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호 (19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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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先鎬. 대한민국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04년 5월 29일 경상북도 안동군 예안면 부포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성 이씨로, 1925년 무렵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재학했다. 1925년 9월 27일 중앙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조선학생사회과학연구회의 창립을 주도하고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이들은 기관잡지 과학운동을 발행하고 사회주의를 연구했다.

1926년 4월 26일 순종의 붕어 소식을 듣고 회원 및 동창생들과 함께 제2의 3.1 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했다. 이선호는 이병립, 박두종, 박하균 등과 함께 6월 8일 경성부 서대문 밖 송림 안에서 세로 6촌, 가로 7촌 크기의 태극기 및 조선독립만세기 약 30매를 공동으로 작성하고, 6월 9일 동부 평동에 거주하는 김종찬의 집에서 장규정으로부터 빌린 명찰 인쇄기를 사용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의 문서 약 1만 매를 인쇄했다.

격문! 2천만 동포여, 원수를 몰아내자. 피의 대가는 자유이다. 대한독립만세!

이후 이선호는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동창생 권태성, 유면희, 연희전문학교 학생 권오상, 홍명식, 박한복에게 격문 몇 매와 태극기 수 매를 나눠줬다. 6월 10일 당일 오전 9시경 수은동 단성사 앞에서 국장 행렬이 지나갈 때 소지한 격문과 태극기를 살포하고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했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26년 11월 1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형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공소했고, 1927년 4월 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미결구류일수 중 6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또한 중앙고등보통학교로부터 퇴학 처분을 받았다.

1927년 9월 20일 만기 출옥한 뒤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도쿄에 거주하면서 일본노동조합 전국협의회 후카가와 지부에 가담하여 노동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참여했다. 국내로 '불온문서'를 비밀리에 보냈다가 발각되어 벌금형을 선고받았다는 기록도 있으나, 자세항 내용은 알 수 없다. 이후 일본 군사정권으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혀 여러 차례 검속되었다가 국내로 추방되었다.

이후 서울에서 가정을 꾸린 그는 1934년 큰아들 이원성을 낳았고, 1935년 이원정, 1941년 이영수를 낳았다. 하지만 6.10 만세운동 주동자였기에 일제의 감시와 억압이 심했고, 그의 식구는 극심한 생활고를 겪었다. 이후 고향으로 내려갔다가 8.15 광복 소식을 접했고, 1947년 봄 안동에서 사회주의 단체에 가담했다가 미군정으로부터 포고령 위반 혐의로 금고령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50년 6.25 전쟁 당시 서울에 있던 그는 가족을 고향으로 피난 보낸 뒤 행방불명되었다. 둘째 아들 이원정은 현재까지 생존하고 있으나, 나머지 가족은 전쟁통에 소식이 끊어졌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이선호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하고 1991년 건국훈당 애국장을 추서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