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한

김두한은 독립운동가인 김좌진 장군의 아들로 일제강점기부터 대한민국 건국 이후까지 살다 간 인물이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18년 독립운동가 김좌진의 서자로 태어났다. 이후 종로에 기반을 잡으며 깡패로 활약했으며 18살의 나이에 벌써 우미관을 장악해 폭력조직 두목이 되었다. 1944년 이재희와 혼인해 해방 이후 슬하에 김을동을 낳게 된다.

권모술수에 매우 능한 인물로 심영(심재설)이 광교를 건널 때 광교 정 중앙에서 저격했는데 이는 광교가 종로구와 중구의 경계선이었기 때문에 양쪽 경찰서에서 사건을 헷갈리게 만들기 위해서 고의로 그렇게 한 것이다. 야인시대에서는 이로인해 심영이 환관에 등극했다고 나오기도 하지만 심재설은 김두한에게 저격당해 중상을 입었다. 하지만 심영은 6.25 전쟁이 터지자 아픈 몸을 이끌고 연예인들을 대거 납북했다.

이 무렵 김두한은 조직원을 3만 명이나 거느린 엄청난 세력가였는데 이를 안 김일성이 김두한에게 조선인민군 육군 소장으로 임관시켜 준다는 제의와 함께 조선인민군 육군 소장 정복을 김두한에게 선물로 보내왔다. 과거에는 데리고 온 병력의 숫자대로 계급을 맞춰줘서 임관시키는 제도가 어느 나라 군대든 존재했었는데 김두한도 이에 따라 3만 명을 이끌고 있었기 때문에 김일성에게 사단장급 대우를 받은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인 김좌진 장군이 공산주의자의 손에 사살당한 사실을 알게 된 김두한은 이 제의를 거절했다.

6.25 전쟁에도 조직원들을 이끌고 참전했으며,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조직폭력배 두목으로 살다가 박정희가 5.16 군사반란을 일으키자 자신의 조직을 반공 청년단으로 바꿔서 살아남는 등 뛰어난 권모술수 능력을 보여줬다. 같이 깡패를 하고 있다가 박정희가 나타나고도 정신을 못 차리고 설치고 다녔던 임화수, 이정재 같은 무리들이 박정희에 의해 싹 휩쓸려나간 것과 대조된다.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자마자 김두한은 바로 조직을 해산시켰고 국회의원에 출마, 당선되었다.

국회의원이 된 이후 김두한은 국회의원 싸움실력 랭킹 1위였다. 차지철이 하도 박정희 빽을 믿고 설치고 다니면서 동료 국회의원을 구타하는 일이 잦았는데 이에 보다 못한 김두한이 국회에서 갑자기 상의를 탈의하고 나서 차지철 바로 앞에 가서 서더니 차지철에게 "힘없는 다른 국회의원들 건드리지 말고 싸우고 싶으면 나와 싸우자."라고 말했다. 이에 질겁한 차지철은 그 말을 듣자마자 바로 퇴근했다. 이걸 알게 된 박정희는 4선 의원이던 차지철을 국회의원 그만 시키고 경무대 경호실장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그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성격 때문에 사고를 치고 국회의원에서 쫓겨나게 된다. 사카린 밀수 사건에 분노한 김두한이 국회에 대변을 투척하는 짓을 저질렀고 그로 인해 국회의원에서 면직 당했다.

그리고 1972년 유신 헌법이 선포되던 시기에 김두한은 병으로 쓰러져 사망했다.

가족관계[편집 | 원본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