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동

柳快東. 이명은 유쾌선(柳快善), 유영조(柳靈照).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0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00년 2월 21일 경상북도 군위군 효령면 화계리에서 출생했으며, 대구부 남산정에 거주했다. 대구에서 대구청년동맹, 신간회 대구지회 간부로 활동했다. 1929년 3월 13일 신간회 대구지회 제3회 정기대회에서 간사에 선임되었고, 동년 4월 22일 대구청년동맹 제5회 집행위원회에 참여하였다. 집행위원회에서는 5월 1일 노동절 기념일을 맞아 강연, 시위행렬, 선전격문 배포, 간담회 등을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유쾌동은 기념강연을 하기로 하였다. 5월 17일에 열린 대구청년동맹 집행위원회에서 사업부 부원으로 선임되었고 8월 신간회 대구지회 집행위원회에서 선전부장에 선임되었다.

1929년 8월 28일 오후 8시경 대구부 남산정 중외일보 대구지국 앞 도로 위에서 서항수(徐桓洙)와 공모하여 다음날 8월 29일이 한일병합 기념일임을 대구부 내 조선인에게 주지시켜 독립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해 격문을 작성하여 대구부 내의 요소에 붙이기로 계획했다. 그들은 대구부 서성정 2정목 음식점 서봉순의 집에서 술을 마신 후, 밤 9시경 그 자리에서 격문을 작성했는데, 작문은 유쾌동이, 격문을 붙이는 건 서항수가 맡기로 하였다. 서항수는 신간회 대구지회에서 벼루, 붉은 잉크, 필기구를 가지고 왔고, 두 사람은 대구부 명치정 2정목 박문당에서 반지 20장을 구입하여 유쾌동의 아버지 유소식의 첩인 임순남의 집에 갔다.

유쾌동은 그날 밤 10시부터 11시까지 벼루와 붉은 잉크, 필기구, 반지 등을 사용하여 "2천만 동포들이여, 경술년의 오늘을 잊을 겁니까! 끊는 피의 기세가 다할 때까지 잊지 맙시다. 해방의 그날까지"라는 내용의 격문 10장을 작성헀다. 서항수는 임순남의 집에서 돌아오던 중 대구부 덕산정 공설 염매소 부근에서 세탁 풀 1개를 구해 8월 29일 오전 3시부터 5시까지 대구부 내 요소인 봉산정 암정서적 가게 앞의 전신주, 봉산정 168번지 백종기의 집 담벼락, 덕산정 야원의 전당포 입구 전신주, 남성정 대구 양말소의 전신주, 대화정 곡물시장 입구의 담, 원정 삼원재목가게 십자로의 전신주, 달성공원 입구 남쪽 전신주, 서장정 56번지 앞 전신주 등 8개소에 격문 1장씩 부착했다.

이 일로 서항수와 함께 체포된 그는 1930년 9월 3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8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1] 그 후 불령선인으로 낙인찍힌 그는 만주와 대구를 오가며 생활하였다. 8.15 광복 후 대구의무 노조간부로 일하다 1946년 대구 10월 항쟁에 참가했다가 미군정으로부터 위험인물로 낙인찍혀 탄압받았다. 이후 이승만 정권의 압력으로 장남 유병화와 함께 보도연맹에 가입했는데, 1950년 6.25 전쟁 발발 후 1950년 7월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고, 7월 30일 함께 수감된 30명과 함께 가창골 수직갱에 생매장당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유쾌동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여담[편집 | 원본 편집]

유쾌동의 장남 유병화 씨는 부친의 독립운동 행적 때문에 일제로부터 많은 탄압을 받았다. 초년기 때 친구한테 조선이 식민지가 된 것은 제국주의 침략을 받아 그렇게 된 것이며 독립을 해야 한다고 자랑삼아 이야기 했더니 일경에 잡혀가 일주일간 흠씬 맞았다고 한다. 그리고 광복 전에 대구상업학교에 입학했으나 입학식이 끝나자마자 요시찰 대상이던 부친의 일로 퇴학당했다. 8.15 광복 후 철도국 운송과 직원으로 일하다가 부친과 함께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부친이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때 예비검속으로 역시 수감되었다.

부친이 생매장된 후 풀려나서 국군에 징집되어 지리산공비토벌대(50연대)로 배속되어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했다. 2011년 거창골로 찾아가서 부친을 포함한 희생자들을 위한 제사를 지냈다. 그는 영남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을 살려내라. 그동안 재산 없어진 것도 보상하라.”며 울분을 토했다.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