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수 (1926년)

(1926).jpg

김명수(金明壽, 1926년 12월 8일~2015년 12월 11일)는 대한민국독립운동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26년 음력 12월 8일 황해도 옹진군 옹진읍 온천리에서 출생했고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함흥고등보통학교 재학중이던 1944년 4월 함경남도 선덕군 소재의 일본군 비행장에 근로 동원되었다. 함흥고등보통학교에서 클럽 활동을 통해 다양한 모형항공기 제작에 참여했던 김명수는 오늘날의 드론이라 할 수 있는 무선조정 (RC, Radio Control) 모형항공기 제작에 큰 관심을 가졌다. 그는 친구와 함께 설계도와 부품을 구하여 당시로는 최첨단 전자통신 장비였던 단파 송수신기를 제작하여 RC 무선조정 모형항공기 제작에 성공했다. 이때 단파 송수신 장치의 수신부를 통해 김명수는 그 존재조차 몰랐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방송을 청취하게 되었고, 상해 임시정부의 존재와 독립운동과 조국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김명수는 도쿄 로즈를 포함한 다양한 국제 단파 방송을 청취하여 일본의 패망이 가까왔음을 깨닫게 되었다. 함께 동원되어 온 학생들에게는 단파 수신장치를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방송 내용을 듣게 함으로써 항일의식을 고양했다. 또한 작업장에서 쇼와 덴노에 대한 비판을 공공연히 행해 가혹한 노동착취에 항거했다. 근로 동원이 끝날 무렵 마련된 위안회 석상에서, 그는 학생들을 선동하여 《기미가요》 대신 통해 배우게된 애국가와 이은상 작사 현재명 작곡의 대한의 노래 등을 대신 불렀다.

이 함흥 '만세사건'의 주동자로 체포된 그는 1944년 9월 함흥지방법원에서 황실에 대한 육해군형법 및 임시보안령과 보안법 위반 혐의로 소년범에게는 중형인 징역 단기 1년, 장기 4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를 거처 소년범을 수용한 인천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1945년 8.15 광복 직후 출옥하였다. 당시 단파 수신기는 함경도 일대에 일본 헌병대와 관동군이 각 한 대씩 보유하고 있던 첨단 통신장비였다는 일화가 있다.

김명수의 항일 투옥 기록은 30여 년이 지난 어느날 우연히 한 경찰서에서 발견되었으며, 동료들의 추천을 통해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김명수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해방후 연세대학교 물리학과에 재학중이던 1950년 6.25 사변의 발발로 인해 공군에 입대하여 7년간 복무했다. 공군 복무 중에는 전쟁 당시 군 명령체계를 수천 명의 타자병이 전달하는 비효율적인 상황에서 오류와 비효율을 해결하기 위해 군 명령 체계를 최초로 코드화하였다. 미태평양 사령부를 방문한 경험이 있는 그는 당시의 미군은 이미 컴퓨터를 통해 정교한 전산 명령체계를 운영하는 것에 깊이 감동되었으며, 훗날 대한민국 국군의 명령 전달체계를 코드화를 완성하였고 그 공을 인정하여 대한민국 정부는 두 번째 훈장인 화랑금성무공훈장을 수여했다. 그가 전후 공군 홍보의 일환으로 항공기 모형의 제작 기술을 널리 보급하고 모형항공기 대회를 개최하여 한국 최초의 모형항공기 대회를 창립했다.

김명수는 이후 연세대학교와 숭실대학교 물리학과에 재직하며 교육자로서 여생을 보냈으며 교육계에 기여한 공로로 생에 3번째 훈장인 모란장을 수여받았으며, 숭실대학교가 국내 최초의 전산원을 설립하는데 기여했다.

11251.jpg

김명수는 2015년 12월 11일에 사망했고 그의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 제1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유족으로는 양예정 여사와 두 아들(김주형 본이비인후과 원장, 김주한 서울의대 교수)이 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