국가대표 경력[편집 | 원본 편집]

1957년에 부활한 로카컵[10]에서 데뷔했으며 A매치 최연소 득점기록을 세웠다. 1958 FIFA 월드컵을 앞둔 경기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줬지만 정작 대회가 시작됐을 때는 무릎부상으로 출장하지 못했다. 처음으로 펠레가 모습을 드러낸 건 3차전 소련전으로 패할 경우 탈락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가힌샤 역시 이 경기가 월드컵 데뷔전이었으며 두 사람이 호흡을 맞춘 두번째 경기이기도 했다.[11] 펠레는 이 경기로 월드컵 역사상 최연소 출장기록을 갈아치웠으며[12] 바바의 2번째 골을 어시스트했으며 브라질은 8강에 진출했다. 8강에서는 웨일스를 상대로 결승골을 넣어 최연소 득점 기록을 세웠으며, 4강 프랑스전에서는 후반에만 3골을 몰아넣으며 최연소 해트트릭 기록을 달성했다. 그리고 개최국 스웨덴과의 결승전에서도 2골과 함께 우승을 차지해 축구계의 슈퍼스타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결승전에서 넣은 첫번째 골은 그야말로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 https://www.youtube.com/watch?v=4srFIDtBwYM

1959년에는 처음으로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코파 아메리카[13]에 참여했는데 팀은 무패에 득점왕과 MVP를 석권하지만 준우승에 그쳤다.[14] 당시에는 대회가 지금처럼 체계적으로 운영되지 않았고 브라질은 2진급 선수를 내보내거나 아예 불참하기도 했다. 덕분에 펠레로서는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 참가였고, 코파 아메리카는 펠레가 브라질에서 뛰는 동안 우승해보지 못한 유일한 메이저대회로 남았다. 1960년에 타사 두 아틀란치쿠(아틀란틱 컵)에서 우승을 차지했으나 1961년에는 A매치를 뛰지 않았다. 1962년이 되자 월드컵을 앞두고 계속 득점포를 가동하며 본좌 등극을 예고했으나 정작 대회가 시작되자 부상으로 구경만 해야했다.[15] 최종기록은 2경기 1득점 1도움. 펠레의 자리는 아마리우두가 메꿨으며 결국 1962년의 왕좌는 펠레가 아니라 그의 파트너이자 라이벌인 가힌샤가 차지했다.

그래도 펠레가 셀레상의 간판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비록 준우승에 그쳤지만 1964년 타사 다스 나소이스[16]에 참여했으며 월드컵 직전까지 꾸준히 활약했다. 특히 1966 FIFA 월드컵은 그야말로 펠레를 위한 대회처럼 보였였다. 1962년과는 달리 1966년 펠레는 클럽에서 모든 걸 다 이룬 상태였으며 셀레상 멤버도 화려해서 4년 전에 이루지 못한 화룡점정을 달성할 것이라고 기대를 모았다.[17][18] 개막전인 불가리아전에서 프리킥으로 선제결승골을 넣고 최초의 3연속 월드컵 득점 기록을 세우면서 첫 단추를 잘 꿰는 듯 했으나 거친 태클로 인해 부상을 당했고, 이로 인해 2경기 헝가리전은 결장했다. 펠레 없이 헝가리에게 패배한 브라질은 탈락 위기에 놓였고, 비센치 페올라 감독은 포르투갈을 상대로 선발 11명 중 자이르지뉴를 제외한 10명을 모두 갈아치우고 부상중이던 펠레를 출전시키는 초강수를 둔다. 그러나 수비불안으로 브라질은 무너졌고 펠레는 거친 태클 속에서 제대로 뛰지도 못했다. 불가리아전이 우스워보일 정도로 포르투갈전은 살인태클이 연속으로 일어났는데 특히 주앙 모라이스의 태클은 월드컵 최악의 순간 중 하나로 꼽힌다. https://www.youtube.com/watch?v=9OtnR06Z3EY 1:28부터. 이 끔찍한 태클로 인해 펠레는 오른다리를 절뚝거리면서 뛰어야 했다.[19][20] 결국 브라질은 포르투갈에게 패배했고 분노에 찬 펠레는 다시는 월드컵에서 뛰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나 이미 그의 몸이 만신창이가 된 뒤였으며, 브라질의 탈락도 확정되었다.[21]

1969년 여름부터 월드컵 예선이 시작되었는데 펠레 역시 당연히 소집되었다.[22]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계속되는 설득으로 인해 결국 은퇴를 번복하고 1970 FIFA 월드컵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펠레가 복귀한 뒤, 지역예선에서 파라과이, 콜롬비아, 베네수엘라와 같은 조가 된 브라질은 6승 23득 2실이라는 압도적인 기록으로 본선 티켓을 따냈다. 왕의 귀환이 다가오자 축구계가 흥분에 빠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Kicker pele.jpg

키커 1970월드컵 특별호에서 언급된 펠레. 과연 펠레가 지난 두 번의 좌절을 딛고 정상에 오를지가 당대 축구계의 최대 화두였다.

