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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呂志伊. 본명은 여점동(呂占东), 자는 천민(天民). 중화민국의 정치가. 1968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81년윈난성 쓰마오현에서 태어났다. 1900년 향시에 급제해 거인(舉人)이 되었고, 1904년에 국비로 일본 와세다대학에 유학했다. 1905년 중국 동맹회에 가입해 총회평의, 원난 주맹인으로 추대되었으며, 1906년 〈원난〉지 주필을 맡아 중국 동맹회가 발행하는 〈민보〉에 논설을 기고했다.

1908년 3월, 여지이는 양진홍(杨振鸿) 등과 함께 원난성 독립대회를 열었다가 청 정부로부터 관비를 제명당하고 수배 대상으로 지목되었다. 이후 미얀마 양곤에서 '광화보'의 총주필, '진화보'의 주필을 맡았으며, 1909년 광화보에 "섭정왕[1]으로 흥하고 섭정왕[2]으로 망한 두 섭정"이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해 청 조정의 행태를 풍자했다.

1911년 초, 여지이는 광저우 황화강 봉기에 참가해 격문 작성 및 밀지 전달 등을 맡았다. 황화강 봉기가 실패한 후, 그는 상하이로 가서 〈민립보〉의 주필을 맡았고, 1911년 7월 쑹자오런, 천치메이 등과 함께 중국 동맹회 중부총회를 창설했다. 1911년 9월, 그는 후베이의 혁명당인과 중국 동맹회 중부총회의 의뢰를 받아들이고 홍콩에서 황싱과 합세하고 청나라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킬 예정인 우창의 신군과 합세하려 했다. 하지만 우창 봉기가 예정보다 일찍 발발하자, 여지이는 황싱의 지시에 따라 원난성으로 가서 원난성 도독부 참의를 맡았다.

이후 난징에서 열린 각 성도독부 대표연합회에 원난대표로서 참석한 그는 1912년 중화민국이 수립된 후 쑨원으로부터 난징 임시정부 사법부 차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중국동맹회 상하이 주재 기관부 부부장, 민국신문 편집장 등을 지낸 여지이는 1913년 민원국회의원,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을오 선출되었고 계축전쟁에 참가하기도 했다. 1915년, 그는 쑨원의 명을 받들어 곤명으로 가서 호국전쟁에 가담했고, 1917년 광저우에서 쑨원이 조직한 호법군정부 사법부 차장을 지냈다.

1919년 중화혁명당이 중국 국민당으로 명칭을 변경했고, 여지이는 중국 국민당 소속 당원이 되었다. 이후 그는 광저우 군정부 사법부 차장, 내정부 차장, 내정장관 대리 등을 역임했으며, 1922년 9월 중국 국민당 개선안 기안위원회 위원을 거쳐 중국 국민당 중앙참의를 맡았다. 또한 1923년 4월부터 광저우 대원수부 대리원장을 지내며 사법 및 행정 업무를 맡았으며, 1928년부터 국민정부 입법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1940년 곤명에서 6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한국의 독립운동 지원[편집 | 원본 편집]

여지이는 일찍이 독립운동가 신규식과 친교를 맺었다. 신규식은 박은식, 김규식, 신채호, 조소앙, 문일평, 박찬익, 민제호 등 30여 명의 인사들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한 뒤 한국과 중국의 혁명지사를 서로 연결하고 두 국민 사이의 우의와 친선을 도모함으로써 한국의 독립을 촉진하고자 했다. 신규식은 여지이에게 자신의 취지를 설명하면서 협조를 요청했고, 여지이는 흔쾌히 승낙하고 쑹자오런, 천치메이, 호한민 등 30여 명을 설득해 동제사에 가입하게 했다. 이리하여 1912년, 한국과 중국의 지사들이 뭉쳐서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를 조직했다.

신아동제사는 중국의 혁명인사들이 한국의 국권 회복에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협조한 1910년대 초 최대의 비밀 결사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 조직을 기반으로 해 상하이에서 중국 인사들의 협조를 받으며 정식으로 수립될 수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 점을 감안하여 1968년 여지이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