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황룡사지

경주 황룡사지
Hwangnyongsa Temple Site 02.JPG
건축물 정보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320-1번지
소유 경상북도 경주시
대지면적 390,418 m2
문화재 정보
종목 사적 제6호
지정일 1963.01.21

삼국 시대에 지어져 고려 중기 이후까지 이어지다가 제3차 고려-몽골 전쟁 때 소실되어 현재는 터만 남아 있는 절. 터만 남아 있기 때문에 황룡사지(皇龍寺址)라고 한다. 황룡사 9층 목탑이 유명하였으며, 당시의 랜드마크였다고 할 정도의 거대한 건축물이었다. 9층 목탑에 묻혀 잘 언급되지는 않지만 메인 건물인 중금당 또한 경복궁 근정전보다 클 정도로 거대했다. 또한 금당 벽화는 신라의 유명 화가인 솔거가 그린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고 전한다.

황룡사 영상 복원

특성[편집 | 원본 편집]

늪을 메워서 그 위에 지은 절이며, 중문, 목탑, 금당, 강당이 남북으로 길게 배치된 1탑식 배치였다. 그러나 장륙존상과 목탑 등이 조성된 후 금당 좌우에 작은 금당이 배치되는 1탑 3금당식으로 바뀌고, 탑의 좌우에 종루와 경루(經樓)가 대칭을 이루어 배치되었다. 또 사방은 복도와 같은 회랑으로 둘러싸여, 독특한 가람배치를 보이고 있다.

설립에 대한 전설[편집 | 원본 편집]

사명 유래[편집 | 원본 편집]

진흥왕 14년(553년)에 경주 월성의 동쪽에 궁궐을 지으려고 작업을 하였는데 그곳에서 황룡이 나타나 궁궐 공사를 멈추고 절로 고쳐 짓기 시작하였다. 이에 황룡사라 하였다.

장륙삼존상[편집 | 원본 편집]

574년, 인도 마우리아 왕조아육왕이 석가삼존상을 만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배에 재료로 쓰려던 금과 철, 그리고 삼존상의 모형을 배에 실어 보낸 것이 신라 땅에 닿았는데 삼존상의 모형은 울산에 동축사라는 절을 지어 모시고 금철로 장륙에 이르는 삼존상을 만들어 황룡사에 모셨다고 한다.

신라 제24대 진흥왕 즉위 14년 계유(553년) 2월에 궁궐을 용궁(龍宮) 남쪽에 지으려 하는데 황룡이 그곳에 나타났으므로 대신 절을 짓고 황룡사라 하였다. 기축(569년)에 이르러 주위에 담장과 지붕을 만들어 17년에 와서야 비로소 끝내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바다 남녘에 큰 배 한 척이 나타나 하곡현(河曲縣, 오늘날 울산광역시) 사포(絲浦)[지금의 울주(蔚州) 곡포(谷浦)다.]에 이르렀다. 조사하니 첩문(牒文)이 나왔으므로 이르기를, '서축(西竺)의 아육왕이 황철 오만칠천 근과 황금 삼만 푼을 모아서[〈별전(別傳)〉에는 철 사십만칠천 근, 금 일천 량이라고 하였는데 아마 잘못된 것 같다. 또는 삼만칠천 근이라도 한다.] 석가삼존상을 주조하려고 하다가 낭패하였다. 그래서 그것을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면서 축원하기를, "원컨대 인연이 있는 땅에 이르러 장륙(丈六)의 존영이 되어 주소서." 라고 하고 아울러 본보기로 부처 하나와 보살상 둘을 실었다.' 고을 관리가 문서를 갖춰 국왕에게 아뢰었더니, 그 고을 성 동쪽의 탁 트인 땅을 골라 동축사(東竺寺)를 세워 세 불상을 안치하고, 그 금철은 서울로 수송하여 대건 6년(574년) 갑오 3월에[절의 기록에는 계사(573년) 10월 17일이라고 하였다.] 장륙존상을 주존하였는데 단번에 이루어졌다. 그 무게는 삼만오천칠 근으로 황금 일만일백구십팔 푼이 들었으며 두 보살에는 철이 일만이천 근, 황금이 일만일백삼십륙 푼이 들었다. 황룡사에 모셨더니 이듬해에 불상에서 눈물이 발꿈치까지 흘러내려 땅이 한 자나 젖었다. 이는 대왕이 붕어할 조짐이었다.