브라질은 잉글랜드,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와 함께 3조에 속했는데 1970년 3조는 흔히 말하는 죽음의 조의 시초로 알려져 있다.[23] 펠레는 체코슬로바키아를 상대로 결승골을 넣었고, 잉글랜드전에서는 자이르지뉴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했다.[24] 루마니아전에서도 선제골과 결승골을 넣어 브라질은 3승으로 조 1위를 차지한다. 8강에서 만난 상대는 돌풍의 팀 페루였으나 브라질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펠레는 결승골인 토스탕의 3번째 골을 어시스트했고, 브라질은 4강에서 숙적 우루과이를 만났다. 히벨리누의 3번째 골을 어시스트했고 비록 골은 아니지만 라디슬라오 마수르키비치를 상대로 전설이 된 명장면을 하나 남겼다. https://www.youtube.com/watch?v=-UzRsvCsC4c[25]

결승 상대는 이탈리아였는데 이 승부에 쥘리메컵의 영구소장이 걸려있었다.[26] 펠레는 선제골을 넣은 뒤 2개의 어시스트를 했고 경기는 다소 싱겁게 4:1로 끝이 났다.[27] 브라질은 최초로 3회 우승팀으로 등극했으며 펠레는 4득점 6도움으로 골든볼 수상자가 되었다.[28] 1970 FIFA 월드컵은 처음으로 컬러TV로 중계된 월드컵이었고 펠레는 전 세계 축구팬들 앞에서 역대 최강의 팀을 이끌고 정상에 오르며 이견 없는 축구계의 제왕으로 남게 되었다.[29] 혹자들은 1970년 브라질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펠레가 없어도 우승할 수 있었을 거라고 말하지만 처음에는 펠레, 자이르지뉴, 히벨리누, 토스탕, 지르송 이 5명의 '10번'이 함께 뛰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하는 시선이 많았다.[30] 속 빈 강정이 될수도 있었던 것을 펠레가 최전방에서 내려와 팀의 공격을 조립하며 위대한 팀으로 완성시켰고, 마침내 불멸할 업적을 쌓은 것이다.[31] 사실 이러한 활약에도 불구하고 전성기에 비하면 부족하다는 얘기가 있긴 하다. 전 경기 공격포인트를 기록하고 골든볼에 우승까지 했지만 그래도 아쉽다고? 펠레잖아? 아하![32] 월드컵이 끝난 뒤에도 몇 경기를 더 뛰다가 1971년 유고슬라비아를 상대한 친선경기를 마지막으로 브라질 대표팀에서 은퇴했다. 최종기록은 92전 67승 14무 11패.

위상[편집 | 원본 편집]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있다. 본좌

현역 시절에는 당연히 독보적인 존재였으며, 은퇴 이후에도 최고의 축구선수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실력은 두말 할 것도 없고 충격적인 데뷔와 빛나는 전성기, 좌절, 그리고 부활까지 드라마틱한 커리어를 보냈기에 축구 팬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33] 지금처럼 국가 간 교류가 활발한 시기가 아니었고 중계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실제 플레이를 보기 어려워 펠레가 떴다 하면 축구 팬들은 물론이거니와 펠레를 상대하게 될 선수들조차 흥분할 정도였다.[34][35] 커리어 내내 세계 각지로 투어를 돌았기 때문에 축구에 큰 관심이 없는 대중들에게도 인지도가 높았고 브라질이 세계 최강으로 자리잡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덕에 그 어떤 선수보다 유명인사가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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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브라질의 플라카르는 유럽과 남미의 10개국 기자 70명에게 역대 베스트11을 뽑아달라고 요청했으며 69명이 펠레를 뽑았다.[36][37]

Placar 1999.png

1999년 12월, 플라카르가 9개의 다른 언론과 탑10을 비교한 것. 아르헨티나의 엘 그라피코마저 펠레를 1위로 선정했다.

