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민

유목민(牧民)은 초지(草地)를 찾아 돌아다니면서 가축에게 풀을 먹이고 상업 활동을 하기도 하는 민족들을 말한다.

중앙아시아에서는 기원전 1700년경 전부터 이동과 전쟁이 반복되는 유목 문화가 싹트기 시작했다. 안드로노보 문화권으로 알려진 이 유목민들은 흉노 제국과 돌궐 제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최초의 유목 제국(?)[1]으로 알려진 스키타이는 카라수크 문명권을 이어받았다. 스키타이 유목민들은 그리스와 페르시아도 약탈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역시 스키타이의 공격을 받았다고 알려졌으나 스키타이와 흉노의 혼혈인 훈족의 사례[2]로 볼 때 결국 초기 흉노족일 가능성이 높다.

유목민은 생산력이 부족하여 그들만으로는 다양한 물품을 제작하기 힘들다. 따라서 물건을 만들지 않아도 되는 상업을 하거나 아니면 남들로부터 원하는 물건들을 빼앗는 민족도 있었다. 유목민들이 검소하다고 알려진 원인도 근본적으론 생산력 부족이 원인이다.

아무 장소나 돌아다니는 유목(遊牧)과 정해진 장소들을 돌아다니는 이목(移牧)이 있다.

1 특징[편집]

이들은 일반적으로 돌아다니면서 다양한 부족, 문명을 만났고 그들과 수많은 전쟁 혹은 갈등을 겪었기 때문에 엄청나게 호전적이었다. 중동 지역에서는 고작 수 백, 수 천 명으로도 소국들은 물론 심지어 중동 지역의 강대한 제국을 침략하거나 정복하기도 했을 정도이다. 특히 몽골은 중동 지역도 넘어 유럽까지 영향을 끼치면서 중세 동유럽인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사냥과 말에 익숙하고 따라서 농경민들보다 전투 병력의 비중이 극도로 높다. 또한 돌아다니면서 항상 군사적 긴장감이 돌았기에 자연스럽게 군사 훈련이 된 민족들도 많았다. 또한 유목민들에겐 학문이 잘 발달하지 않았기에 주변 문명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면 근본적인 부분인 혈통을 매우 중시했다.

자신들의 문명 수준이 낮다는 걸 알았고 상대적으로 우수한 중화문명을 받아들여야겠다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있는 일부 유목민 중 훗날 만주족은 중화문명에 역으로 묻혀버리고 마는 부정적 결과도 낳기도 한다.

이들은 문명적인 것에 별 관심이 없더라도 정보 수집을 상당히 중시하는 면이 있으며 따라서 권위가 있거나 쓸모가 있는 손님을 친한 사이가 아니더라도 격하게 환대하는 전통이 있다.

농경민들과 달리 유목을 위해 주변의 토지를 고의적으로 황폐화시키는 특징도 있다. 이것은 농경민들의 힘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유목민들의 힘을 강하게 해주었다. 그래서 이들은 쓸모가 없다고 생각되는 농경 문명을 만나면 그들을 철저히 파괴해서 문명의 파괴자란 명성을 얻기도 했다.

유목적 특성과 다른 저장 기술의 미발달로 이들은 간단히 만들 수 있는 보존 식품이 발전하였다. 유목민들은 최대한 가축을 알뜰하게 활용해야 했고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잘 먹지 않는 부위도 먹었다. 또한 염소나 양의 젖을 짜서 염소 우유를 만들기도 했고 그걸로 치즈도 만들었다고 한다. 몽골인의 음식 중엔 뼈로 국물을 내어먹는 음식도 있었는데 고려에 전해져 지금의 곰탕, 사골국의 조상이 되었다.

2 세계의 유목민[편집]

유목민은 크게 백인계 유목민과 황인계 유목민으로 나눌수 있다.

백인계 유목민으로는 고대 켈트족, 슬라브계 카자크, 고대 계열의 민족들이 있다. 이솝 우화 중에서 양치기 소년의 배경도 서양이다. 황인계 유목민은 종류가 매우 많은데 유연, 돌궐, 몽골, 거란, 선비족, 티베트, 흉노 등 다수의 북방, 서방 민족들이 거의 다 유목민이다.

유럽계, 아시아계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로마제국 북쪽[3]에 아틸라왕국을 건국한 훈족의 조상이 몽골리안[4]으로 추정되기도 해서 민족적으로는 적절하지 못한 구분법이다. 간단히 지리적으로 구분할 때는 대륙으로 구분한다.

