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창희 (187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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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昌熙.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77년 5월 21일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그는 김구의 아내 최준례의 어머니 김부인의 맏사위로, 김구의 손위 동서이다. 그는 1904년 5월 21일 제중원의학교에 입학하여 제1회 졸업생으로 1908년 6월 3일 졸업하고, 의사면허를 취득하였다. 이후 1년간 모교 간호원양성소에서 ‘미터법을 포함한 계량과 측정’, ‘현미경을 이용한 세균학’을 강의한 후, 졸업 동기였던 홍종은과 함께 1909년 학교를 떠나 의주부 남문 바깥에 구세병원(救世病院)을 열었다.

1910년 구세병원에서 진료를 시작한 이부터 1910년대 후반 독립운동에 뛰어들기까지 그의 행적은 기록이 희소해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1917년 그가 만주 안동현에서 '평산병원'을 경영하고 있었다는 기록을 볼 때, 그는 이 시기 의주, 안동 등 접경 지역에서 의료 활동에 종사하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러다 3.1 운동이 발발한 후, 그는 신한청년당에 가입했으며, 뒤이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국 요원으로 발탁되어 독립군 자금을 모집했다. 또한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망명하는 독립운동가들을 돕는 역할도 수행했다. 일제 정보기록은 그를 임시정부가 발행하는 <독립신문>의 통신부원으로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자로 기록하기도 했다.

1921년 10월 초 일제의 검거를 피해 오인석, 김병조 등과 함께 이륭양행이 운영하는 배를 타고 상하이로 망명한 신창희는 대한적십자회 상의원으로 활동했으며, 국민대표회의 준비에도 가담했다. 하지만 그가 가담했던 신한청년당이 공산주의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며 임시정부를 적대시하자 김구, 장붕, 안정근, 이유필(李裕弼)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탈당했다.

그 후 상하이를 떠나 동몽골 지역으로 이주한 그는 군의(軍醫)로 활동하였으며, 조선인에 대한 구제를 위해 의연금모금활동을 하였다. 또한 환자들을 상대로 순회 진료 활동도 수행했다. 그러나 1926년 2월 28일 무리한 진료 활동 수행 중 폐렴에 걸려 49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신창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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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