이탈리아의 구에린 스포르티보나 네덜란드의 풋발 인터내셔널처럼 기자들이 뽑은 투표도, 잉글랜드의 월드사커처럼 독자들이 뽑은 투표도 죄다 펠레가 1위를 차지하고 있으며[38] 발롱도르 수상자들이 선정한 프랑스풋볼의 세기의 선수 투표 역시 펠레가 압도적인 지지로 1위였다. 디에고 마라도나와 라이벌이라고들 하지만 정작 마라도나가 이런 언론 순위에서 펠레 위에 놓이는 경우는 찾기 힘들다.[39][40]


우승 경력[편집 | 원본 편집]

산투스 FC

  • 캄페오나투 브라질레이루[41] : 1961, 1962, 1963, 1964, 1965, 1968; 준우승 : 1959, 1966
  •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 1958, 1960, 1961, 1962, 1964, 1965, 1967, 1968, 1969, 1973; 준우승 : 1957, 1959
  • 토흐네이우 히우-상 파울루 : 1959, 1963, 1964[42], 1966[43]
  •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 1962, 1963
  • 인터콘티넨털컵 : 1962, 1963
  • 인터콘티넨털 슈퍼컵 : 1968-69

뉴욕 코스모스

  • 북미축구리그(NASL)[44] : 1977

브라질

  • 월드컵 : 1958, 1962, 1970
  • 코파 아메리카; 준우승 : 1959
  • 타사 다스 나소이스; 준우승 : 1964
  • 타사 두 아틀란치쿠 : 1960

수상 경력[편집 | 원본 편집]

펠레의 저주[편집 | 원본 편집]

쉽게 말해서, 펠레가 한 예측은 죄다 반대로 이루어진다는 징크스다. 즉, 펠레가 월드컵에서 이긴다고 예언한 팀은 보통 졸전 끝에 떨어지며, [51] 자신이 특히 인상적이라거나 크게 된다거나 했던 선수는 듣보잡이 되거나, 갑자기 뭔가 기량이 떨어진다거나, 부상당하거나, 월드컵 엔트리에 오르질 못한다거나 하는 일이 벌어진다는 징크스. 그래서 부두술사, 흑마술사라는 별칭도 가지고 있다. 물론 아주 틀린 것만 있는 건 아니지만, 당장에 문어 파울이 있을 당시 파울과 비교해봐도 적중률은 썩 좋지 못하다. 참고로 흑마술 vs 백마술 빅매치에서 져서 문어보다 못하다는 조롱도 들었다 뭣보다 이게 꽤나 인기를 끄는 건, 펠레가 말하는 우승 국가는 보통 우승 한번씩은 해보거나 축구 강국으로 평가받는 또는 돌풍을 일으키던 국가들인데 이분이 주술을 걸어주시면 여지없이 광탈한다는 점이다. 최근에는 월드컵 개최국이자 축구 강국으로 평가받던 브라질을 우승국으로 주술 예언을 하더니만은 급기야 독일과의 준결승에서 브라질이 7:1의 스코어를 찍으며 침몰해버렸다.

통산 기록[편집 | 원본 편집]

시즌 클럽 SPS RSPS[52] 전국[53] 대륙 총계 비고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1957 산투스 FC 29 36 9 5 - - - - 38 41
1958 산투스 FC 38 58 8 8 - - - - 46 66
1959 산투스 FC 32 45 7 6 4 2 - - 43 53
1960 산투스 FC 30 33 3 0 - - - - 33 33
1961 산투스 FC 26 47 7 8 5 7 - - 38 62
1962 산투스 FC 26 37 0 0 5 2 6[54] 9[55] 37 48
1963 산투스 FC 19 22 8 14 4 8 5[56] 7[57] 36 51
1964 산투스 FC 21 34 4 3 6 7 0 0 31 44
1965 산투스 FC 30 49 7 5 4 2 7 8 48 64
1966 산투스 FC 14 13 0 0 5 2 - - 19 15
1967 산투스 FC 18 17 - - 14 9 - - 32 26
1968 산투스 FC 21 17 - - 17 11 - - 38 28
1969 산투스 FC 25 26 - - 12 12 - - 37 38
1970 산투스 FC 15 7 - - 13 4 - - 28 11
1971 산투스 FC 19 8 - - 21 1 - - 40 9
1972 산투스 FC 20 9 - - 16 5 - - 36 14
1973 산투스 FC 19 11 - - 30 19 - - 49 30
1974 산투스 FC 10 1 - - 17 9 - - 27 10
종합 브라질 412 470 53 49 173 100 18[58] 24[59] 656 643

