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생

안현생 가족.jpg

1920년대 상하이에서 거주하던 시기 촬영된 사진. 오른쪽부터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 동생 안정근, 안정근의 아들 안원생, 안중근의 딸 안현생, 안공근의 아들 안우생.

安賢生. 대한민국독립유공자 안중근의 딸. 그러나 남동생 안준생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에게 참배했다는 이유로 친일 의혹을 받는 인물이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02년경 황해도 해주군 해주읍 동문 밖에서 부친 안중근과 모친 김아려 사이의 2남 1녀 중 외동딸로 출생했다. 남동생으로 안문생[1], 안준생이 있다. 1909년 10월 26일 부친이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뒤, 할머니 조마리아, 작은 아버지 안정근, 안공근 등이 중국으로 망명했다. 이때 조마리아는 손녀 안현생을 명동성당 뒤편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본원의 프랑스인 수녀에게 맡겼다.

이루 수녀원에 맡겨져 조용히 살아가던 안현생은 가족이 상하이에 정착한 뒤 자신을 부르면서 상하이로 건너갔고, 그곳에서 황일청과 결혼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잘한 뒤 상하이가 일본군에게 공략되었을 때, 안정근, 안공근 등은 모친 조마리아를 모시고 대피했지만, 그녀는 어머니 김아려, 남편 황일청, 남동생 안준생과 함께 상하이에 남아 곤궁한 삶을 이어갔다.

1939년 상하이에 거주하던 친일파이자 상하이 조선인회 회장이었던 이갑녕을 단장으로 하여 '재상하이 만선시찰단'이 조선 총독부의 초청 형식으로 조선을 방문했다. 여기에는 안현생의 남동생 안준생과 남편 황일청고 포함되었다. 만선시찰단은 조선 총독 미나미 지로와 면담한 뒤 안중생만 남기고 전원 돌아갔고, 안준생은 박문사를 방문하여 이토 히로부미의 명복을 빌고 이토의 아들인 이토 분키치와 만나 부친의 행위를 사죄했다.

1941년 3월 26일, 안현생은 남편 황일청과 함께 조선을 방문해 박문사로 가서 이토 히로부미의 위패에 참배했다. 이후 그녀는 남동생과 함께 일제 형사들의 감시와 '아버지를 배신한 자식'이라는 눈총에 시달리며 어렵게 살았다. 미주 신한민보는 안현생의 박문사 참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3월 26일은 고 안중근 공이 사생취의한 기념일임으로 왜놈이 꼭 이날 공의 영애 부처를 잡아다가 강제 자복을 받았고, 그 전에 공의 장자 안준생 씨를 잡아다가 또한 이와 같이 하였다. 이제 왜적의 함락을 받은 상해에서 아무 보호 없는 그 유족을 잡아다 암만 강제 자복을 받기어든 엇디 죽은 이등의 죄를 가리우랴. 만일 이등의 귀신이 있고 또 무엇을 안다명 이와 같흔 은줏(못난 짓)을 도리혀 북그러워 할 것이다.

8.15 광복 후인 1945년 12월 4일, 한교민단 단장을 맡고 있던 남편 황일청이 귀국행 배를 타려고 가족과 함께 충칭에서 상하이로 내려오던 중 여관에서 광복군 인사에 의해 총을 맞고 숨졌다. 안현생은 이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고 한동안 몸져 누웠다. 1946년 11월 11일 남편의 유골을 가지고 두 딸 황은주, 황은실과 한께 귀국한 그녀는 명동성당에 의탁하여 전구 장사를 하며 지냈으나, 사기를 많이 당해 매우 곤궁하게 지냈다고 한다.

6.25 전쟁 발발 후 대구로 피난간 그녀는 1953년 4월 1일 대구 효성여대[2] 불문학 교수로 부임하여 1956년 3월까지 3년간 재직하였다. 1956년 월간지 <실화> 4월호에 자신의 삶을 다룬 수기를 게재하기도 했다.[3] 이후 서울로 돌아와서 단칸방에서 여생을 보내다 1960년경 고혈압으로 사망했다.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안분도'로도 불린다. 안중근은 생전에 안문생이 천주교 사제가 되기를 바랬지만, 1911년 여름 안문생이 일제 밀정으로부터 독이 든 과자를 먹고 급사하면서 이뤄지지 못했다.
  2. 대구 가톨릭대학교의 전신
  3. “고국에 돌아와도 의지하고 찾아갈 곳이 없었다” - 시사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