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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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一平. 본명은 문명회(文明會), 자는 일평(一平), 호는 호암(湖巖).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888년 5월 15일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읍 서부리의 양반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문천두(文天斗)이며, 어머니는 해주 이씨다. 그의 집안은 13대조 이래로 의주의 동북방인 창성(昌城)에서 세거한 무관 가문으로 선조 여럿이 무관직을 지냈으며, 상당한 부농으로 많은 재산을 축적했다. 유년기에 유복하게 자라난 문일평은 12살 때 3살 연상의 김씨와 결혼해 부인으로부터 한글을 배웠고, 17세부터 18세까지는 최해산(崔海山)의 문하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당시 서양 선교사들이 북경이나 천진 등 중국으로부터 조선에 건너와 서북 지방에서 선교했는데, 의주에서 가장 먼저 기독교 예배당이 세워졌다. 1935년 4월호 <신동아>의 '명사재씨의 학생시대 회고'에서 문일평 자신이 밝힌 바에 따르면, 그는 어릴 때 교회에서 선교사와 종종 교제했고, 그 과정에서 서양 세계를 동경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문일평은 17세 때인 1904년 미국에 유학하기로 결심하고 머리를 깎고 교회에 나가 미국 선교사들과 교제했다. 그는 미국에 유학하여 실력을 쌓은 다음 귀국하여 나라의 동량이 되고자 하는 청운의 꿈을 품었다.

1905년, 문일평은 의주 용암포에서 7백톤 급 증기선을 타고 미국 유학의 길에 올랐다. 그러나 도중에 문제가 생겨 인천에서 내려 경성을 거쳐 일본 유학으로 방향을 바꿨다. 그 이유는 여행권과 여권 등 여러 문제가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경성에 머물던 문일평은 1905년 봄에 경성에서 경부선으로 부산을 거쳐 도쿄로 건너갔다. 1931년 4월 자 <삼천리>에서 문일평이 회고한 바에 따르면, 당시 그는 일본어를 전여 몰랐으며 단지 '조센징(ちょうせんじん, 조선인)'이라는 한 마디만 배웠다고 한다.

문일평은 주일한국공사와 미국인 선교사의 소개로 감리교회가 세운 아오야마 학원 중학부에 창강생으로 입학했다. 그는 일본어를 전혀 몰랐기 때문에 일본어를 집중 공부했고, 뒤이어 미사노리 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이 곳에서 홍명희이광수 등을 만났다. 이후 일본어가 익숙해진 문일평은 1907년 9월에 메이지학원 중학부에 편입했으며, 서북지방 출신들이 주도한 태극학회에 가입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1908년 9월에 한국에 귀국한 문일평은 안창호가 설립한 평양 대성학교, 의주의 양실학교, 서울의 경신학교 등 기독교계 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으며, 부인 김씨를 정신여학교로 보내 신교육을 받게 했다. 또한 그는 서울에 있을 때 경신교장이었던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와 학감 김규식과 교류했고, 최남선이 설립한 광문회와 상동교외 내의 상동청년회에서 활동했다. 최남선은 상동청년회에서 역사를 가르쳤고, 문일평은 지리를 가르쳤다. 한편, 그는 의주의 양실학교에서 재임하고 있을 때 신민회에 참여했던 것으로 여겨지지만, 의주에서 체류한 기간이 매우 짧았기 때문에 별다른 활동은 하지 못했다.

문일평은 서양 선교사 및 기독교인들과 교제하면서 다시 미국으로 유학가기를 강력히 원했다. 그러나 당시엔 을사조약으로 인해 미국 공사관이 철수해버렸고,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이 결정되자 조선 총독부에 한국 침탈의 부당함을 항의하는 투서를 보냈다가 투옥되는 바람에 여행권을 얻을 수 없었다. 결국 미국 행을 포기한 문일평은 1911년 봄 와세다 대학 예과에 입학했고 이듬해 가을 동 학부의 정치경제과에 진학하여 한 학기 동안 공부하면서 김성수, 안재홍, 송진우 등과 교유 관계를 가졌다.