3 편견[편집]

유목민에 대한 기록은 보통 유목민 스스로가 남긴 기록이 아닌 제3자인 농경민족이 그들과 접촉한 것에 대해 기록한 경우가 일반적이어서 농경민족의 시각이 반영될 수 밖에 없었고 의도 여부와는 관계없이 무지나 편견의 소산이 될 수 밖에 없는 여건이다. 다만 반대로 이를 너무 지나치게 의식하여 지나친 재평가를 하기보다는 균형적인 시선으로 볼 필요가 있다. 유목 문명이 결국은 농경 문명이 되어 문명화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분명 존재하긴 한다.

  • 유목민은 농업과는 무관하다 : 의외로 역사에 남아있는 유목민 중 완전히 유목생활을 하는 유목민은 의외로 많지 않은 편이다. 여건만 되었다면 농업과 유목을 같이 하는 반농반목의 형태로 많이 나타났으며, 스키타이흉노, 투르크, 티베트, 심지어 고구려까지도 반농 반목의 사회체제를 가지고 있었다. 서구 기록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유목민 국가인 스티카이의 경우 반농/반목의 유목민 이외에도 아예 상업에 전업하는 유목민과 유목생활을 하지 않는 농경유목민이 뒤섞여있었던 실정이다.
  • 농경민에 비해 유목민의 문명 수준은 뒤떨어진다 : 흉노를 시작으로 투르크-몽골 계열의 유목민들의 통치체계나 군제를 보면 좌, 중, 우의 3분할 통치에 10진법 단위로 연결되는 하부 통치구조를 가지고 있고, 다원적 연합국가의 모습이 나타나기도 하는 등 농경민족에 못지 않은 나름의 효율적인 조직체계를 가지고 있다. 또한 스키타이 계열의 출토 유적과 유물을 보면 대규모의 무덤양식과 각종 화려한 유물 등 나름의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특히 스키타이 계열의 유뮬을 보면 상당 수준의 장인들이 투입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유물들도 많으며, 이는 유목민 집단 내에서 상당한 수준의 분업화가 이루어진 사회조직을 갖추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 유목민은 수시로 약탈을 하는 민족이다 : 유목민은 늘 식량이 부족하기 때문에 부족한 물자를 보충하려는 목적으로 물자가 풍부한 농경지역을 약탈한다는 이미지가 남아있다. 그러나 이 시각은 유목민을 지나치게 야만인 취급을 하는 것으로 일단 소규모 이동을 하는 집단이라면 식량 자급자족에 대해서는 별다른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또한 소규모 씨족집단이 제대로 된 조직을 갖춘 농경지역을 약탈하는 것이 가능한지도 의문이다. 물론 부족이나 씨족단위의 유목민 집단 차원에서 인근 도시나 다른 부족에 대한 약탈을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이 또한 사막이나 초원이라는 거대한 면적 위에 점 단위 수준으로 존재하는 유목민 집단이나 오아시스 도시에 대한 공격과 약탈은 사실상 공멸을 의미하는 행동이다. 애초에 유목민 집단과 해당 도시들의 관계는 공생관계로 상호간 교역과 이를 위한 안전보장의 기간이 훨씬 더 길었다. 물론 약탈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만큼 자주 있지 않았으며 실제로는 약탈 그 자체가 목적이었던 전쟁이기보다는 국가의 논리가 우선하는 전쟁의 산물로 약탈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가능성이 높다.
  • 유목민은 도시와 상극이다 : 위의 약탈 이미지와 함께 만들어진 편견으로 유목민들도 집단을 결성하고 공동체를 만들면서 그 규모가 커지면 초원 위에 도시를 자연스럽게 건설하게 된다. 대표적으로 유목민 도시인 카라코룸이 있으며, 건축물 수준이 농경사회의 도시보다 뒤떨어질 수 있으나 이 안에서 소비되는 물자의 양은 농경사회의 도시보다 못할 이유가 없다. 실제로 유목민과 오아시스 도시국가간의 교역은 유목민 개개인이나 씨족단위에서 하는 교류보다는 유목민 도시와 오아시스 도시국가간의 집단화된 교역으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4 각주

  1. 좀 논란이 있다.
  2. 유럽 훈족-中 흉노족, 유전적으로 한뿌리
  3. 지금의 독일, 폴란드
  4. 백인 코카소이드, 황인 몽골로이드, 흑인을 니그로이드로 볼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