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용봉

안용봉.jpg

安龍鳳. 이명은 김상수(金尙洙, 金相洙, 金尙洙), 김성수(金性洙), 김학주(金學周), 김학동(金學童), 김학수(金學壽), 김수개(金壽介), 안승현(安承賢), 김명산(金命山), 김달문(金達文), 김종수(金鍾洙). 창씨명은 야스이에 루우호오(安家龍鳳).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06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12년 4월 1일 경상남도 창원군 상남면 퇴촌리에서 출생했다. 1933년 6월 경성에서 안승락(安承樂)으로부터 <자본주의의 음모>, <제2빈핍물어> 등 서적을 교재삼아 사회주의 사상의 이론 및 실천에 관한 교육을 받았다. 1934년 3월경 영등포에서 김희성(金熙星)을 만나 사회주의 사상을 교육하였고, 1935년 1월 김희성의 소개로 정재봉(鄭載鳳)과 만나 수차례 모임을 갖고 국제정세에 대한 검토, 자본주의국가 대 소비에트전쟁을 준비하는 적색노동조합 등의 실행에 관한 협의를 하였다.

1935년 2월부터 3월 하순경까지 동지들과 수차례 만나 파벌을 배격하면서 운동할 것, 코민테른이 발표한 아래로부터의 통일전선의 이론을 채용할 것, 비합법적색노동조합을 조직해야 할 것 등을 협의하였다. 7월에 당시 암촌(岩村) 제사공장 직공이던 김희성과 모든 직공을 궐기시켜 동맹파업을 실행하였다. 이후 당국의 수사를 피해 창원, 부산 등지를 전전하며 활동하다 1941년 3월경 체포되었다. 1941년 3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1] 이에 불복해 공소하였으나 1941년 5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 취하하여 형이 확정되었다.[2]

출옥 후 일제로부터 불령선인으로 낙인찍혀 감시받다가 8.15 광복으로 해방의 몸이 되었다. 1947년 광복절 창원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광복 2주년 기념식장에서 “지금의 해방은 껍데기 해방”이라 연설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대해 "남북을 영원히 가르기 위한 선거"라며 반대 입장을 확고히 했다. 아들 안인영 씨의 회고에 따르면, 안용봉은 창원 죽전 정미소에서 투표가 있는 걸 보고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들아, 이 선거는 해서는 안될 선거다. 우리만 선거하면 남과 북은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없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 출범 후 좌익 인사로 분류되어 진해경찰서에 여러 차례 끌려가 갖은 고초를 겪고 보도연맹에 강제 가입되었고, 6.25 전쟁 발발 후 아무런 재판 절차 없이 창원 삼정동의 한 골짜기에서 총살형에 처해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안용봉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