문일평은 정치사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역사학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역사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졌다. 1929년 5월 <신생>의 '역사가 문일평씨와의 문답기'에서, 문일평은 자신이 역사 공부에 관심을 가지게 된 동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하루는 땅콩을 사가지고 와서 종이 봉지를 펴니까, 그것을 싸가지고 온 헌 신보지에 '동양의 넬슨, 이순신'이라는 책 광고가 있더군요. 일찍이 넬슨이 유명한 장군인줄은 알았는데, 조선의 역사란 것도 알아보았으면 하는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문일평이 회고한 바에 따르면, 당시 조선에서는 자국의 역사에 대한 교육을 받지 못했고 단지 '통감'을 배울 때 중국 역사를 들은 것이 전부였으며, 일본에 가서야 비로소 조선 역사를 알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후 그는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대학의 서양사 강의를 들었고, 문학에도 관심이 있어 문학 강의를 즐겨 들었다. 당시 그의 교우였던 이광수는 문일평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한문의 힘도 많고 역사의 지식이 넉넉해서 내가 모르는 말을 많이 하였다. 그는 나폴레옹을 찬양하고 비스마르크를 부러워하였다. 그는 시세가 영웅을 짓느냐, 영웅이 시세를 짓느냐하는 문제를 논하기를 즐겨하였다.

하지만 그가 무엇보다 몰입한 것은 한민족이 외적과의 전쟁에서 이긴 사실을 읽는 것이었다. 그는 조선이 너무 약하고 남을 숭배만 하는 나라인 것 같아서 그것이 분하고 원통하게 생각했다. 그런 그는 조선이 대국을 이겨낸 일에 크게 기뻐했다. 훗날 그는 과거를 회상하면서 가장 통쾌한 순간으로 살수와 안시성에서 고구려의 당당한 무용이 빛난 것, 고려 현종 때에 강감찬이 거란을 꺽은 귀주대첩, 고려 예종 때 여진 정벌에 승리한 윤관의 9성 전역 같은 일을 읽었을 때를 꼽았다. 이렇듯 문일평은 학생 때부터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했다.

또한 그는 공부보다는 잡지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조선 유학생들 만의 잡지를 창건하고자 유학생친목회에 가담해 '학계보'의 편집인을 맡았다. 그러나 학계보는 창간호에 그치고 말았고, 이후에도 잡지를 창간하려고 준비하다가 1912년 말 돌연 와세다 대학을 자퇴하고 상하이로 떠났다. 문일평의 조선일보사 후배였던 유광렬은 문일평이 상하이로 간 것은 나라 잃은 슬픔에 비분강개하여 독립 운동이 비교적 자유로운 상해로 건너갔다고 밝혔다. 반면 홍명희는 문일평이 도쿄에서 모함을 받아 화가 나서 자신을 모함한 사람을 찾으려고 상하이로 갔다고 주장했다. 또한 일각에서는 문일평이 과거에 신민회에 잠시 가담했던 사실을 근거로 그가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중국으로 망명간 것이라는 추측이 제기되었다.

다만 문일평 자신이 <조광> 1938년 3월호에 올린 '나의 동경유학시대'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어느 일본인 유학생이 조선 학생들에게 모욕스런 실언을 해 조선인 유학생들이 극도로 분개해 전부 퇴학당한 일이 있었으며, 그는 이로 인해 신경쇠약에 걸려 학교를 중도에서 그만두고 상하이로 건너갔다고 한다.

문일평은 상하이와 난징에서 조소앙, 홍명희, 정인보 등과 함께 기숙하면서 중국신문사 대공화보(大共和報)에서 사원으로 근무하는 동시에 신규식이 설립한 동제사(同濟社)라는 독립운동단체에서 활동했다. 동제사는 대종교와 대동사상을 기본으로 국혼을 중시하며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하는 단체였다. 그는 이 단체에서 일하면서 기독교보다는 도교나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져 불경을 읽으면서 중국 승려들에게 불교를 가르쳐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으며, 원효대승기신론소가 중국 불교계에 많이 알려진 것을 보고 기뻐하기도 했다.

