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지하철/역사

이 글에서는 런던 지하철의 역사를 다룬다.

세계 철도사를 뒤져봐도 영미권은 사설 철도의 역사가 깊은 편이다. 런던 지하철 역시 예외는 아니다. 런던 지하철의 전신을 구성하는 회사는 상당히 많은데 이들 노선들은 대부분 사철이었다. 1930년대에 들어서야 통합 계획이 실현되어 영국 정부에서 이들을 인수, 결국 1933년에 런던의 대중교통을 책임지는 런던 여객운송부(London Passenger Transport Board; LPTB)가 태어나게 된다. 이후 런던 교통국(Transport for London; TfL)이 출범하면서 현재에 이르게 된다.

최초의 지하철도 구상[편집 | 원본 편집]

지하철도 방식은 19세기 초부터 구상되기 시작한다. 당시 런던에 들어오는 철도는 제각각 터미널역을 가지고 있었고, 점점 더 여객수요가 늘어나면서 이들 역간에도 수요가 생기기 시작한다. 이 때, 터미널을 잇는 동시에 런던 시내로의 접근을 이루어 보다 많은 여객 수요를 끌어들일 수 있는 방법으로 철도를 지하에 매설하는 방법을 생각해낸다. 더 정확히는 먼저 땅을 파내고, 그 자리에 본선 규격 수준의 철도를 부설한 뒤, 위에 뚜껑을 덮어 도로를 깔아 완성시키는 방법 - 즉 개착식 지하철(Cut-and-cover)이 고안 된다. 런던 지하철도의 초창기를 구성하는 노선들은 다 이런 개착식 노선(Subsurface)이며, 때문에 그 규격이 영국 철도 규격에 준한다. 정확히는 본선보다도 조금 더 큰 편. 다만, 최초에 운행될 때에는 전기 철도 기술이 미성숙했던지라 증기기관차로 운행되었고, 때문에 개착식 구간에는 아직도 상당히 하늘이 뚫려 환기를 유도하는 개구간들이 많이 남아있다.

최초의 노선, 메트로폴리탄 철도[편집 | 원본 편집]

가장 첫 지하철도 노선은 1850년대 계획된 메트로폴리탄 철도다. 메트로폴리탄 철도는 파링던부터 킹스크로스까지의 운수권을 얻어 이 구간에 지하철도를 부설하기 시작했으며, 1863년 1월 10일, 3마일 60체인 (6 km)에 이르는 구간의 철도를 개통한다. 개통 당일날 무려 38,000명을 수송했었다고 할 정도니, 메트로폴리탄 철도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되었고, 그 이후 사설 지하철도 노선들이 속속 제안되기 시작한다.

디스트릭트 철도와 순환선 논쟁[편집 | 원본 편집]

메트로폴리탄선 이후에 많은 계획이 쏟아졌으나, 런던 의회는 도시 내부를 순환하는 지하철도선을 구상하기 시작한다. 메트로폴리탄선과의 연결선을 지어서 돌려볼 생각이었는데, 이게 마침 디스트릭트 철도 쪽의 제안 선형이 좋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접촉하게 된다. 문제는 조건이었다. 디스트릭트 철도에게 노선을 건설만 하고, 메트로폴리탄 철도에서 순환선 운행을 조건으로 이들을 인수하되 인수 대금을 지불하는 것을 조건으로 인가를 내주는데, 처음에는 잘 될 것 같던 계획이, 런던 땅값이 치솟으면서 디스트릭트 철도 쪽 건설 비용이 급격하게 늘어나게 되었다. 디스트릭트 철도는 그들대로 자신들의 비용으로 메트로폴리탄 철도를 먹여살린다고 생각하게 되니 불만이 커졌고, 메트로폴리탄 철도는 인수 시 막대한 건설부채까지 떠 안아야한다고 생각하니 불만이 커졌다. 결국 건설은 되었는데 인수는 불발되고, 디스트릭트 철도는 자기들끼리 운영을 꾸려나가기 시작한다.

저심도 확장시대와 순환선의 완성[편집 | 원본 편집]

결국 두 회사는 한창 영업권을 늘려가기 시작하는데, 디스트릭트 철도 역시 꽤 영역을 늘려가기 시작하였으나, 메트로폴리탄 철도는 아예 대놓고 런던 광역권 바깥으로 나가기 시작해 간선철도 영업을 할 것을 구상하기 시작한다. 그들의 계획은 이스트 런던 철도을 경유해 사우스이스턴 철도 방면으로 뻗어나가는 것이었는데, 결국 보다 못한 런던 의회에서 조례를 세워버려 메트로폴리탄 철도를 막는다. 그 조례란 "너희 동부 런던 철도 직결하려고 했지? 직결할거면 순환철도 짓고 해라."라는 내용이었다. 결국 메트로폴리탄 철도는 순환철도 구간을 짓게되고, 런던 의회에서는 순환선 영업을 결국 성공적으로 종용해, 1884년 10월 6일 정식으로 순환 노선이 개통되게 된다. 하지만 왜 이렇게 반발 없이 순순히 따랐을까?

