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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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正. 필명은 해도초인(海島樵人). 자는 명충(明忠), 호는 화산(華山).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80년 5월 19일 충청도 해미현 서면(현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도이리)에서 아버지 남정우(南廷虞)와 어머니 여산 송씨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정묘호란 때 안주성 전투에서 순국한 남이흥의 10대손으로, 1906년 정산에서 민종식이 이끄는 의병대에 가담해 소모장(召募將)으로서 정산, 공주, 홍주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는 역할을 수행했으며, 1908년 호남 일대의 의병 13진 도총영군사(都總營軍師)로 임명되어 전투에 참여했다고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이후 1923년 10월 중국 봉천성 회덕현의 오가자에서 편강렬, 양기탁 등과 함께 의성단(義成團)을 조직하여 길림, 장춘 등지에서 수백 명의 단원을 모집하여 훈련시키고 적 기관의 파괴와 부역배 토벌 작전에 투입했다. 특히 장춘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해 7시간 동안 교전하여 다수의 인원을 사상시켰으며, 심양에 있는 만철 병원을 습격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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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10월 1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1923년에는 정의부(正義府) 고문을 역임하고 길림성의 중한변농회(中韓辨農會)에서 변무처장(辨務處長)을 지냈으며, 고려혁명군단장(高麗革命軍團長)을 역임했다. 또한 1926년 5월 길림성에서 동지 50여 명과 함께 비밀결사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대본영을 조직하고 조선독립의 선전 및 군자금을 모집했으며, 1926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 신청사의 낙성식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폭탄을 투척하기 위해 국내에 잠입했다가 체포되어 1927년 8월 3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미결구류일수 중 9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1]

1928년 출옥한 그는 일제로부터 주거 제한 조치를 받고 향리에서 은거했다. <의령 남씨 연보>에 따르면, 그는 경성에서 대종교의 교명을 용화교(龍華敎)로 변경하고 법문을 신설해 교주가 되었다고 한다. 용화교는 비밀히 청년을 규합하여 평안도, 함경도, 만주 등지로 교세를 증가시켰다고 한다. 8.15 광복 후 한국광복군 국내지대사령부 고문을 맡아 지대 구성 활동을 했고, 1948년 제헌국회 선거에서 서산군 갑구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이후 6.25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20일 서산군 정미면 소방서 창고에서 공산군에게 피살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6년 남정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4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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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