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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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독립운동가, 사회운동가, 여성운동가, 감리회 전도사.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초년기[편집 | 원본 편집]

1895년 1월 24일 평안남도 용강군 삼화면 율하리[1] 17번지에서 부친 이인수와 모친 박성일 사이의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부유한 양반 집안이어서, 그녀는 유복한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다. 5살 때 온 가족이 개신교로 개종하여 30리 떨어진 예배당에 들어갔다. 그녀의 부모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을 뿐만 아니라 신학문에 관심이 깊었고, 자녀들에 대한 교육열이 상당했다. 특히 막내딸인 그녀에 대한 교육열이 대단했다. 모친은 이효덕의 신앙교육을 위해 7살된 딸을 교회 목사에게 맡겼고, 8살 때는 진남포로 유학보내 공부시켰다. 이후 이효덕은 광혜병원의 어느 전도사집에 유숙하면서 정진소학교에 입학했다. 그녀는 이 학교에 다니면서 평생 결혼하지 않고 전도부인을 하겠다고 결심했으며, 이를 끝까지 지켰다.

정진소학교를 졸업한 뒤 1907년 숭의여자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녀가 중학교를 다니던 중 셋째 오빠 이효영이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망명하였고, 이즈음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수예와 바느질을 하며 학교를 다녔다. 1911년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향 삼화읍 교회의 초청을 받아 교사와 전도부인으로 활동하였으며, 1912년에는 모교인 숭의여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1학년 이과 과목을 담당했다. 이때 그녀는 정규 과목 뿐만 아니라 한국의 역사를 가르치는 데도 열심이었다고 한다.

독립운동[편집 | 원본 편집]

1913년 숭의여학교 교사 황애시덕, 평양숭현여학교 교사 김경희, 숭의학교 출신이자 가정부인이 된 교회 유지 안정석 등이 비밀결사 송죽결사대를 조직했다. 황애시덕과 김경희는 독립사상을 전국 여성들에게 확산시킬 목적으로 주변 인사들을 포섭하여 박현숙, 황신덕, 채광덕, 이마대, 최의경, 송복신, 이혜경 등을 규합했다. 이때 그녀도 황애시덕의 설득을 받아들여 송죽결사대에 참여했다. 이들은 결사 단체로서 교양과 애국정신을 고무시키기 위해 자체적으로 동서양 역사강좌를 열었으며, 신앙심 강화를 위해 성경공부에도 적극적이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은 망명한 애국지사들의 가족과 해외에서 들어오는 밀사들의 뒷바라지를 하는 일이었다. 자금 마련을 위해 매달 30전씩 갹출하는 한편, 회비 마련을 위하여 수예품 등을 만들어 팔기도 하였다.

송죽결사대는 비밀결사인 만큼 가입 절차가 까다로웠다. 신입회원은 회원 중 1인이 추천하여 전원이 찬성을 해야 입회할 수 있었다. 중년 회원을 ‘송형제,’ 젊은 회원을 ‘죽형제’라 불렀다. 송죽결사대는 회원 수가 점점 늘어 1916년부터는 전국적 조직으로 확대되었다. 각 지방의 책임자로는 전주에 박현숙, 평양에 황신덕, 황주에 채광덕, 목표에 최자혜, 사리원에 박경애, 강서에 이마대, 부산에 서매물, 해주에 정애경, 선천에 황성도, 김옥석, 한천에 최의경, 진남포에 최매지 등이었다.

이후 평안남도 중화군 곤양면에 있는 양무소학교 교사로 부임한 이효덕은 학생들에게 동양 3국 지도를 걸어놓고 '삼천리강산'의 주인이라는 인식을 심어줬으며, 남의 나라에 빼앗긴 강산을 꼭 찾아야 한다고 교육했다. 그러던 1919년 2월 28일 양무학교 교감이며 교회의 재무부장이었던 최응규가 독립선언서 한 장을 들고 이효덕을 찾아왔다. 그는 주일 예배시간에 교유들이 모였을 때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이효덕은 교직원과 학생들에게 3월 1일 토요일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예배당으로 모이도록 했다. 3월 1일 학생 전체가 예배당에 모이자, 양무소학교 교장 및 교직원과 학생 모두가 독립만세를 부르짖었다.