각주

  1. 말콤 앨리슨팻 크레란드가 월드컵 중계 도중 나눈 대화라는 말도 있다.
  2. 단 공식대회는 아니었고 친선경기였다.
  3. 애초에 30경기씩 뛰던 시절에도 40골 넘겨본 건 펠레뿐이다.
  4. 1승 1패였고 4:3이었기 때문에 지금 기준이라면 산투스가 우승했겠지만 당시에는 승패 동률이면 그냥 재경기였다.
  5. 펠레의 어마어마한 골기록에 거품이 껴있다는 건 이런 친선경기를 두고 나온 말이다. 다만 당시에는 국제경기라고는 몇경기 되지 않는 대륙대회와 이런 친선경기뿐이었기 때문에 비록 비공식경기라 하더라도 많은 화제가 되곤 했다.
  6. 어디까지나 펠레 기준이다. RSPS는 3경기 출장에 그쳤다지만 SPS에서 30골로 우승+득점왕이었다.
  7. 대신 인터콘티넨털컵은 재경기 끝에 우승했는데 3경기 중 1경기밖에 안 뛰었다. 하지만 2골(...)
  8. RSPS는 보타포구와 공동우승.
  9. 이후 브라질 축구협회가 참가를 거부하고 산투스가 자체적으로 포기하는 등 여러 악재가 겹쳐 펠레는 다시는 CP에서 뛰지 못했다.
  10.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간 교류전으로 훌리오 아르헨티노 로카의 이름에서 따왔다. 현재 두 국가가 맞붙는 슈퍼클라시코는 로카컵을 전신으로 한다.
  11. 펠레와 가힌샤가 같이 뛴 경기에서 브라질은 28승 4무를 기록했다. 가힌샤 하나만으로도 49경기 연속 무패였는데?
  12. 이 기록은 1982년에 북아일랜드의 노먼 화이트사이드에 의해 경신되었다.
  13. 정확히는 코파 아메리카의 전신인 남미선수권
  14. 리그제였고 역시 무패에 승점 1점이 앞선 아르헨티나가 우승했다.
  15. 대회를 앞두고 치른 친선경기에서 파라과이, 포르투갈, 웨일스를 상대로 6경기 7득점을 기록했다.
  16. 브라질 축구협회 창립 50주년을 기념해 브라질, 아르헨티나, 잉글랜드, 포르투갈이 참여한 대회로 월드컵의 전초전으로 여겨졌다.
  17. 비록 지지는 없다지만 가힌샤를 비롯해 지우마르, 자우마 산투스 같은 베테랑이 남아 있었고, 자이르지뉴, 지르송, 토스탕 같은 젊은 피도 합류했었다. 무엇보다 세계 최고였던 펠레가 있었으니 당연히 강력한 우승후보일 수밖에 없었다.
  18. 간혹 펠레가 아니라 가힌샤가 최고의 스타로 여겨졌다는 얘기가 있는데, 오히려 자이르지뉴가 주목받았다. 월드사커는 월드컵을 앞두고 브라질의 동향을 전하면서 자이르지뉴를 펠레 다음으로 뛰어난 브라질 선수라고 소개했다.
  19. 당시에는 선수교체 제도가 없었고 0:2로 지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응급처치만 받은 채 뛰었던 것. 선수교체 제도는 1970년부터 도입되었는데 펠레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다.
  20. 놀랍게도 이 태클에도 불구하고 모라이스는 퇴장당하지 않았는데 당시 주심이던 조지 맥케이브는 이 일로 남은 경기 심판에서 제외되었다.
  21. 한편 브라질의 부진에 펠레의 부상이 미친 영향을 두고 논란이 있다. 당시 브라질의 경기력이 전체적으로 기대 이하였기 때문에 펠레가 정상적인 컨디션이었어도 어려웠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1962년에 펠레 없이도 브라질이 우승했기 때문에 펠레의 월드컵 우승은 특출나지 않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에 대한 반박으로 1966년이 언급되기 때문에 꽤 흥미로운 주제다.
  22. 월드컵 이후 국가대표팀 경기를 아예 안 뛴 걸로 알려져 있지만 1968년부터 A매치를 뛰고 있었다.
  23. 독일의 키커는 분데스리가 감독 18인에게 결승 대진과 복병을 물었는데 13명이 브라질, 7명이 잉글랜드를 결승 후보로 뽑았으며 체코슬로바키아와 루마니아는 다크호스로 꼽혔다.
  24. 비록 골은 아니지만 펠레의 헤딩을 고든 뱅크스가 막아낸 장면은 월드컵 역대 최고의 선방 중 하나로 꼽힌다.
  25.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사람들에게 설명을 하자면 공을 터치한 게 아니라 일부러 흘려서 골키퍼를 속인 것.