문일평은 상하이에서 중국 혁명당 지도자 및 청년 외교관들과 교유관계를 맺었고, 박은식, 신채호, 정인보, 홍명희들과 교류하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때때로 고향을 오가며 고향에 있는 땅을 모조리 팔아서 챙긴 돈을 독립 운동가들에게 제공하거나 학교를 세웠다. 그 바람에 가세가 기울고 건강이 나빠지자, 문일평은 1914년 봄에 고향으로 돌아가 집안을 돌보며 독서에 전념했다.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문일평은 3월 8일 오후 안동교회의 김백원(金百源) 목사를 만나 독립 문제에 관해 논의한 뒤 기미독립선언서의 후속으로서 또 하나의 문서를 작성하기로 했다. 3월 11일 오전 작성된 문서를 김백원에게 보낸 문일평은 다음날 오전 서린동의 한 중국 음식점에서 김백원 목사, 승동교회의 차상진(車相晋) 목사, 조형균(趙衡均)·문성호(文成鎬)·김극선(金極善)·백관형(白觀亨) 등과 함께 논의했다. 그 후 23일 오후, 문일평은 '김백원과 차상진 등 12인'의 애원서(哀願書)를 발표했다.

오늘 세계대세는 이미 무단적 실력은 가고 정의 인도가 온 것이 아닌가. 이미 압박적 역리(逆理)가 가고 평화적 정도(正道)가 흥한 것이 아닌가. 민족이 이미 무력으로써 자립치 아니하고 인도 정의로써 자존자보(自存自保)케 된 이상은 오늘 우리의 독립선언이 무슨 모순이 있으며 무슨 패리(悖理)될 것이 있으리오. 동양평화가 조선독립으로 더욱 확고할 것이 아닌가. (후략)

문일평은 조선총독부에 애원서를 제출한 뒤 보신각에서 2~3백여 명이 모인 가운데 애원서를 낭독하고 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되었다. 그는 이 일로 11월 6일 징역 8개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그가 독립 선언서 대신 '애원서'라는 제목을 달아 체포된 뒤에 처벌 수위를 예상해 보신의 방편으로 그 같은 용어를 선택했다고 비판한다.

1920년 초에 출옥한 뒤 1920년 4월 2일에 동아일보에 한시 <삼각산>을 게재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필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1920년 2월에 결성된 조선노력자대회의 교육부장관직을 맡았고, 8월에는 한성도서부서협회 출판부의 촉탁으로 근무했다. 또한 서울 중등학교, 개성 송도중학교, 경성여자상업학교 등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그러다가 1925년 8월 역사 교사 생활을 청산하고 3번째 일본 유학길에 올랐지만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이병도의 회고에 따르면, 문일평은 동경제대 문학부 사학과 동양사부에 청강생으로 재학하던 중 일본 학생에게 연개소문에 관한 얘기를 수차례 했다가 핀잔을 듣고는 모욕을 참지 못하고 곧바로 귀국했다고 한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세번째 유학을 1년도 채 안되어 포기한 것만은 분명하다.

이후 문일평은 언론 활동에 주력했다. 그는 중외일보에서 12년간 근무하며 신문에 역사, 문화, 한시 등 각종 분야에 관한 글을 기고했고, 신문사가 주최하는 각종 강연회에 참가했다. 또한 동경제국대학 사학과에 적을 두고 역사학 전공자, 사학가로 자처했으며, 조선의 역사, 문화, 문학과 관련된 분야에서 역사 보급 및 민중 계몽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한편 그는 1927년 2월에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신간회에서 중앙위원과 간사에 선칠되었고, 같은 해 8월 15일 조선물산장려회 이사로 선임되어 물산장려운동에 가담했다. 하지만 1929년 6월과 1930년 11월에 두 차례에 걸쳐 선출된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의 명단에 그의 이름이 없는 것으로 보면 신간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문일평은 1927년엔 중외일보 논설부 기자를 맡았다. 또한 그는 조선일보에서 활동하다가 1931년 신문사가 운영난으로 어렵게 되자 조선일보를 사임하고 중앙고보에서 1932년 8월까지 임시 교사로 근무했다. 그러다가 1932년 조선일보의 사정이 나아지자 다시 조선일보에 들어갔고 일주일마다 역사와 관련된 논설을 주로 기재했다. 그의 논설은 지극히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담겨 있으며, 조선일보에서 그와 함께 근무한 동료들은 그가 겸손하고 온화한 성품을 가졌으며 항일의지가 분명한 지사적 인품을 가졌다고 평가했다.

