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홍

鄭在洪.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07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정재홍의 가계, 본관, 출생년도, 출생지 등은 기록이 미비해 전혀 파악할 수 없다. 황성신문 1907년 7월 5일자 기사에 따르면, 그의 가족이 거주하는 곳은 한성부였다고 한다. 또한 송상도기려수필황현매천야록에 따르면 정재홍은 서울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가 서울 출신임을 확실히 입증할 증거는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대한자강회월보'에 따르면, 정재홍의 호는 지산(芝山)이라고 한다. 또한 황성신문 1907년 7월 5일자 기사에 따르면, 그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며, 가족으로 모친 밀양 변씨, 처 주계 최씨, 아들 종화, 종원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기사에 따르면, 그는 남달리 효성이 지극하여 주위의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어느 학교에 다녔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장례식을 정동교회에서 거행한 사실과 인천에서 활동한 것을 볼 때, 그는 아마도 개신교 신자였으며 개신교 계열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일찍이 사업에 뛰어들어 재산을 제법 모았고, 이를 기반으로 동지 몇 사람과 더불어 교육기관 지원에 나섰다. 천기의숙(千起義塾)은 그의 주도로 설립된 인천의 대표적인 사립학교였다. 그는 교감으로 재직하면서 재산 대부분은 학교 경비에 사용했다. 또한 대한 자강회 인천지회 설립 역시 그가 주도했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돈을 아낌없이 쓰는 바람에, 사후에 그의 가족은 경제적인 곤경에 처했다고 한다.

황성신문에 따르면, 그는 을사조약 체결에 분노하여 자결하려 했다. 하지만 늙은 모친이 마음에 걸렸고, 국가의 장래를 위해 장차 무언가 실행할 일이 있다고 생각했기에 자결을 결행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돈으로 사립학교를 설립했으며, 공립보통학교를 식민교육기관으로 인식하여 공립할교 설립을 반대하기도 했다. 그러다 1907년 6월, 그는 한성부 북서 농상소에서 박영효 귀국 환영회가 열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때 거사를 결행하기로 결심했다.

1907년 6월 30일, 정재홍은 한성부 북서 농상소 내에서 거행된 박영효 귀국 환영회에 참석했다. 그는 참석한 인사들과 인사를 나누는 등 평소와 다름없는 행동으로 일관했다. 점심식사 후 시작된 주악 연주로 분위기가 고조될 무렵, 그는 갑자기 연단 앞으로 나아가 육혈포로 자신의 복부를 쐈다. 환영회장은 이로 인해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렸고, 연회는 곧 폐회하였다. 회원들은 정재홍을 어깨에 매어 대한의원으로 보냈다. 이후 경찰은 그의 품에서 유서를 발견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저 대일본 보호 한국 국민 정재홍은 뜻이 있어 나라를 근심하는 우리 동포 모인 데 한 말 씀 경고문을 삼가 드리노라. 나라 위하여 마땅히 죽을 때에 죽으면 그 효력이 천 배나 만 배까지도 미치나 그러나 죽기 싫고 살기 좋은 인정이라. 남으로 하여금 죽어 나의 살 명화를 도우려 하면 그 어찌 되리오. 하나니 이곳에서 죽어 우리 동포 제군으로 하여금 몸을 버려 나라에 도움이 될 경우에 생각게 하심이로다.

- 황성신문 1907년 7월 1일자 기사.

또한 그의 품에는 '팔변가(八變歌)'라는 시도 나왔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第一變: 나라하고 상관된 공변되게 미운 놈/ 한매에 쳐죽여서 이 내 분 풀리로다.


第二變: 잘못 쳐서 못마치면 속절없이 나만 죽네

第三變: 육혈포로 얼른 놓고 빨리되면 일 없도다

第四變: 유혈포를 당장 샀네

第五變: 남 죽이고 너 살자면 천리에 못 되리로다.

第六變: 죽이고서 나도 죽자.

第七變: 한 사람 남 죽이고, 한 사람 나 죽으면 둘이 원수될 뿐이라.

第八變: 한 사람 나만 죽어 전국이 감동하며, 이 몸에 영화되고 국가에 행복일세.

- 황성신문 1907년 7월 1일자 기사.

이후 많은 지인들이 그의 쾌유를 바라며 문병을 갔지만, 그는 결국 회생하지 못하고 1907년 6월 30일에 사망했다. <황성신문>과 <제국신문>은 정재홍이 죽은 지 이틀 뒤인 7월 2일자부터 한 달 동안 "지사 정재홍군 유족 구조 의연금 모집" 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그의 장례식은 7월 6일 정동 예배당에서 거행되었다. 이때 전국 각지에서 인사들이 추모에 동참했는데, 대표적인 인사는 이동휘, 김동완, 석진형, 윤치오 등이 있었다. 심지어 박영효도 조의금 50환을 기부했다.

야사에 따르면, 그는 이토 히로부미가 박영효의 귀국 환영회에 참석할 것을 예상하고 이토가 참석하는 즉시 육혈포로 쏴 죽이고 자신도 죽으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토가 끝내 참석하지 않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를 입증할 증거는 없다. 또한 정재홍의 장자 정종화는 상하이에서 활동했던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정해리(1895~1945)와 동일 인물이며, 민족대표 33인 중 한사람인 최성모는 정종화의 처남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정재홍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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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