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형우

申瀅雨(또는 申瑩雨). 이명은 신규우(申奎雨). 창씨명은 오카야마 에이조오(岡山英三).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2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22년 12월 31일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신남리에서 부친 신열휴(申洌休)와 모친 유경열(柳卿洌)의 4남 1녀 가운데 3남으로 출생했다. 그가 태어난 순창읍 신남리는 무수동(舞袖洞)으로도 불리며 순창읍 남산리와 더불어 고령 신씨 집성촌이었다. 그의 집안은 항일운동 기조가 강했다. 특히 신형우의 조부 신익구(申益求)의 맏형인 신은구(申溵求)의 장손인 신용우(申用雨)는 1929년 5월 서울 중동학교 재학중 고학생 모임인 갈돕회 회원으로 활동했고, 1930년 광주학생항일운동에 호응하여 경성의 남녀 중등학교 학생들이 시위에 참가하고 동맹휴학을 단행케 하는 등 항일학생운동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이로 인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년 2개월의 징역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와 경성형무소에서 복역한 뒤 1931년 11월 22일 만기 출옥했다.

신형우는 이러한 항일 기조가 강한 집안에서 성장하여 1938년 전주 북중학교에 진학했다. <전주북중학교 중퇴자부대장>에는 1941년 3월 31일 4학년 때 "가사 형편" 때문에 자퇴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하지만 동창인 송현섭과 여동생 신정우, 사촌 여동생 신순식 등의 진술에 의하면, 그는 한국을 비하하는 발언을 한 일본인 교사에게 대들다가 사실상 제적당했다고 한다. 그 후 일본으로 유학간 그는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츄오구 카스미가오카에 소재한 하세가와 목장에서 우유배달 등을 하면서, 도쿄 니시간다에 있던 이과계 연수학관에 다녔다. 당시 사촌형 신승우(申升雨)는 도쿄 메이지대학 2학년에 재학하고 있었고, 친척 신규식(申奎植)[1]은 신승우와 같은 집에 거주하면서 도쿄무선학교에 재학했다.

1941년 9월경, 신승우는 도쿄 센슈대학에 다니던 김용규(金容珪)과 만났는데, 김용규는 1934년 10월 일본에 건너간 뒤 공산주의 사상을 통한 조선민족해방을 꿈꿨다. 신승우는 친척 신형우와 신규식을 김용규에게 소개했고, 신형우는 요코하마 하세가와 목장에서 같이 일하면서 공부하던 토요시마 상업학교 학생 송호연(宋湖連), 일본대학교 학생 이하라 소노오(伊原園雄), 세이소쿠 영어학교 학생 박득규(朴得奎) 등을 신승우, 신규식, 김용규에게 소개했다. 이렇게 친분을 쌓은 신형우 등 7명은 1941년 10월경부터 김용규의 지도하에 김용규가 일하던 도쿄 오키쿠보의 우유상점, 신형우가 일하던 요코하마 하세가와 목장 등에서 여러 차례 모임을 가지면서, 다음과 같이 합의했다.

지나사변(중일전쟁)은 점차 제2차 세계대전으로 확대, 진전하고 일본 자본주의는 몰락하기에 이를 것이다. (중략) 이때에 우리 민족은 이와 같은 압박으로부터 해방되어 참된 독립국가를 건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은 사회주의 문헌 등을 읽으며 의식을 고취했다. 그러던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신형우 등은 "일본은 경제적 문제로 패할 것이며, 이러한 기회에 일본 식민지 정책에 헐떡이는 조선민족의 영원한 행복, 번영을 얻기 위해서는 일본제국주의의 국체를 번혁하여 독립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조선인들의 모임에 출석하여 민족의식 지도, 계몽과 함께 조선독립을 위해 활동하자고 설득하였고, 조선민족이 일제히 봉기하여 독립을 완수할 수 있는 기회로 삼기 위해 비밀 모임을 가졌다. 1941년 12월 10일 요코하마의 신형우가 거주하던 집에 신형우, 신규식, 이하라 소노오, 박득규 등이 모여 태평양전쟁 발발에 동반되는 사회정세를 분석, 비판하고 급히 조선에 신규식을 파견하여 “독립운동을 실행할 것” 등을 결정하였다. 다음 날 11일 신규식은 도쿄로 김용규를 방문하여 조선에서의 독립운동방침에 관하여 여러 가지로 협의하였다.