다만 문일평은 일본 식민학자들이 설립한 청구학회에 참여했다가 1932년에 탈퇴했고, 1934년 5월에 이병도 등이 설립한 식민사관 성향의 진단학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그가 왜 이런 행보를 보였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며 현재까지 한국 역사학계에서 논쟁거리로 거론되고 있다.

1939년 4월 3일, 문일평은 서울 종로구 내자동에서 지병이던 급성단독(急性丹毒)이 재발해 5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글은 1939년 유고집 형태로 암사화집(湖岩史話集)과 호암전집 3권, 1940년에 소년역사독본(少年歷史讀本)으로 발간됐다. 훗날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독립운동가로서의 공훈을 기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사상[편집 | 원본 편집]

문일평이 <전집>에 남긴 기록은 총 779개 칼럼으로, '고려개사'와 '소년역사계본'을 각기 하나로 셈하여 추가하면 781개이다. 이 가운데 정치, 외교사 관련 칼럼은 총 193개이며, 역사, 사화 관련 인물 17명에 대한 것과 역사, 평론, 사담 분야는 172개, 문화, 풍속 분야는 161개 칼럼이 있다. 그리고 민속은 13개, 문학은 27개, 고적답사 등을 포함한 수필류 칼럼이 181개이고, 경제 관련 기사는 8개이다. 이를 비율로 환산해 보면 정치, 외교사는 25.%를 차지하며, 역사 분야는 22.8%, 문화, 풍속 분야는 21.3%를 차지한다. 즉, 문일평은 정치, 외교사에 많은 비중을 두고 문화사에도 관심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민족사[편집 | 원본 편집]

문일평이 활동하던 당시 민족사학자들의 주요 화두는 한국사를 민족사란 형식으로 어떻게 정리해야 하며 교과서에 무슨 내용을 담아야 할 것인가 여부였다. 문일평은 이에 관해 1929년에 <동광>에 게재한 '조선사의 교육서에 대하여'에서 '중등 교과서' 수준의 역사서 서술 기준을 '통속, 취미, 과학화' 3가지 요소로 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문과 전문적인 학술 용어 대신에 쉬운 한글을 많이 사용해서 이해하기 쉽게 글을 써야 한다고 밝혔다. 또한 문일평은 민족의 기원 문제인 단군신화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에 대해, 단군 시대는 역사 발전 단계상 원시적 농경사회이며 단군은 하늘에 제사하는 집단을 다스리는 군주의 보통 명칭이라고 주장하면서 단군에게 과도한 '민족적' 의미를 부여한 역사 서술에 관해 비판을 가했다.

현채(玄采)의 <반만년조선사>는 태고사에 단군을 지내어 기자조선을 서술함에 있어서 기자 이후 준왕까지 41대의 모든 임금의 이름을 들어 각기 업적을 적어놓았으니, 이것은 오늘날 연구로는 수긍하기 어려운 바이다.
장도빈(張道斌)의 <조선역사대전>은 상고사에 있어 단군에 관한 서술의 분량이 그뒤 열국에 과한 서술의 분량보다 도리어 많으니 역사 서술상 정견을 밟은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왜 그러냐 하면 역사적 사실이 시간의 흐름을 따라서 내려올수록 점점 확대되는 것이 통칙이므로 역사적 서술도 이 통칙을 무시하여서는 불가한 때문이다. 그리고 고조선의 단군기를 서술함에 있어 그 서술하는 방식이 너무나 박잡(駁雜)하여 정사인지 전설인지 얼른 알아보기 어려운데가 있다.

