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오

兪致五.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08년 9월 6일 한성부 신당동(현재 서울특별시 성동구 신당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광주농업학교에 재학 중이던 1927년 11월 동교생 유상걸(柳上杰)·김복만(金福萬)·주당석(朱唐錫)·정동수·문승수 등과 함께 광주면 누문리에 소재한 김태호(金台鎬) 방에 모여 성진회의 목적달성과 그 추진을 위하여 협의하였다.

이후 1928년 2월에는 김광용, 김인수(金仁守), 문승수 등과 함께 광주군 서방면 두암리에 소재한 지용수(池龍洙)의 집에서 만나 졸업 후 교직 등 사회에 나아가서도 계속 연락을 취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1928년 6월에 주동학생들과 함께 광주농업학교 동맹휴학을 지도하는 한편 주당석과 함께 광주농고내 학생조직을 2개반으로 나누어 활동하면서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1929년 3월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에 재학하던 그는 1929년 11월 3일에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지원하기 위해 일본에서 광주출신 유학생 회원을 소집하여 광주학생운동에 대한 대책을 협의하다가 성진회운동과 관련하여 일경에 붙잡혔다.

1930년 10월 27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1] 이에 불복해 항소하여 1931년 6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으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2] 출옥 후 1932년 8월 17일 오후 3시경 광주군 효천면 덕남리 금당산에서 김부득, 임종근과 회합하여 동지를 규합하여 전남노농협의회를 재조직하기로 하여 그해 9월까지 강석원, 오쾌일, 유찬옥, 최종수, 이영범 등을 포섭하였다. 이리하여 남노농협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되, 겉으로는 계 또는 진흥회라는 명칭을 내세워 경찰의 수사망을 피하고, 장래 기회를 봐서 적색노동조합 또는 적색농민조합을 조직하여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 일이 발각되면서 재검거 되었고, 1934년 12월 26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미결구류일수 중 545일을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3] 이후 서울에서 조용히 지내다 1996년 4월 21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유치오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1996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 국가기록원 -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 독립유공자 공훈록[1]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