1941년 12월 12일 오전 요코하마시 나카구 아가몬쵸의 숯가게에서 신형우, 신규식, 이하라소노오, 송호연, 박득규가 회동하여 신규식이 조선에 돌아간 후의 연락방법에 관하여 협의하였다. 같은 날 오후 요코하마 쓰다마치식당에서 다시 5명이 모여 신규식의 송별회를 개최하고, 다음과 같이 협의했다.

조선을 일거에 독립시키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당면의 운동방침으로써 우리 동지는 급히 귀선(歸鮮)하여 농민층에 파고들어 민족의식 계몽과 조직의 확대와 강화를 도모해야 한다.

그러나 요코하마 하세가와 목장의 조선인 고학생 신형우 등 4명의 언동에 대해 계속 정탐하고 있던 요코하마 경찰은 도쿄의 “민족주의 분자” 김용규의 지도 하에 계속 “민족독립운동”을 책동하고 있는 것을 알아내고 1941년 12월 13일 신형우를 비롯한 관련자 7명을 일제히 검거했다. 이후 6개월에 걸쳐 요코하마 경찰의 심문을 받았고, 1942년 5월 25일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요코하마지방재판소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1942년 8월 4일 조선독립운동사건 피의자로 기소되었다. 1943년 12월 24일 요코하마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2]

진실화해위원회는 신형우가 기소된 이후 수형되었는지 여부 등을 확인하기 위해 2006년 11월과 2008년 10월 2회에 걸쳐 일본 법무성을 직접 방문하여 판결문 등 관련자료 제공에 대한 협조를 요청했고, 2007년 4월 공문으로 관련 자료를 다시 요청했으며, 2008년 10월 요코하마 형무소를 방문하여 요청했다. 그러나 모두 "해당 자료가 없다"는 답변만 받았다. 2009년 6월 일본 국회도서관, 가나가와현립 도서관 등을 방문하여 관련 신문기사, 판결문 등을 조사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신형우 큰형의 딸인 신순식은 신형우의 형무소 수형 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내가 몇 살이었는지는 기억은 못하지만 작은아버지 신형우가 순창읍 남산리의 일가 신규식이란 분하고 같이 일본에서 일본경찰들에게 체포되어 순창에 왔다. 그리고 일본 경찰이 다시 신규식씨랑 작은아버지를 일본에 데리고 갔다. 그 후 요코하마형무소에 3년인가 4년인가 계시다가 출소하셨는데, 둘째 작은아버지가 일본 요코하마 형무소에 가서 작은아버지 신형우를 데리고 왔다. 그 당시 순창군 순창면 무수리의 같은 집에서 살았기 때문에 생생하게 기억한다.

신형우의 아들 신윤식은 중학교 1학년 때 생모로부터 “부친이 일본으로 건너가 항일운동을 하시다가 옥고를 치르셨는데 순창 작은아버지가 요코하마로 가셔서 병보석으로 데리고 왔다”고 들었고, 신청인의 처 김재경은 “결혼해서 얼마 안 되어 순창에 갔을 때 순창 작은어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인데, 당시 작은아버지가 순창의 많은 재산을 팔아서 요코하마 형무소로 가서 데리고 왔다고 들었다”고 진술하였다. 신형우와 절친했던 북중학교 동창 송현섭은 “나는 신형우가 일본에서 수형생활을 마치고 돌아오자 순창 무수동으로 형우를 만나러 갔다. 그때 형우로부터 도쿄 쓰가모(巣鴨)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한 것으로 들었다”고증언하였다. 이로 볼 때 신형우는 요코하마 형무소 또는 도쿄 쓰가모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형우는 출옥 후 고향으로 돌아갔고, 1950년 12월 3일 자택에서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20년 신형우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 진실화해위원회, <신형우의 재일 항일독립운동의 건>, 2009.[1]
  • 국가기록원 -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