문일평은 단군 시대 이후 민족의 계통과 관련해서 조선 민족 유일의 '독자성'보다 '보편성'을 강조했다. 그는 세계 어느 민족이든지 한 조상의 자손으로 그대로 내려온 것은 하나도 없다는 전제 아래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우리 조선인은 모두 동일한 조상으로부터 생겨난 동일한 자손이라고 설명하고 싶지마는 어찌하랴. 조선인은 동인한 조상의 자손만이 아니라 하더라도 특히 부끄러운 것은 조금도 없다. (중략) 조선인도 단군의 직계가 주체가 되어 가지고 (중략) 고대에 가장 우세하던 맥인(貊人)과 그 다임에는 한인( 韓人)과 그 다음에는 영동 방면에 있던 진인(辰人)이 서로 화합하여 삼국인을 이루었다가 그 뒤에 일통하여 신라인이 되었고, 재전(再轉)하여 고려인이 되니, 고려인은 재래의 신라인에 다시 발해인의 일부를 거두어 가지고 민족적 풀무로 일합해서 비로소 오늘날 조선인을 완성하게 되었다.

이렇듯 문일평은 단군의 직계에 맥인, 한인, 진인이 합해 삼국시대가 형성되었고, 그 후에 통일신라와 발해인 일부가 결합해 고려인이 되어 오늘날의 조선인으로 이어졌다는 민족계통도를 설정했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위만조선은 배제되었다. 그는 위만조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조선사에 있어 연대순으로 대전쟁을 꼽자면 가장 먼저 위만의 왕국과 유철(劉徹, 한무제)의 한제국과의 전쟁을 꼽지 않을 수 없다. 그 규모로든지 그 영향으로든지 대전쟁임에 어김없으나, 다만 그것이 고조선에 더부살이하던 연인(燕人)과 한인(漢人) 사이의 싸움이니 순수한 조선 대 외국과의 전쟁이 아님으로 십대전쟁의 머리로 삼고 싶지 않다.

문일평은 신채호에 대해 "우리 사학계의 선배이며, 역사가로서의 혁명적 기백을 가진 그는 신라 이래 소조선(小朝鮮)의 역사에 대해 아주 불만을 품어 깊이 묻혀있는 우렁찬 대조선의 정신을 파서 내리고 무척 애를 썼음으로, 단재라면 오늘날까지도 조선혼을 부르짖던 애국자로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라고 호평했다. 그는 신채호가 말한 대조선은 반도와 만주를 포함하는 개념이며, 만주는 "단군의 조기(肇基)로부터 주몽(朱蒙)의 패업(霸業)에 이르기까지 고조선의 대중심이 있던 곳"으로 이해했다. 또한 그는 묘청의 난을 한화파에 속한 김부식 등 유학자와 자주파에 속한 묘청 등 낭도의 최후 결전으로 봤으며, 대조선 정신을 고구려에서 찾고 소조선 정신을 신라에서 찾았으며, 왕건을 '대조선 정신의 현자(顯者)'로 평가했다.

하지만 문일평은 신라의 삼국 통일에 관해선 신채호와 다른 시각에서 바라봤다. 신채호는 신라의 삼국 통일을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봤지만, 문일평은 신라의 통일 노력을 긍정적으로 이해했다. 그는 신라의 대당 외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당의 연호까지 사용하니 법흥왕 이래 115년간이나 자국건원을 행하여 오던 신라로서 이로부터 그것을 전폐하고 남의 연호를 쓰게 된다는 것은 얼마큼 국가 체면에 손상되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나, 그 속에 묻히어 있는 신라 정치가의 대강자(對强者) 조정책(調停策)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신라의 삼국 통일의 원인에 대해 "신라의 인화가 곧 그 국가적 성공의 기본적, 중심적 요건이 되었다"고 봤으며, 김춘추문무왕을 훌륭한 군주로 평가했다. 또한 문일평은 1931년 12월에 열린 한 좌담회에서 "조선에서 제일 나쁜 인물"을 선정해달라는 질문을 받자 연개소문의 아들로 당에 복속한 연남생을 지목하며 "큰 조선을 작은 조선으로 만든" 것이 그 이유라고 밝혔다. 즉, 그는 '소조선'의 역사적 계기에 관해 신라 뿐만 아니라 고구려 내부에서도 그 원인이 있다고 봤던 것이다.

