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노술

沈魯述(또는 沈魯術).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국가유공자 공훈록> 13권에 따르면, 심노술은 황해도 평산 출신이라고 한다. 그러나 일제의 비밀 기록에는 그가 연안군 방동면 출신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그는 1907년 박정빈의 평산의진에 가담해 김정환(金正煥)·한정만·인두정(印斗鼎)·변승준(邊承準)·신도희·신성보(愼成甫) 등과 함께 중대장으로 선임되었다. 그 후 1907년부터 1908년 사이에 황해도 해주·연안·평산 등지와 연해의 여러 도서(島嶼)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순사주재소 및 출장소를 공격하는 등 무력투쟁을 전개하였다.

평산의진은 여느 의진처럼 의병대장이 직접 의병을 이끌고 산야를 누비면서 의병투쟁을 벌이지 않았다. 그들은 선봉부대, 5~7개 중대, 돌격부대, 마산부대로 나누어 실제 의병투쟁은 중대장과 돌격장, 마산 도총장 중심으로 운용되었고, 이들 부대가 연합작전을 전개할 때는 선봉장 이진룡이 부대를 총괄하는 대대장으로, 심노술은 김정안(金正安)·한정만 등과 함께 중대장으로 활약하였다.

이후 1908년 2월 박정빈이 유인석이 망명한 연해주로 향하자, 평산의진은 이진룡 의병장을 중심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이때 심노술·김정안·한정만 등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개별적으로 의병대를 이끌었다. 일제는 <폭도에 관한 편책>에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적도(賊徒) 봉기 이후 한때는 그 수가 6~7백 명에 달하여 여러 개의 부대로 분리되어, 우 판관(禹判官:평산 판관 출신 우병렬)이 은밀히 전체를 지휘하고 있었고, 더욱이 신경칠(辛景七)은 많은 부하를 거느리고 해주·강령 기타의 여러 군을 돌아다녔고, 심노술과 강춘삼은 해주·연안·평산의 여러 군과 연해(沿海) 여러 섬에 출몰하였다.


또한 이야천(李野天)은 재령군에, 김상현(金相鉉)은 신천군에, 한경옥(韓京玉)과 허덕천(許德天)은 옹진군에, 기타의 소집단은 각지에 출몰하여 주재소·출장소의 순사 및 수비병을 습격하는 등 한때 창궐을 극하였으나, 수색·토벌이 진척됨에 따라 혹은 토벌되고, 혹은 귀순하고, 혹은 도주하는 등 근래에 와서는 일부 방면을 제외하고는 거의 진정하기에 이르렀다.

다만 심노술·강춘삼은 아직도 수십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평산군 서쪽, 해주군 사이의 바다와 육지를, 장명서(長明瑞)의 일파는 해주군 서부지방에 출몰하고 있으므로 목하 수비대와 협력하여 수색에 전념하고 있다.

황현매천야록에도 심노술 등 의병장들의 활약상이 기록되어 있다.

경기와 해서지방에는 의병이 치열하여 양주는 황재호(黃在浩), 광주는 김춘호(金春浩), 삭녕은 연기호(延基浩:연기우의 이명.), 파주는 이인순(李仁順:윤인순의 오기), 평산은 이진룡, 연안은 심노술·이근수(李根洙) 등이 있었다. 그들의 수는 1천명 내지 1백명으로 수효가 같지 않고 혹은 10명도 있었으므로 백성들은 살 수가 없었고, 일본인들도 매우 괴롭게 여겼다.

심노술 의진이 황해도 평산군 도평산(桃坪山)에 본거지를 두고 맹렬하게 의병투쟁을 전개하자 일본군은 수비대와 헌병대를 동원하여 진압에 나섰으나 실패를 거듭하였다. 마침내 해주경찰서장은 심노술 의병장에게 귀순 권유서를 발송했다. 그러자 그는 다음과 같은 답신을 보냈다.

을미년의 변은 천고의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받았고, 신조약(新條約:을사조약)의 체결에 이르러서는 간사함을 품고서 의사·충량을 죽이고, 철도 기타를 점령하고, 산림천택을 강요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노예로 삼았다. 귀하의 이른바 보호라는 말은 참으로 이에 있는가? (중략)


만약 그 성유(聖諭:융희황제의 의병해산 조칙)와 같음이 원래부터 폐하의 마음이 아니라 만약 조약을 폐기하고 세계열강에 자주 독립을 선언한다면, 황제 폐하의 명령이 내리는 날 감격하여 즉시 덕화(德化:황제 폐하가 덕을 베풂)의 말에 복종하였을 것이다. 불복종함에 있어서는 천토만벌(千討萬伐:수많은 의병 토벌)을 당해 인류가 다함에 이르러도 나라를 위한 마음을 멸할 수 없을 것이다. (후략)

<통감부 문서>제6권 `폭도수령 심노술 경기도 교하 지방 출몰 건'(헌기 제591호. 1909.03.18.)에 따르면, 심노술은 부하 100여 명을 이끌고 3월 7일 한밤중에 교하군 북면 낙하진을 도선하여 배천군 방면으로 이동했는데, 그 중에는 청국인 몇 명이 참가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그의 부하 지홍일(池洪一)이 150여 명을 모아 강화도 각 방면에 출몰했으며, 이근수(李根守)·지석남(池石南) 2명이 이끄는 각 수십명의 집단이 호응했다고 한다. 일제는 이런 심노술을 `주괴(主魁)'로 칭할 만큼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했다.

그러나 1908년 겨울부터 이듬해 봄까지 일본군의 공세가 가해지자, 심노술은 만주로 망명했다. 일제 정보기록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융희 원년 폭도(暴徒) 봉기 이래 황해도 내 각지를 배회하며 다수의 부하를 거느리고 위대한 세력을 떨치며 횡포를 마음대로 부리던 수괴(首魁) 심노술은 그 후 토벌대의 수색이 엄밀해짐에 이르자 마침내 도내에 잠복할 수 없게 되어 지난해 3월경, 만주 안동현을 거쳐 만주 지방으로 도주했다는 풍평(風評)이 있었는데, 이번에 재령경찰서에서 파견한 토벌대에 의해 해주군 대덕면내를 수색 중, 심노술은 1명의 동행자를 데리고 평산 지방으로 비밀리 온 것 같다.


그는 통상 한인이 입는 흰 두루마기를 걸치고, 양반용의 갓(상품의 검은 갓)을 쓰고, 등에는 괴나리봇짐을 지고 지팡이를 짚고서 3월7일 오후 8시경, 대덕면 아현동 귀순자인 조대순(趙大順)의 집에서 1박을 하고, 다음날 아침에 조대순으로 하여금 국전동(菊田洞) 부근까지 길 안내를 하게 하더니, 서쪽을 향해 떠났다는 것을 탐지했다.

수색대는 즉시 그 귀순자에게 대해 힐문(詰問)하자, 사실이 틀림없다고 대답하므로 어떻게 하여 심노술임을 알 수 있었냐고 추궁하자, 길 안내 후 이별에 즈음하여 내가 심노술이라고 인사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즉시 서방 고산면 지방에 대해 엄중한 정찰을 했지만 끝내는 행방불명이라고 하므로 즉시 관하 각 경찰서 및 헌병 분견소에도 통지하여 목하 엄중 수배 중에 있으므로 이에 보고한다.

이후 심노술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심노술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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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