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뢰딩거의 고양이

사고실험의 구조. 조잡한 그림이지만 왜곡은 없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독일어: Schrödingers Katze)는 1935년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코펜하겐 실험의 비합리성을 증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사고실험으로, 유명한 패러독스 중 하나다.

실험에 대한 설명[편집 | 원본 편집]

양자가 일정한 시간마다 일정한 확률, 이를테면 1시간마다 50%의 확률로 붕괴한다고 가정해보자. 이 양자는 붕괴할 때 방사선을 내뿜는데, 이를 감지하기 위해 가이거 계수기를 설치한다. 그리고 이 가이거 계수기가 방사선을 감지하면 독가스를 뿜도록 조작해둔다.

이 장치를 폐쇄된 상자에 고양이와 함께 넣는다. 그리고 1시간이 지났을 경우, 고양이는 어떤 상태가 되는가? 하는 것이 슈뢰딩거의 고양이 실험이다. 겉보기에는 간단하고 그 답도 간단해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고안된 이유[편집 | 원본 편집]

빛이 파동과 입자의 성질을 모두 가진다는 사실이 밝혀진 이후, 전자와 같은 질량이 있는 입자 역시 파동과 입자의 성질을 모두 갖는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입자가 파동성을 갖는다는 물질파 이론으로 이어졌다. 슈뢰딩거는 여기에서 물질은 근본적으로 파동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마침내 물질파에 대해 다루는 슈뢰딩거 방정식을 발표한다. 슈뢰딩거의 방정식을 풀면 물질파의 성격을 나타내는 파동 함수가 나온다.

여기에서 파동 함수가 무엇을 의미하느냐에 대한 논란이 일어났다. F=ma와 같은 고전물리학적 방정식은 다루는 대상을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나, 슈뢰딩거 방정식과 파동 함수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파동 함수에 대해 크게 입자의 밀도를 나타낸다고 보는 주장과 입자의 존재확률을 나타낸다고 보는 주장이 제기되어 대치하였으나, 입자의 존재확률을 나타낸다는 것이 옳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예를 들어서 원자핵 주변을 도는 전자를 보자면, 태양계 모형의 행성처럼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특정 위치에 밀도높게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오로지 확률적으로 분포되어있을 뿐이다. 관측자는 특정한 위치에서 특정한 확률로 전자를 발견할 수 있을 뿐인 것이다.

그러나 슈뢰딩거는 자신의 방정식이 물리학에 확률론, 그러니까 불확정성을 도입하게 된 것에 불만을 가졌다. 이는 아인슈타인 역시 마찬가지로, 이들은 몇 가지 사고실험을 통한 역설로 불확정성을 논파하고자 하였다. 그 중의 하나가 슈뢰딩거의 고양이 실험이다.

사고실험의 의미[편집 | 원본 편집]

코펜하겐 해석은 아주 간단하게 말해서 파동함수에 의해 서술되는 입자의 존재확률이 어떻게 결정이 되는지에 대한 해석 중 하나로, 관측에 의해 파동함수가 붕괴되고 입자의 상태가 결정된다는 견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관측되기 이전에는 입자의 상태가 중첩되어 존재한다고 본다.

따라서 사고실험에서 사용된 양자는 관측되기 이전에는 붕괴한 상태와 붕괴하지 않은 상태가 중첩되어 존재하며, 그에 따라 고양이 역시 독가스를 마시고 죽은 상태와 독가스를 마시지 않아 살아있는 상태가 '중첩'되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고양이가 죽었든 아니든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둘 중 하나인 상태다.'라는 일반상식에 맞지 않는 것으로, 슈뢰딩거의 의도는 '이것봐라,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코펜하겐 해석이다.'라는 주장을 하고자 한 것이다.

사고실험 이후[편집 | 원본 편집]

슈뢰딩거의 의도와는 다르게, 이 사고실험은 양자역학의 특징을 강력하게 나타내는 대표적인 예시로 사용되고 있다. 이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대한 반론으로 제기된 쌍둥이 역설이 상대성이론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유명한 사례로 사용되는 것과 같다.

진짜 실험으로 증명[편집 | 원본 편집]

언뜻 보아 말도 안 되는 이 사고 실험은 현대에 이르러 진짜 실험이 실시되면서 입증되기에 이른다. 그렇다고 고양이를 이중 슬릿에 쏜다거나 상자 안에 넣고 죽이는 방식이 아닌 양자 중첩 현상을 이용하여 상자 내에 존재하는 삶과 죽음으로 정의된 두 줄기의 빛을 상자 바깥에서 동시에 검출할 수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이 사고 실험이 현실 세계의 실험장치로 구현•입증되면서 이 문제는 철학 영역으로도 넘어가게 되었다.

철학적 접근[편집 | 원본 편집]

슈뢰딩거의 고양이 실험이 겉보기에는 대단히 간단해보이기 때문에 널리 언급되기는 하지만, 정확히 이해하고 사용하는 경우가 그리 많지는 않다. 흔히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언급되는 경우는 'A든 B든 둘 중 하나이지만 열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라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슈뢰딩거의 고양이 실험과 아무 상관 없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실험은 단순히 '어떤지 알 수 없다.'라는 불가지론적 내용이 아니라, '두 상태가 동시에 중첩되어있다.'라는, 일반상식으로는 초현실적인 상황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실험이 다루는 현상이 현실에서 쉽게 볼 수 있는게 아니긴 하지만...

또한 '관측'이라는 것의 의미를 오해하여, '보는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할 수 있다. 모든 것이 사람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라는 주장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의 대표적 사례가 《시크릿》이라는 자기계발서다.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관측'은 '사람이 눈으로 보는 행위'가 아니라 '입자와 입자의 상호작용'이라는 의미에 가까우니 어찌보면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 하지만 이 사고 실험이 주는 철학적 의미와 겹쳐 보면 결코 가볍지 않다. 사실 코펜하겐 해석이 처음 나왔을 때에는 '관측=눈으로 보는 것'이었으니 이럴 만도 하겠다. 관측의 정의가 바뀐 것은 실험 규모가 전자 수준에서 중성자나 원자 단위로 확대되면서부터다.

그런데 '관측'의 정의를 놓고 보면 위처럼 오해하기 쉽겠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이는 물리학계 내에서부터 단골 논란거리였다. 애초 이 사고 실험이 나온 배경이 '파동-입자 이중성'을 놓고 어떻게 해석하느냐에서 출발한 것이므로 논쟁이 거세게 일어났음은 당연한 일이다. 특히 이를 다룬 물리학자들은 대부분 동서양 철학에도 밝았으므로 이를 놓고 철학적으로 해석하면서 논쟁(충돌)하기도 했다. 닐스 보어의 코펜하겐 해석도 그 중 하나이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