  26. 최초로 3번 우승한 국가에게 우승 트로피인 쥘리메컵의 영구소장 자격을 주기로 했었다.
  27. 이탈리아는 4강에서 서독과 '세기의 게임'으로 불리는 120분 혈투를 벌이고 올라왔었다.
  28. 당시에는 공식적인 골든볼이 없었고 이후에 수여했다.
  29. 펠레의 별명 중 가장 유명한 게 O Rei(왕)이다.
  30. 구성은 조금 다르지만 호나우두, 호나우지뉴, 카카, 아드리아누가 함께 뛴 2006년 브라질을 생각해보라.
  31. 기록상으로도 펠레가 빠진 동안 브라질은 9승 3무 3패를 기록했고, 펠레가 복귀한 이후 월드컵 우승까지 23승 4무 2패를 기록했다.
  32. 사실 과거의 골든볼은 이름값으로 줬기 때문에 썩 믿을만하지 못하다는 얘기가 있긴 하다. 대표적으로 1954년의 푸슈카시 페렌츠가 꼽힌다.
  33. 위 잡지사진의 첫문장은 에우제비우, 바비 찰턴, 프란츠 베켄바우어, 잔니 리베라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세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축구선수는 펠레라는 의미다.
  34. 당대 축구인들의 찬사를 보면 사람인지 의심스럽다며 아예 비교를 불허하는 위치에 놓거나 펠레와 뛰어본 게 영광이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35. 나이지리아에서 펠레의 축구경기를 보기 위해 내전이 멈춘 적이 있을 정도.
  36. 2013년월드사커가 했던 투표와 비슷하나 이건 포지션 구분이 없었다.
  37. 흔히 우리가 펠레의 라이벌이라고 인식하는 에우제비우는 11표에 그쳤으며 특히 8표는 포르투갈 언론의 투표였다.
  38. 위의 월드사커 순위는 기자들이 자체적으로 뽑은 순위고 공식적으로는 독자투표로 선정했는데 이 역시 펠레가 1위였다.
  39. 마라도나를 펠레 위로 놓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대부분 기자들이 개인적으로 의견을 표시한 것이다.
  40. 대신 FIFA에서 세기의 선수를 뽑을 때 했던 인터넷 투표에서는 마라도나가 압도적인 차이로 1위를 했다.
  41. 브라질 챔피언을 의미하는데 본문에도 나오지만 1959년부터 1968년까지는 타사 브라질이라는 주리그 챔피언들의 토너먼트로 우승팀을 정했고, 1967년부터 1970년까지는 토흐네이우 호베르투 고미스 페드로자라는 리그가 존재했다. 대회가 두 개였던 67년과 68년에는 챔피언이 두 팀 존재했으며 지금과 같은 전국 각지의 클럽들이 참여하는 리그는 1971년부터 시작되었다.
  42. 보타포구와 공동우승
  43. 월드컵 때문에 대회가 중단되어 4개클럽이 공동우승
  44. 현재 NASL은 MLS의 2부리그지만 당시에는 NASL이 1부리그였다.
  45. 타사 브라질
  46. 골든볼의 공식적인 시상은 1982년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이전은 소급적용해서 FIFA에서 인정해주고 있다.
  47. 1994년에 있었던 역대 올스타팀, 2002년에 있었던 드림팀에도 선정되었다.
  48. 기자단 투표와 FIFA매거진 독자 및 위원회 투표에서 1위를 했으며 인터넷 투표 1위 마라도나와 공동으로 선정되었다.
  49. 원래는 인터넷 투표로만 선정하기로 했으나 마라도나에게 몰표가 쏟아지자 많은 이들이 펠레를 잘 모르는 젊은 축구팬들에 의해 좌우되는 인터넷 투표는 불공평하다고 주장하여 결국 선정 방식이 바뀌었다. 그리고 새로 추가된 투표에서는 펠레가 마라도나를 압도했다.
  50. 펠레는 유럽인이 아니기 때문에 를 수상할 수가 없었고 대신 2013년에 FIFA 발롱도르를 선물받았다.
  51. 월드컵에서 우승한다고 예측한 팀이 조별예선에서 광탈한 예도 꽤 된다.
  52. 1966년을 끝으로 폐지.
  53. 타사 브라질 + 토흐네이우 호베르투 고미스 페드로자 포함
  54. 인터콘티넨털컵 포함
  55. 인터콘티넨털컵 포함
  56. 인터콘티넨털컵 포함
  57. 인터콘티넨털컵 포함
  58. 인터콘티넨털컵 포함
  59. 인터콘티넨털컵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