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화

鄭鍾華. 이명은 정해리(鄭海里), 정동오(鄭東梧), 정해일(鄭海日).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1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5년 11월 4일 한성부에서 정재홍과 주계 최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할머니는 밀양 변씨이고, 남동생으로 정종원이 있었다.[1] 또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최성모는 정종화의 처남이다.

정종화는 일찍이 중국 상하이로 망명한 뒤 정해리(鄭海里)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그는 1920년 중국 상하이 프랑스 조계(租界)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의 자금 지원을 받아 조완구김두봉 등과 함께 <신대한독립보>를 발행하였다.

1924년 동명학원 교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30년 4월 상해에서 남화한인청년연맹을 결성하고 3ㆍ1 기념일 선전물을 살포하였다. 남화한인청년연맹은 정종화 이외에 유자명유기석ㆍ장도선(張道善)ㆍ정화암안공근오면직ㆍ이현근(李炫謹) 등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1933년 3월 남화한인청년연맹의 별동조직인 흑색공포단과 함께 당시 주중일본공사였던 아리요시 아키라를 처단할 계획을 세우고 자택에 폭탄을 숨겨두었다가 발각되었지만 체포되지 않은 상태로 송국되었다. 1935년 7월 28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소재불명 사유로 기소중지 처분을 받았다. 이후 상하이에서 살다가 1945년 12월에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정종화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황성신문 1907년 7월 5일자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