다음날인 3월 2일, 양무소학교 및 교회 인사들은 예배당에 모여 예배를 드린 뒤 지서가 있는 거리로 쏟아져 나갔다. 이에 순사들이 총칼로 위협하며 시위자들을 체포했고, 양무학교 교장과 남자 교직원들이 체포되었으며, 이튿날 새벽에 교감 최응규가 체포되었다. 이효덕은 이 소식을 듣고 스스로 지서를 찾아가 자수했다. 체포된 이는 이효덕을 비롯하여 18명이었는데, 이들은 3월 3일 중화읍 경찰서로 호송되었다. 그녀는 취조를 받으면서 6일 동안 밥 한 끼도 먹지 않고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다가 거의 실신 상태가 된 채 7일 만에 폭동을 주동한 혐의로 평양검사국으로 호송된 뒤, 다음날 대흥부 여감옥에 수감되었다. 그곳에서 동일한 죄목으로 붙잡혀온 박현숙, 김민실, 채혜수, 조충성, 라운주 등 수십 명을 만났다.

이효덕은 대흥부 감옥에서 미결수 7개월 만에 재판을 받았다. 검사가 언제부터 독립할 마음을 먹었느냐고 묻자, 그녀는 14살 부터라고 답했다. 그녀가 14살이었을 때, 당시 숭실중학교 2학년에 다니고 있었고 현재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셋째 오빠 이효영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1919년 9월 27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자 상고하면서, "조선이 독립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피고는 이를 찬성하여 만세를 부른 것에 지나지 않음으로 이는 죄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충성스러운 양민을 처벌하니 이에 불복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고등법원은 1919년 9월 27일 상고 기각 판결을 내렸고[2], 이효덕은 대흥부 여감옥에서 6개월간 복역한 뒤 1920년 4월에 출옥했다.

그녀가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모친 박성일이 별세했다. 출옥 후 이 사실을 알게 된 이효덕은 몸져누웠다. 의사의 진찰로도 무슨 병인지 알 수 없자, 그녀는 "만일 다시 살게 해주신다면 성경학교에서 공부하고 전도부인이 되겠다"라고 필사적으로 기도했다고 한다.[3] 이윽고 회복한 그녀는 서울 협성여자신학교에 입학하여 1924년 1회 졸업생이 되었다. 졸업 후 1925년부터 1928년까지 태화여자관 성경교사를 맡았으며, 근우회에 참여하는 등 활발한 사회활동을 벌였다. 1928년에는 전주 기전여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전주 YWCA에서 여성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던 1929년 9월 기독교여자절제회연합회의 총무로 와달라는 청을 수락하면서 본격적으로 절제운동에 뛰어들었다.

절제운동과 공창폐지운동[편집 | 원본 편집]

1929년 당시 전주 기전여학교에서 교직을 맡고 있던 이효덕은 그해 9월 기독교여자절제회연합회의 순회총무를 맡았다. <기독신보>는 1929년 12월 30일자에 이 사실을 알리면서 절제회 활동과 이효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조선긔독교련합절제회에서는 남감리선교부에서 파송한 어윈양을 총무로 리효덕녀사를 순회총무로 직원을 개선하는 동시에, (중략) 순회총무인 리효덕 양은 일즉이 여자신학교를 졸업하고 태화녀자관에서 다년근무하며, 특히 여자긔독교청년회회장으로 비상한 활동을 한고로 절제회에도 압흐로 만흔 발전이 잇스리라더라.

이효덕은 1929년 9월부터 50일간 광화문 황토비각 옆 광장에서 열린 전국박람회에서 첫 강연을 했다. 수천 명이 운집한 강연회였다, 그녀는 훗날 자서전에서 당시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는 사실 당황했다. 나에게는 절제회 운동 내용이 참으로 생소한 일이었다. 전혀 경험도 없으며 지식도 없이 절제 강연을 하게 되었으니 어찌 당황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이 답답한 일을 어찌할 것인가, 사무실을 뒤져 참고 서류를 찾아도 휴지조각 하나 찾아볼 수 없음을 보고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이 답답증을 풀기 위해 전임 총무인 손메례씨를 찾아가서 먼저 선전하던 원고자료가 있으면 좀 보여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성공치 못했다.