新羅第二十四眞興王卽位十四年癸酉二月 將築紫宮於龍宮南 有黃龍現其地 乃改置爲佛寺 號黃龍寺 至己丑年 周圍牆宇 至十七年方畢 未幾海南有一巨舫 來泊於河曲縣之絲浦[今蔚州谷浦也] 撿看有牒文云 西竺阿育王 聚黃鐵五萬七千斤 黃金三萬分[別傳云 鐵四十萬七千斤金一千兩 恐誤 或云 三萬七千斤] 將鑄釋迦三尊像 未就 載舡泛海而祝曰 願到有緣國土 成丈六尊容 幷載<模>樣一佛二菩薩像 縣吏具狀上聞 勅使卜其縣之城東爽塏之地 創東竺寺 邀安其三尊 輸其金鐵於京師 以大建六年甲午三月[寺中記云 癸巳十月十七日] 鑄成丈六尊像 一鼓而就 重三萬五千七斤 入黃金一萬一百九十八分 二菩薩入鐵一萬二千斤 黃金一萬一百三十六分 安於皇龍寺 明年像淚流至踵 沃地一尺 大王升遐之兆
— 《삼국유사》 권3 탑상4 황룡사장륙

불상과 재료가 배를 타고 인도에서 신라까지 어떻게 왔는지는 묻지 말자

9층 목탑[편집 | 원본 편집]

삼국시대 후기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목탑으로 기록된 목탑이다. 80미터에서 60미터로 추정되는데 당시 중국의 최대의 목탑보다 높았다고 한다. 제3차 고려-몽골 전쟁 때 소실되었으며 일본, 중국, 북한 등의 여러 학자들이 복원안을 내놓는 중이다. 높이가 9층인 까닭은 신라 주변 아홉 나라(九韓)가 신라에게 항복하고 조공할 것이라는 염원을 담은 것이다.

복원[편집 | 원본 편집]

2022년 경주시에서 발표한 예산 편성에 따른 복원 계획 개요

위 치: 경주시 구황동 772번지 일원
총 사업비 2700억원(국비 1,890, 도비 381, 시비 429)
사업기간: 2006 ~ 2025년
황룡사 서금당 3d 복원 영상. 당시 건축 양식이 반영되어있다.[1]
당나라 대명궁 인덕전 모형(비교군)

복원 사업에는 매우 큰 비용이 들어가고 당시의 건축 기술이 남아있지 않아[2] 많은 난관이 예상된다.

많은 삼국시대 건축물의 단청이 조선시대식 상록하단(上綠下丹)으로 복원되었는데 자료가 어느 정도 충분함에도 그렇게 진행되고 있다. 그 이유는 그 시대의 단청에 대한 정보는 있지만 여러 양식이 존재하듯이 복원한 것이 원형의 단청 양식과 정확히 일치하다는 보장이 없다. 그 시대의 양식은 맞는데 디테일 부분에서는 복원이 불가능하다. 이번에도 조선시대식으로 복원될 가능성이 어느 정도 있다.

증강 현실로의 복원은 한창 진행 중에 있다. 2020년 중순 황룡사 중문과 남회랑은 디지털로 복원이 이루어졌고 2024년까지 황룡사 금당, 이후에는 강당과 목탑까지 복원할 계획이다. 증강 현실 복원은 고증이 힘든 건물들을 조선식으로 복원하지 않고 과감히 삼국시대 양식으로 복원 중에 있다. 증강 현실 구현은 정확성이 떨어지는 GPS를 이용하지 않고 구석구석 마커를 설치해 시청자의 위치를 정확하게 추적하도록 했다.[3]

파괴[편집 | 원본 편집]

고려 고종 25년(1238년)에 몽골 제국군의 방화로 소실되어 지금은 그 터만 남아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종루에는 거대한 종이 있었는데, 이 역시 이때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각주

  1. 약간 일본 느낌이 나는 이유는 일본은 한반도 삼국시대 쯤의 건축 양식을 몇 백년 동안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다.박제
  2. 옆 나라 일본에서도 도다이사 대불전을 에도시대에 중건할 때 대불전을 처음 지었을 당시의 건축 기술이 실전되어 1/3의 크기로 줄었다.
  3. 임동근. “증강현실(AR)로 되살아난 신라 최대 사찰 '황룡사'”, 《연합뉴스》. 2022.8.30. 확인.