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욱 (19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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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昱. 이명은 정태우(鄭泰愚).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09년 9월 20일 전라남도 영광군 영광읍 백학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고, 18살 때 영광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27년 광주공립 농업학교에 입학했다. 이 즈음 상급생인 문승수·유치오 등이 반제항일(反帝抗日)과 조선독립운동을 목적으로 결성한 성진회(醒進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8년 6월 식민지 노예교육에 반대하여 동맹휴학을 단행함으로써 동년 9월 30일 퇴학을 당하였으나 12월에 동교 3학년에 재입학하였다. 1929년 4월 조길룡 등과 함께 무등산(無等山)에서 회합을 갖고 반일과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독서회(讀書會)를 조직하고 교양부의 책임자로 선임되었으며,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참가하고 동년 11월 12일 2차 시위를 강행한 후 피신하던 중 일경에 붙잡혔다.

1930년 10월 18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보안법·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3년 6월형을 선고받았다.[1] 이에 불복하여 공소하였고, 1931년 6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으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2] 대구형무소에서 출옥한 뒤 1933년 9월 향리인 영광(靈光)에서 민족문화의 계몽과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체육회(體育會) 및 소인극회(素人劇會)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37년 9월 19일 동방의 약소민족을 옹호하는 운동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일경의 탄압으로 피검되어 1년 5개월 만인 1939년 2월 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검사분국에서 예심면소되어 목포형무소에서 출감하였다.[3]

출옥 후에도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일경의 철저한 감시하에 놓이다 보니 정욱의 가계형편은 더욱 어려워졌고, 광복 후 4년 뒤인 1949년 10월, 광주 흥신소에 입사하여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으나 6.25 전쟁에 휘말려 생활 형편이 더욱 어려워졌다. 급기야 1966년 8월에 실명하기까지 했으나,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영광지역 학생 수십 명의 후원자가 되었으며, 1996년에는 죽마고우였던 김동설(金東說:영광유치원 설립자)의 묘비를 세웠다. 2001년 9월 18일 전남 광주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6년 정욱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2001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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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