문일평은 역사 가운데 '중세사' 연구에 주력했다. 그는 자신이 전문으로 연구하는 분야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고대에서 근세로 넘어가는 그 중턱의 일", 즉 고려사에 중점을 둔다고 밝혔다. 그는 실제로 1924년 '고려개사(高麗槪史)'를 집필했는데, 이 글은 민족주의 사학에서 고려사를 연대사로 정리한 것으로는 유일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문일평은 왕건을 대조선 정신을 계승한 인물로 높이 평가했고, 귀주대첩을 거란 남하와 고려 북진의 일대 충돌으로 봤고, 거란족, 여진족, 몽골과의 전쟁을 통해 고려인의 용기와 탄성(彈性)을 확인하고자 했다. 아울러 그는 최영의 요동정벌 계획이 위화도 회군으로 수포로 돌아간 것에 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자강(自强) 자조(自助)적 존엄한 대조선 정신이 최영의 죽음을 따라 거품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또한 문일평은 고려의 건국은 남북 양조선의 문화를 동시에 합치하여 진정한 의미 아래에서 전적 통일의 물심 양요소가 결합된 것을 의미한다고 봤다. 즉, 신라발해라는 '남북조'가 고려의 건국으로 인해 하나로 되었으며 이를 통해 민족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반면 조선 시대 정치사에 대해선 일관적으로 '사대주의', '당론'으로 대표되는 부정적인 요소로 평가했다. 특히 개항 이후 근대사의 전개 과정에서 조선 지도자의 국제적 문맹을 강하게 질타했다. 세종대왕의 4군 6진 개척에 관해서는 "이때에 한하여서만 다소 적극적 활동을 했다"고 보고 효종의 북벌을 높게 평가하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조선시대 초기부터 한말까지의 정치사는 '발전/진화'의 맥락에서 벗어난 것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그는 민족사를 구성할 때 부정적인 요소를 조선 역사 혹은 조선 민족의 고유한 것 혹은 고정적인 것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그는 이를 민족성의 탓으로 돌리는 '식민사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응수했다.

조선인을 유순하고 평화적이라 함도 일면관이요, 사납고 투쟁적이라 함도 일면관이다. 조선인도 요컨대 시세나 환경의 변화를 따라 평화적도 되고 쟁투적도 됨은 다른 민족과 차이가 없을 것이다.

문화사[편집 | 원본 편집]

문일평은 한말 이후 조선이 식민지가 된 상황을 어떻게 해석할 지에 대해 '문화사'에서 해답을 찾고자 했으며, 체계적인 조선사의 서술 속에서 문화 분야를 강조했다. 그가 문화사가 무엇인지에 관해 정확하게 밝히지는 않았지만, 대략적으로는 '문물제도'와 함께 종교, 문학, 예술, 산업 및 풍속 등을 의미할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그는 정치사와 구별되는 경제자를 범주 설정하고, 이를 넓은 의미의 문화사에 포함시켰다.