결국 이효덕은 협동총무로 있던 어윈 선교사로부터 세브란스 병원장 이용설 박사를 소개받아 문제를 해결하였다. 술과 담배의 해로운 점과 이에 대한 통계 자료를 받아 무사히 강연을 할 수 있었다. 전국 박람회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저녁 강연을 진행하면서 금주와 금연 결심서를 받았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그녀는 박람회가 끝나자마자 순회총무로서 지방 순회 강연에 나섰다. 순회총무는 각 지역 교회에서 강연을 요청하면 수시로 출장을 가서 강연회를 개최하고 절제회를 조직하는 일을 하였다. 순회총무를 초빙할 때 드는 비용의 반은 교회에서, 반은 절제회에서 보조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맨 처음 강연을 맡은 곳은 황해도 동창포에 있는 시골교회였다. 동창포에서의 강연은 3주간 계속되었는데 걸어서 산간벽지의 교회를 찾아다니며 강연을 진행했다. 만주까지도 멀다 하지 않고 순회강연을 다녔다. 장날에는 악대를 동원하여 선전행진을 하였으며, 계몽 비라와 포스터를 만들어 곳곳에 배포하였다. 또한 금주가를 부르게 하였는데, 장거리 강연을 하는 날은 장날의 명물행사가 되기도 하였다. 이 금주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아니아니 못먹어요 독한 그 술을

아니아니 못피워요 독한 그 담배 금주와 금연은 살길이야요

2. 뒷집오빠 술마시고 들어오더니 왱캉 뎅캉 가정집을 때려부셔요 얌전한 색시도 울려놓아요

3. 앞집 아저씨 담배 피고 잠을 자다가 안꺼진 담뱃불에 집이 붙어요 온 집을 다태워 재가 되었네

4. 우리 엄마 우리보고 금주하라고 우리 언니 오빠 보고 금연하라고

가르쳐 준 것이 고마웠지요.

그녀는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서는 매년 봄, 가을에 중학생들의 악대를 앞세워 금주 표어 깃발을 날리면서 가두행진을 했다. 강연을 들은 소학교 아이들의 경우 술주정뱅이인 아버지를 붙들고 끈질기게 설득하여 술을 끊게 한 아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기차가 없는 곳은 달구지로 가거나 걸어서 다녔다. 또한 그녀는 '조선기독교절제회'의 송상석의 도움을 받아 기관지 <절제>와 <금주독본> 그리고 8종의 포스터를 만들어 선전에 사용했다. 그녀의 이같은 노력에 힘입어, 절제운동은 전 국민 차원의 운동이 되었다. 여운형도 1934년 3월 <구세군신문> 금주호에 절제운동의 영향력을 인정하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넘치는 사랑과 간절한 성의로 일반 음주하는 사람에 대하여 음주해독과 금주의 이익을 경제, 건강, 위생, 도덕 등 각 방면으로 숫자적 증거와 과학적 설명으로 비록 알콜에 중독이 심하여 의지가 소멸된 사람이라 할지라도 적이 각오하고 음주를 실행할 만치 권유한 말씀은 당시 철창에 앉은 나의 심금을 느끼게 한 동시에 멀리 여러분을 향하여 외로이 나의 깊은 사의를 표하였나이다. 개인의 습관이나 사회 풍속을 개혁함에 있어서는 엄혹한 국가의 법률보다 친절한 사우의 권사로 과연 그 효력이 큰 것을 알았습니다.

이효덕은 전국에 있는 각 교회에 절제회를 조직하도록 하였다. “절제회를 조직하지 못하는 교회는 아예 교회 축에 들지 못 한다"고 할 정도로 절제회의 조직을 강조했다. 그 결과 창립 당시 6개 지회 1,508명의 회원이었던 절제회는 1928년에는 53개 지회에 회원이 3,217명에 이르렀으며, 1934년에는 116개 지회를 확보했다. 그녀는 뒤이어 공창폐지운동을 벌여 성매매를 하는 여성을 해방하자고 주장했다. 그녀는 훗날 자서전에서 공창폐지운동을 벌인 배경이 된 경험담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한번은 평안북도 회천읍으로 강연을 가던 길에 하루를 여관에서 묵은 적이 있었다. 그곳은 운전수들 지정 여관이었다. 그 당시 운전수들은 선호하는 직업으로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여관분위기는 사뭇 시끌벅적했다. 밤이 깊어지자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 되었다. 내가 묵고 있던 방 옆방에서 남녀가 실랑이를 벌이는 소리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얘기인 즉은, 한 운전수가 한 술집 여인을 강제로 취하려는 수작이었던 것이다. 화가 난 남자는 여인을 때리기까지 하였다. 그럼에도 그 처자는 속치마바람으로 도망쳐버렸다.

