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용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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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詠堯. 한국식 독음은 유영요. 자는 칙지(則之), 영요(詠堯, 泳堯), 호는 무곤(武琨). 중화민국의 군인.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07년 8월 18일 중국 후난성 리링현(현 중화인민공화국 후난성 주저우시 리링구)에서 태어났다. 그는 웨윈중학(岳云中学)을 졸업한 후 광저우 육군 강무학교 보과 1기를 수료했다. 1924년 황포군관학교가 개교하자 입교 신청서를 제출했다. 당시 황포군관학교 입학 조건은 지원자의 나이를 18세 이상 25세 이하로 규정했다. 이때 류용야오는 17세로 한 살 아래였기에 입교가 불가능했다. 이에 그는 자신이 19살이라고 속여서 겨우 입교할 수 있었다.

이후 황포군관학교 제1기 보병과를 졸업한 그는 국민당의 2차 동정에 참가해 혜주성 공방전에서 공성 결사대대장을 맡아 적군이 기관총을 퍼붓는 와중에도 성벽을 기어올라 성을 공략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총탄 하나가 그의 두개골에 박혔고, 그는 총탄을 끝내 적출하지 못해 남은 생애동안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이후 모스크바 중산대학으로 유학가서 졸업한 그는 1927년 귀국하여 국민혁명군 육군 중령, 대령 등을 역임했으며, 1929년 이후 역행사(力行社)와 부흥사(复兴社)에 가입하고 정치훈련처장, 난징신생학교 교장 등을 역임했다. 중일전쟁 발발 후 후난성 항일자위군(抗日自衛軍) 부총사령(副總司令) 겸 군관구(軍管區) 부사령(副司令)과 군사위원회 위원장 시종실(侍從室) 제3처 부주임 등을 역임하였다.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이동했을 때 김구, 이범석 등과 친교를 맺고 한국 광복군 승인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한국 광복군은 창설 직후 중국 군사위원회의 인준 없이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 때문에 국민당 정부는 한국광복군의 군사 조직 개편과 징모분처(徵募分處) 설치 등 제반 활동에 제약을 가하고 있었다. 1940년 말 중국군사위원회는 각지의 군사장관들에게 한국광복군의 활동을 엄격히 단속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민당 정부의 주쟈화를 창구로 하여 한국광복군 승인을 위한 교섭을 시작하였다. 주쟈화는 한국광복군의 추인을 건의하고 함께 항일전에 참가할 수 있도록 할 것을 요청했다. 이때 류용야오는 국민당 군 내부에서 한국광복군 활동을 적극 지지했다. 1941년 5월에는 군사위원회 정치부 제2청 청장, 1942년 1월에는 국민당 중앙조직부 조직위원, 1943년 5월에는 군사위원회 정치부 제1청 청장 등을 역임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고 지원하는 활동을 수행했다.

중일전쟁이 종결된 후, 그는 1947년 국민당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9년 광저우에서 국방부 본부 차장을 맡았으며, 국방부 장관 직무대행 겸 전국 인사부장으로 부임한 뒤 국민혁명군이 대만으로 철수하여 재편성하는 걸 진두지휘했다. 1950년 대통령궁 전략고문 및 육군 1급 상장으로 진급했으며, 예편 후 국민당 설계고과위원회 위원, 중국역사문화협회 상무 이사, 후난성 예릉현 동향회 이사장, 중국 사회학회 겸임 이사장, 중국정치학회 이사, 중국교육협진회 상무이사 등을 역임했다. 1980년에는 중국 문화계 친목회 수석 고문을 맡았다.

1998년 8월 21일 타이베이시 공구총병원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류용야오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