당시 조선문화 연구는 '조선적인 것'의 독자성, 우수성을 강조하는 데 초점을 뒀다. 즉, 식민지 시기 문화사 연구는 일제에 대한 '정신적' 저항의 방안이었다. 특히 조선 문화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것은 조선 문화의 '유일성'을 강조하는 경향으로 연결될 수 있었다. 이러한 유일성의 강조는 조선 문화 가운데 세계 '최초', '최고'라는 문화 유적과 사상이 강조될 수밖에 없었다. 문일평 역시 이러한 흐름에 가담해 한국만의 독창적인 문화를 적극 강조하고 한국이 세계 최초로 제작한 것으로 여겨지는 문화 유산을 높이 받들었다. 다만 문화사 서술에서 민중의 역할을 강조하거나 과학적 방법을 적용하는 데서 다른 사학자들과 구별되는 면모를 보였다. 문일평은 민중적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소수인에 의해 지은 문명은 귀족 문명이오, 다수인에 지은 문명은 민중문명이다. 전자의 특징이 이상적에 있다면 후자의 특징은 실제성에 있다. 이미 벌써 이조 문명이 고려보다 실용적 색채를 짙게 띠므로 미래의 민중문명을 암시 혹은 잉태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즉, 그는 조선이 비록 정치적으로 고려에 비하면 부정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문화 면에서는 시간적 추이에 따른 발전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또한 그는 '경제관계로 본 조선 문명'에서 전근대시기 귀족 계급 중심의 문명에 비판적인 입장을 표명하면서 민중에 기초한 신문명이 금후 세워질 것을 전망했다.

문일평은 1930년대 중반부터 조선 역사의 과학화를 주장하면서도 정신적 요소인 '조선심(朝鮮心)'을 강조했다. 그는 개인과 공동체 사이의 구별 속에서 "민족적 아(我)", "군체(群體) 아", "조선 아"라고 정의할 수 있는 민족 단위의 공통체의 공통적인 요소가 있다고 봤다. 아울러 그는 국가와 민족의 단위의 정신적인 요소를 여러 용어로 표현했는데, 그중 자주 사용한 용어가 바로 조선심이었다.

중국사상 그것도 아니요, 인도사상 그것도 아니요, 조선사상은 어디까지 조선사상이다. 비록 예로부터 조선이 중국, 인도 사상의 감화를 많이 받았으나 특수한 환경에서 특수한 생활을 하게 된 조선인은 구원한 역사를 통하여 일종 특수한 조선심을 형성함에 이른 것으로서 그것이 세종에게 의하여 가장 구체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세종은 조선심의 대표자라고 부르고 싶다.

조선심은 조선 후기 실학을 평가할 때도 적용되었다. 문일평은 실학을 "영조, 정조 시대에 성행하던 실사구시의 학풍"으로 보고, 그것이 반도 유학의 공리 편중에 대한 일종의 반동으로 생겨났으며, 실사구시의 근본 정신은 자아를 재검토하여 재수립하려 함인데 그 방법에 있어서는 먼저 근본 문제인 경제적 시설부터 착수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그는 실학의 실사구시 정신을 조선심의 재현이라고 평가했다.

한편 문일평은 조선심과 훈민정음과의 밀접한 관련성을 강조하면서, '조선학'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근일에 사용하는 조선학은 흔히 애급학과 앗시리하학과 병칭하는 경향이 있다마는 여기는 다소 그 의미가 다르니 넓게는 종교, 철학, 예술, 민족, 전설할 것 없이 조선 연구의 학적 대상이 될 만한 것은 모두 포함한 것이나, 협의로는 조선어, 조선사를 비롯하여 순조선문학 같은 것을 주로 지정하여야 하겠다.

문일평은 한자와 한학을 '우리 문화'에서 배제하고자 했으며, '민족문학'을 "정음 반포 이후로서 순정(純正)한 우리 문학의 창시(創始)를 말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또한 조선 문화를 민중적 관점으로 적용할 때, 원효대사이황은 귀족 문명시대에 있어서 사상계의 대표자가 되었다면 세종대왕은 장차 오는 민중 문화시대에 가서도 사상계의 지도자됨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다만 문일평은 훈민정음 발표 이전에도 옛날 신라인이 노래한 것을 기재한 향가 등 '민족 단위'의 문학은 한 문화에 중독되기 전의 것으로, 그 정신과 관념만으로 민족의 독특한 문화를 수립함에 있어 불가결의 한 요소가 될 것이라며 높게 평가했다. 그리고 고대 신화를 무작정 천시하고 배척하는 것도 옳지 않으며, 그 속에서 고대인들의 순수한 문화적 사랑을 고려하여 보호를 꾀하는 것이 역사적 문화를 존중하는 본의라고 주장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