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해군

개요[편집 | 원본 편집]

사실상 1903년부터 1905년 을사조약 당시까지 존재했던 대한제국해군.

기원[편집 | 원본 편집]

대한제국 해군의 역사는 조선 말 해군의 근대화를 위해 설치되었던 통제영학당에서 기인한다.

근대 이전의 조선 수군은 경남 통영에 수군의 최고 지휘기관인 통제영을 설치, 진관체제를 바탕으로 경기와 강원을 비롯한 남도 지역에 수군기지를 설치하고 해안방어 임무를 수행했다. 1883년 12월, 기존의 수군 체제를 대신하기 위해 부평에 통제영의 기능을 수행하는 기연해방영(畿沿海防營)을 설치하고 명성황후의 11촌 조카인 민영목을 기연해방사무에 임명했다. 기연해방영 휘하에는 강화에 해연총제영(海沿總制營)을 만들었고, 강화유수 및 진무사를 겸하는 해연총제사가 경기 연해 및 인천 연안의 해안방어를 총괄하게 되었다. 강화에는 해군영(海軍營)과 통제영학당(總制營學堂)도 설치되어 해군사관을 양성할 계획이 세워졌다.

1892년 12월 고종은 근대 해군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영국총영사에게 해군 교관 파견을 요청하고, 1893년 3월에는 해군학교 설치령을 반포했다. 1893년 9월부터는 15세 이상과 20세 이하의 생도 38명과 수병 300여 명을 모집하여 정식 개교 후, 허치슨(W. du F. Hutchison)에게 영어교육을 위임했다. 또 영국정부에서는 1893년 6월, 해군 교관 파견을 승인하였고 이에 따라 예비역[1] 대위인 콜웰(W. H. Callwell)을 교관으로, 대한제국의 요청으로 추가로 조교 커티스(J. W. Curtis)하사[2]를 파견했다.

하지만 통제영학당은 단 한명의 졸업생도 내지 못한 채, 경제적인 이유와 정치적인 외압으로 인해 1894년 11월 폐교하고 만다. 그러나 1987년 장학근 전 해사교수의 ‘조선시대 해양방어사연구’라는 논문을 통해 그 존재가 다시 알려지고 해군이 1999년 6월 강화군청에 통제영학당 터에 대한 문화재 지정을 요청함에 따라 이 곳은 2001년 4월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49호로 지정되었다.

역사[편집 | 원본 편집]

대한제국 해군의 실질적 역사는 양무호의 구입으로부터 시작한다. 고종 황제가 ‘나라의 힘을 키운다’며 하사한 ‘양무(揚武)호는 본래 총톤수 3432톤의 화물선으로서, 1888년 영국 미들스보로의 R. Dixon사가 팰러스(Pallas)라는 이름으로 건조한 화물선이었다. 이후 1894년 일본 미쓰이물산이 석탄운반선으로 쓰기 위해 25만엔에 구입했고, 9년간 사용한 후 대한제국에 55만엔에 판매했다. 정확히 대한제국이 어떤 방식으로 판매했는지는 전해지지 않지만, 이는 대한제국 국가 예산의 10%에 해당하는 액수였고, 국방예산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양무호에 대해서는 항목 참조.

이후 1904년, 본격적인 군함인 광제호(廣濟號)를 일본 가와사키 조선소에 주문하게 된다. 화물선을 개조해 포라고 부를 수 없을 만큼의 포를 달아놓은 양무호와는 달리, 광제호는 군함으로서 건조되어, 3인치 포 3문을 무장했다. 광제호의 도입과 동시에 대한제국은 해군 군제를 개편, 일본 상선학교 출신이며 양무호의 함장이었던 신순성을 함장으로 임명했다. 또 1910년엔 무선 전신 시설도 설치되어, 근대적인 군함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광제호에 대해서는 항목 참조.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 이후, 광제호는 군함으로서의 목적을 상실하고 연안 세관 감시선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로 인해 사실상 대한제국의 해군은 해산하게 되었다.

보유 함정[편집 | 원본 편집]

읽어보기[편집 | 원본 편집]

  1. 정치적, 경제적 이유 때문에 지금도 개발도상국 군사협력에는 예비역이 교관으로 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
  2. 콜웰 대위는 본래 준사관급 인원 파견을 요청했으나, 대한제국의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하사관으로 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