대심도 터널과 전기 철도 시대의 시작[편집 | 원본 편집]

얘기가 조금 길어지겠지만,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던 것이다. 1869년, 그레이트 타워힐에서 출발, 템즈 강 밑을 지나 피클 헤링 스테어까지 이어지는 지하 쉴드 터널이 개통된다. 폭 7피트(2.1 m), 길이 1,340피트(410 m)의 이 터널은 1864년 피터 W. 바로가 특허를 낸 철제 터널링 쉴드에 의해서 개통되게 된다. 이 터널에 철제 궤도를 깔고 여객을 나르기 시작했는데(이른바 타워 지하궤도; Tower Subway), 비용이 비용이었던지라 파산해버리고 궤도는 철거되어 인도 전용으로 바뀌게 된다. 여기서 영감을 얻은 제임스 H. 그레이트헤드는 시티 & 사우스 런던 철도 사를 세우고, 1886년부터 바로우의 쉴드 기술을 이용한 노선을 착공했다. 킹 윌리엄 스트리트부터 엘리펀트 & 캐슬까지의 구간에 10 ft 2 in (3.10 m) 직경의 터널을 파고, 엘리펀트 & 캐슬부터 남쪽 구간은 10 ft 6 in (3.20 m) 직경의 터널을 판다. 처음에는 타워 지하궤도처럼 케이블카 영업을 시도하려다가, 당시 막 뜨기 시작한 전기철도 기술을 접목할 생각을 하게 되고, 전기궤조 선을 부설, 상행선과 하행선에 극이 다른 직류 500 V를 가압해 사용하기 시작한다.

전기철도의 잇따른 성공[편집 | 원본 편집]

워털루 & 시티 철도는 당시 런던 & 사우스웨스턴 철도의 터미널이었던 워털루역에서 더 나가, 시티오브런던 내에 역을 설치하려는 계획에서 출범되었다. 런던 & 사우스웨스턴 철도는 1898년 이 노선을 완성시켰고, 4량 편성 전동차를 전철화된 구간에 굴리기 시작한다.

본격적인 튜브 시대 개막[편집 | 원본 편집]

여기에 센트럴 런던 철도셰퍼즈 부쉬부터 시티오브런던의 중심지인 뱅크까지의 대심도 지하 쉴드 터널을 뚫고 지하 전철 노선을 1900년에 개통한다. 터널의 직경은 11 ft 8 ¼ in (3.562 m)로 꽤 넓었던 편이며, 이 구간의 운임을 2펜스(현재의 한국 돈으로 약 1,500원 정도) 단일 운임으로 정하게 된다. 당시 경제 수준과 기술 비용을 고려하면 정말 헐값이었던 이 가격은 사람들에게 충분히 매력적이었고, 한 달에 120만명 이상이 노선을 이용하게 된다. 매연 없는 전기철도에 낮은 운임 설정으로 높은 인기를 얻은 노선은 운임을 따라 "2페니 튜브"로 별명이 붙이게 되고, 사람들에게 널리 불리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런던 대심도 쉴드 터널 노선의 별칭이 튜브가 되기 시작했다.

기존 철도의 전기철도화[편집 | 원본 편집]

센트럴 런던 철도의 성공은 메트로폴리탄 철도와 디스트릭트 철도에게 엄청난 부담이 되기 시작했다. 그들의 노선은 넓기는 할지언정 증기기관차를 사용해서 터널에 매연이 가득했기 때문에, 심각한 실적 부진을 겪게 된다. 결국 두 회사는 갈등하고 있을 때가 아니란 걸 깨닫고, 조례에 따라서 순환 노선을 짓는다. 순환철도 영업을 위한 합작 회사를 1901년에 짓고, 전철화 계획을 세우는데, 최초에는 넓은 터널 단면적으로 당시 막 개념이 생겨나던 간츠 식의 가공전차선에 의한 3상 교류선 전철화 계획을 세우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디스트릭트 철도의 투자자였다. 미국인 찰리 여크스는 이러한 계획에 부정적이었는데, 그는 시티 & 사우스 런던 철도와 센트럴 런던 철도가 성공한 것처럼 직류 노선을 깔아야한다고 주장했으며, 자신의 지분을 엄청나게 키워 교류 계획을 관철시키려던 메트로폴리탄 철도를 굴복시키고, 현재와 같은 형식의 제4궤조 직류 전기철도화를 실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