그녀는 이 사건을 목격하고, 술집에서 일하는 여인일지라도 정조를 지키려는 지조만 있으면 자기 몸을 지킬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 그래서 청소년들에게 정조관을 깨우쳐주기로 마음 먹었다. 그녀의 공창폐지운동은 단순한 공창폐지운동을 넘어서 여인으로서 자신의 정조를 스스로 지키도록 하는 여성계몽운동이었다. 1933년부터는 아예 어릴 적부터의 절제교육이 필요하다 생각하여 ‘영아절제회’와 청년과 소녀절제회도 조직하여 청소년들에게 절제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하였다. 1934년 1월 1일 <기독신보>에 이러한 자신의 포부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1. 조선여성과 무산아동에게 어떤 모양으로든지 가라처서 알게 하고저 하며

2. 금주단연운동을 계속할 것이며 3. 물산장려하여 우리도 생산능률을 내게 해보고저하며 4. 절제회 진흥방침으로 회원모집을 하되, 남녀외국인 누구든지 절제회 목적을 찬성하는 이는 평생회원이나 찬성 회원이 되어 협력 활동할 것이며 5. 소년절제회를 계속하고저 하는데 이일은 누구든지 자기 잇는 곳에 유년주일학교나 보통학교학생에게 이일을 실시하여 미성년금주법이 실행되기까지 활동하려고 합니다. 6. 영아절제부는 유치원자모들노 회원이 되어 자기자녀를 잘 길러 순결한 사람되도록 힘쓰게 하며

7. 1년에 적어도 열두 번의 금주 선전 행렬을 하여 민심을 고취시키려는 것입니다.

이효덕은 이 밖에도 조선여성과 무산아동교육, 물산장려운동을 벌였으며, 명주를 여러 가지 색으로 염색하여 입고 다니도록 하는 ‘채색 옷 입기’, 음식에 파리 꾀이지 않게 하는 법, 주택의 청결 등 생활의 세세한 부분을 다루는 운동도 전개했다. 또한 자식을 제대도 키우고자하는 생각 있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며 자녀 교육을 어떻게 시킬 것인가에 대한 교육도 실시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일제로부터 '불령선인'으로 지명되어 있었기 때문에, 절제운동을 벌이는 내내 감시받아야 했다. 특히 일제강점기 말기에 이러한 감시와 탄압이 심해졌다. 평안도 진남포 강연을 했을 때, '삼천리강산'이라는 말 한 마디가 문제가 되었다. 불온하다는 이유로 강연 중 연행되어 3주일 동안 심문받았다. 삼천리강산은 내선일체를 해치는 반일본적 언행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강연 중지는 물론이고 강연을 하러 갔다가 아예 하지도 못하고 돌아오는 경우도 많았다. 그녀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삼천리강산’이란 말 한마디로 오해를 받아서 중지를 당하고 3주일간이나 강연에 많은 타격을 받고 돌아왔습니다. 6개월간 어디든지 가는 허가는 해주면서 가서 보면 집회허가를 주지 않아 말할 수 없는 곤란을 당했습니다. 춘천은 두 번 가서 다 못했고, 철원, 금화, 평창등지에서는 강연을 못하고 돌아오는 마음이 얼마나 분하고 원통함은 다시 형언할 수 없으며, 또 김화읍에는 강연을 못할 뿐 아니라 새벽 3시에 경찰서에 가서 문초 시 단련을 받은 일 아직도 새롭습니다.

- 김정주, <한국절제운동 70년사(1923~1993)> p.133.

이효덕은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순회강연을 계속하다가 1936년 4월 15일 황해도 옹진 염불시에서 열린 강연회를 마지막으로 건강상의 이유와 6개월 동안의 강연 중지 처분으로 강연을 더 이상 진행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37년 절제회 순회총무직을 정식으로 사임했다. 황애시덕은 그녀에 대해 "15년이란 긴 세월을 갖은 노력과 온갖 심혈을 기울여 이 단체의 뿌리를 곤고히 했다."라고 높게 평가했다.

이후의 행적[편집 | 원본 편집]

이효덕은 절제회 순회총무직을 사임한 뒤 감리회 전도사로 활동했다. 8.15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 유각경, 박원경, 김혜경 등고 ㅏ더불어 한국애국부인회를결성했으며, 동대문교회 전도사 생활을 하면서 화양교회와 청량리 교회를 개척했다. 또한 1956년부터 1966년까지 감리교 여선교회 총무를 지냈다. 또한 3.1 운동 당시 비밀결사 활동을 함께 했던 동지들과 함께 3.1 여성동지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은퇴 후인 1968년 2월 9일 중앙일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행적을 회고했다. 그녀는 이 당시 서울 종로 5가 245번지 창동상회 내 단칸방에서 어렵게 살아야 했지만, "그런대로 후회없이 잘 살았다고 생각합니다."라며 그동안의 생애를 만족스럽게 여겼다. [4]

1978년 9월 15일 서울 감리교 안식관에서 소천했다. 향년 78세.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이효덕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