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항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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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恒善. 본명은 오옥인(吳玉仁).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10년 10월 3일 중국 지린성 왕청현 석두하자에서 부친 오사언(吳仕彦)과 어머니 김신경 사이의 2남 1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본적지는 황해도 신천군 용문면 성당리이다. 부친 오사언은 동청철도 건설 당시 석두하자에 단신 이주하여 철도 침목용 원목을 벌목하여 철도 건설에 투입시키는 노동을 수행했고, 1910년경 가족을 석두하자로 불러들였다. 그녀는 17세 때인 1927년 북로군정서 소속으로 김좌진의 부관이었던 유창덕과 결혼하고 슬하에 아들 유관철을 낳았다.

그녀는 유창덕의 아내로서 남편이 무기 운반과 은닉 및 연락 임무를 수행하는 걸 도왔다. 특히 1929년 1월 신민부 소속 독립운동가 40여 명이 길림성에서 회의를 하고 있을 때, 하얼빈에 있는 일본 영사관원과 중국군의 습격을 받아 유정근 등 12명이 체포되었을 때 숨겨둔 무기를 안전한 곳으로 운반하기도 했다. 그녀는 김좌진의 부인 나혜국(羅惠國)과 함께 독립군의 식사와 의복 등 보급에 진력했다.

1930년 1월 24일 김좌진이 암살당하자, 그녀는 복수를 결의하고 고강산, 김수산(金壽山) 등에게 무기를 제공했다. 이후 고강산 등이 하얼빈 주재 일본영사관을 습격했을 때, 그녀는 일제의 추적으로부터 무기를 은닉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이 일이 후에 발각되면서, 그녀는 1930년 10월 남편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부친 오사언은 자살했다. 그 후 남편 유창덕과 친동생 오해산은 1931년 10월 일본군에게 총살되었고, 그녀 역시 가혹한 고문을 받다 1931년에 4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아 길림성 감옥에서 복역하던 중 7개월 만에 출소했다.

출소 후 고문의 후유증으로 한동안 거동이 불편했던 그녀는 1935년 안중근의 누이동생인 안성녀의 아들 권헌과 재혼했다. 그녀는 남편이 중국에서 인쇄소와 정미소를 운영하며 독립군에게 군량미를 조달하는 것을 도왔다. 8.15 광복 후 귀국한 그녀는 6.25 전쟁 발발 후 부산에 피신해 그곳에 정착했고, 말년에 틈나는 대로 "일제에 억압받던 과거의 역사를 후손들이 되풀이하지 않도록 청년들이 정신을 차려야 한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완전한 자주독립을 위해 독립운동은 지속돼야 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2006년 8월 5일 부산에서 폐렴으로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오항선에게 건국포장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2006년 8월 5일 그녀가 9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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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